'근로'가 아닌 '노동'이다…63년 만에 제 이름 찾는 '노동절'

'근로자의 날' 마침내 내년부터 '노동절'로 변경

국회 환노위, 관련 법 개정안 여야 합의로 의결

국힘도 동의해 25일 본회의 무난히 통과 전망

'부지런히 일한다'는 '근로', 수동적·순종적 용어

'노동'은 능동적·주체적…수구보수에선 불온시

이승만 "5월 1일은 공산도당 이용"…3월 10일로

박정희는 명칭까지 바꿔…김영삼, 날짜만 환원

이재명 "노동 존중 가치 바로 세울 것" 오랜 공약

'빨간 날' 법정 공휴일 추진도…당정 의지 확고

"헌법 개정 통해 '근로'를 '노동'으로 전환해야"

2025-09-21     김호경 에디터
1991년 4월 24일 전노협, 전민련, 전농, 국민연합 등 각계 재야단체 대표들이 서울 동대문구 전노협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세계노동절을 맞아 수도권 대회를 여는 것을 비롯해 부산 등 전국 13개 지역에서 노동절 기념대회를 동시에 공동 개최하겠다고 발표하고 있다. 1991.4.24. 연합뉴스 자료사진

'근로(勤勞)'와 '노동(勞動)'이라는 말은 사전적 정의와 어감은 물론 역사성과 사회적 인식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부지런히 일함'이라는 뜻의 근로가 수동적·순종적 뉘앙스를 띠는 반면, '몸을 움직여 일을 함'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라는 뜻의 노동은 능동적·자발적 의지를 강조한다.

예나 지금이나 노동운동, 노동조합을 불온시하는 수구보수 진영은 노동이라는 단어의 사용 자체를 기피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승만·박정희 정권에서 '노동절(Labor Day)'의 날짜가 바뀌고 이름까지 '근로자의 날'로 둔갑한 배경도 같은 맥락이다. 근로는 노동을 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고용인들과 감독 당국의 입장에서 바라본 표현이라는 점에서 '근로자의 날'에는 주체적인 '노동자' 대신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일만 하는 '근로자'가 되라는 메시지가 내포돼 있다.

그래서 노동계를 중심으로 민주진보 진영에서는 오래전부터 노동절 명칭을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해왔는데, 마침내 이재명 정부에서 실현을 눈앞에 두게 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20대 대선에 이어 21대 대선 후보 시절에도 이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대통령 당선 뒤에는 국정기획위원회가 마련한 '123대 국정과제' 가운데 '노동 존중 실현과 노동기본권 보장' 과제의 첫 번째 항목으로 확정한 바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국회에서의 입법화에 앞장섰음은 물론이다.

 

1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근로자의 날' 명칭을 '노동절'로 변경하는 내용의 근로자의날 제정에 관한 법률 전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되고 있다. 2025.9.19. 연합뉴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19일 전체회의를 열어 근로자의 날 명칭을 노동절로 변경하는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 전부개정안을 의결했다. 앞서 이 개정안은 지난 16일 환노위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여야 합의로 처리됐다. 모처럼 국민의힘도 동의한 사안이기 때문에 앞으로 법제사법위원회 심사를 무난히 거쳐 이르면 오는 25일 본회의에서 통과될 전망이다. 그러면 노동절은 내년 5월 1일부터 무려 63년 만에 공적 차원에서 제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개정안은 제안 이유에서 "근로자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부터 사용되어 온 용어로, 산업화 시대의 통제적이고 수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노동의 자주성과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며 "현대사회에서 노동은 사업주의 통제에 의해 일한다는 의미를 넘어 인간의 기본권을 실현하는 핵심적 사회 가치로 인식되고 있는 만큼,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우리의 제도와 용어에도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노동절은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 등지에서 노동자들이 기업주 및 정부 당국의 모진 탄압에도 불구하고 '하루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와 총파업을 벌인 데서 유래했다. '메이데이(May Day)'의 불길은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로 번져나갔고 한국도 1920년대부터 노동절을 기념했다. 1923년 5월 1일 조선노동연맹회 주최로 2000여 명의 노동자가 서울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 모여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실업 방지'를 요구한 게 시초로 여겨진다. 메이데이 행사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지속됐고 1946년 5월 1일 해방 후 처음으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 주관 아래 서울운동장에서 성대하게 개최된 노동절 행사에는 약 20만 명의 노동자가 운집했다.

 

5.16 군사쿠데타 주요 인물. 왼쪽부터 박정희 소장, 박종규 소령, 이낙선 소령, 차지철 대위.

1990년 4월 6일 전노협 소속 노조원들이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당국의 노조 업무 조사를 거부한 단위노조 간부들의 구속사태에 항의해 단식 농성에 들어가기 앞서 집회를 열고 있다.1990.4.6.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1957년 5월 22일 이승만 대통령은 "5월 1일은 공산도당들이 세계 적화를 위해 선전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날이니 이날과 구별하여 반공하는 우리 대한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이 제정되도록 하라"고 노동절에 대한 시정명령을 내렸다. 이에 우익·어용 성향의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약칭 대한노총)은 1958년 11차 전국 대의원 대회에서 대한노총 결성일인 3월 10일로 노동절 날짜를 변경했다. 이어 1963년 4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공포함으로써 명칭 자체를 근로자의 날로 바꿔버렸다. 역시 "공산 진영에서 이날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이유였다.

독재 정권의 이 같은 일방적인 선포를 노동계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히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당시 여러 노동단체의 연대조직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는 '3월 10일 근로자의 날'을 더 이상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세계 노동절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던 1989년에는 전국에서 동맹 파업 및 거리 시위가 벌어졌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이 여론을 일부 수용해 1994년 3월 9일 해당 법률 개정으로 기념일 날짜를 다시 5월 1일로 환원했지만 명칭은 종전대로 유지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이재명 대통령이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양대노총 위원장과의 오찬 간담회에 참석해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왼쪽),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과 기념촬영을 하며 손을 잡고 있다. 2025.9.4. 연합뉴스

'이재명 정부 123대 국정과제' 중 근로자의 날 명칭을 노동절로 변경한다는 부분. 국정기획위원회 자료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이재명 대통령은 20대 대선 후보이던 2021년 11월 22일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바꾸는 문제를 최대한 신속히 처리하겠다"고 공언했다. 올해 2월 21일 민주당 대표 자격으로 민주노총을 방문해 양경수 위원장 등을 만났을 때는 "과거 '노동'이라고 하면 빨갱이가 생각나던 시절이 있었다"며 "제가 하고 싶은데 아직 못한 일 중의 하나가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21대 대선 후보이던 5월 1일 노동절 때는 페이스북에 노동 분야 공약을 올리면서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개칭해 노동 존중 가치를 바로 세우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지난 16일 이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확정한 '123대 국정과제'에도 그 내용이 그대로 포함됐다.

정부는 내년부터 노동절을 달력에 '빨간 날'로 표시되는 법정 공휴일로 추진한다는 방침도 분명히 하고 있다. '노동절 선물 세트'를 국민에게 안겨드리겠다는 것이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 15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노동절 변경 의미는 잊어버렸던 땀의 가치, 노동의 가치를 기리는 날로 복원하자는 것이다. 현재 근로자의 날은 근로자성이 없는 사람은 아무 관련 없는 날"이라며 "일하는 모든 시민이 노동절 하루 동안 노동의 가치를 생각한다는 의미로 법정 공휴일도 같이 추진한다. 행정안전부와 협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근로자의 날은 유급 휴일이긴 하지만 법정 공휴일은 아니어서 적용 범위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한정돼 있다. 이 때문에 공무원과 교사, 특수고용직 종사자들은 휴일 적용 대상에서 아예 제외된다. 일반 직장인들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하고 직장에 따라 평일처럼 출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내년부터 '빨간 날'인 법정 공휴일이 되면 근로자 여부와 상관없이 전 국민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노동부는 이를 위해 이미 국회에 발의된 '공휴일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이 원활히 추진될 수 있도록 인사혁신처 등과 협의 중이다. 여야 의원들이 복수로 발의한 이 개정안에는 노동절(5월 1일)과 어버이날(5월 8일)을 새롭게 공휴일로 지정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현재 이 법에 따른 공휴일은 3·1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1월 1일, 설날·추석 당일과 전날·다음날, 부처님오신날, 어린이날, 현충일, 성탄절 등이다.

 

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세계 노동절을 앞두고 열린 ‘우리 삶을 바꾸는 1,000인 선언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민중의례를 하고 있다. 2025.4.29.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박해철 대변인은 19일 국회 소통관 브리핑에서 "노동절은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닌 노동자의 권리 보장을 위한 역사를 온전히 기념하는 것과 동시에, 그간 수동적이고 복종적 의미를 가졌던 '근로'의 개념이 아닌 일하는 사람의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위상을 표현한 '노동'으로 가치를 전환한다는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며 "민주당은 공무원과 교원을 포함해 일하는 모든 사람이 노동절을 기념할 수 있도록 법정 공휴일 지정까지 힘있게 추진해 나가겠다"고 전했다.​

진보당 정혜경 원내대변인도 서면 브리핑을 통해 "노동자는 사용자와 평등한 위치에서 능동적으로 일하는 '생산의 주역'이며 민주공화국의 당당한 주권자다. 노동절 명칭 전환 추진은 '빛의 광장'을 수놓았던 노동자들의 승리"라면서 "진보당은 진심으로 환영하며 본회의를 통과할 수 있도록 적극 힘을 모을 것이다. 나아가 향후 헌법에도 '근로' '근로자'를 '노동' '노동자'로 명시하도록 개정하고 노동 존중 세상으로 성큼 나아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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