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봉투 '노란봉투법'
홍순구 시민기자의 '동그라미 생각'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는 말은 미사여구일 뿐, 현실에서는 공허한 수사일 뿐이다. 직업에 귀천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는 노동시간 대비 보상의 격차 때문이다. 동일한 시간을 투자해도 의사, 변호사, 금융업, 공무원 등 일부 직업군은 높은 부가가치를 보장받는 반면, 다수의 직업군은 생계조차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소위 '안정적이고 고소득인 직업'을 좇게 되고, 이는 사회의 구조적 불균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 격차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차이가 신분의 격차로 느껴질 만큼 벌어진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는 사회적 양극화와 갈등을 심화시켜 현실적으로 저출생 문제와 교육 경쟁, 세대 갈등 등 우리 사회의 난제들을 파생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직업의 귀천 문제는 단순한 인식 차원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의 결과물인 셈이다.
노동 관련 법과 제도가 마련될 때마다 그 과정은 예외 없이 노사 간 갈등을 동반했다. '최저임금제'가 도입될 때에는 인건비 부담으로 인한 고용 축소를 우려했고, '주 52시간제'는 생산성 저하와 인력난 심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반발이 있었다. '중대재해 처벌법'은 산업재해 예방보다 기업 활동 위축을 부를 수 있다고 했다. '노란 봉투 법' 역시 경영권 침해와 불법 파업 조장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미리 공포를 부추겼다.
그러나 법은 어디까지나 사회의 필요를 비추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일 뿐이다. 법을 통해 완벽한 해답을 만들 수는 없지만, 이런 변화를 제도화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럼에도 기업과 일부 보수언론은 법의 제약을 '악법'이라 치부하며 기득권을 지키는 데 급급하다. 이거야말로 오히려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태도다.
이미 기업 내부에 쌓인 사내유보금이 1000조 원을 훌쩍 넘어선 지 오래다. 기업이 미래 불확실성에 대비해 자금을 비축하는 행위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지만, 이를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명분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기업이 진정으로 사회와 공존하며 상생하려 한다면, 제도적 변화에 협력하고 시민과 더불어 함께 살아갈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직업의 귀천이 조금이라도 완화되는 사회, 노동의 시간을 존중해 주는 사회가 되려면 제도와 기업, 그리고 시민의 책임 의식이 함께 해야 한다. 그 때야 비로소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진부한 말이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진실로 다가올 수 있다. 이번에 제정된 '노란봉투법'이 누군가의 삶을 지켜내는 따뜻한 생명의 봉투로 자리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