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노인 빈곤…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는 돼야
[탄핵 이후 사회개혁 구상] 국민연금이 가야 할 길
2007년 보험료 인상 포기했던 한덕수·한나라당
축소 일변도 개혁과 기금 고갈 우려로 불신 자초
보험료율 13% 인상, 소득대체율 42% 재추진
시민대표 다수안인 소득대체율 50% 채택해야
불신 해소와 노인 빈곤 완화 위한 소득보장 강화
기초연금과 관계 재설정 등 구조개혁 로드맵부터
“연금기금 고갈” “세금폭탄” “세대 간 도적질” “미래세대 재앙” “이러다 못 받는 것 아닌가”
정부와 언론이 공적 연금, 특히 국민연금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거나 연금 급여의 수준(소득대체율) 인상을 억제하려고 할 때마다 꺼내 드는 프레임들이다. 이들에게 국민연금 개혁은 항상 혜택(연금급여)은 낮추고, 부담(연금 보험료율)은 높이는 방향이다. 국민 노후생활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야 마땅할 공적 연금제도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기도 전에 이토록 축소돼야 할 애물단지이자 불신의 대상이 된 것은 비상식적이다. 우리보다 앞서 연금제도를 시행해 온 선진국들에 비춰보면 분명히 그렇다. 그런데도 국민연금이 세대 간 부담의 전가라거나 심지어 도적질이라는 일방적 이데올로기가 상식으로 행세하고 있다.
공적연금은 세대 간 ‘착취’가 아닌 세대 간 ‘부양’의 약속
공적연금제도의 도입 목적은 국가 주도로 세대 간, 계층 간 연대와 협력을 확보하여 국민의 노후 삶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다. 금융시장의 연금 상품은 부담자와 수혜자가 일치하지만, 국민연금은 가입하는 순간부터 내가 아니라 현재 노인이 된 은퇴자들을 부양하고, 나는 은퇴한 후에 현직에 종사하는 가입자들로부터 부양을 받는 시스템이다. 세대 간 부담의 전가가 아니라 세대 간 부조라고 보는 게 제도의 취지와 실상에 부합한다.
우리나라처럼 연금 수혜 혜택을 본격적으로 누리기도 전에 소득대체율을 대폭(70%→40%) 삭감한 나라는 세계 연금 역사상 없다. 지난 2007년 국민연금제도가 마지막으로 ‘개혁’됐을 당시를 되짚어 보자.
당시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9%에서 12.9%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60%에서 50%로 낮추는 '더 내고 덜 받는' 방식의 국민연금법 개정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해 4월 이 법안은 국회에서 부결됐다. 결국 한덕수 당시 국무총리와 김형오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만나 보험료율은 9%를 유지하되, 소득대체율을 기존의 60%에서 점진적으로 40%까지 낮추는 방안으로 타협한 것이 지금까지 17년 넘게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처럼 덜 내고, 내는 돈에 비해 더 받는 구조에서 보험료율은 어차피 올릴 수밖에 없다. 근년의 심각한 저출생과 급속한 고령화 추세를 감안하면 그것도 조속히 올려야 한다.
그렇지만 소득대체율은 그간 국내의 가파른 물가상승률, 국내의 심각한 노인 빈곤 실태, 국제적 평균을 감안할 때 적어도 50% 안팎을 유지하는 게 훨씬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에 대한 국민의 불신에는 그것이 ‘용돈 연금’에 불과해 노후 보장책이 될 수 없다는 불만도 깔려 있다. 그나마 합리적인 안을 한덕수 전 총리와 야당 대표가 소득대체율만 낮추는 쪽으로 개악한 것이다. 소득대체율을 낮추기 위해 보험료율을 못 높인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축소 일변도의 연금개혁, 심각한 노인 빈곤 외면
17년의 세월이 흘러 지난해 5월 말 21대 국회의 막바지에 윤석열 정부하에서 추진되던 국민연금 개혁이 무산됐다. 그에 앞서 국회 연금개혁특위 공론화위원회의 시민대표단 500명 중 다수(56%)가 선택한 소득보장 강화(소득대체율 50%로 상향 조정)와 재정 안정화(보험료율 13%까지 인상) 병행안은 공교롭게도 17년 전 노무현 정부가 채택했던 정부·여당안(50%, 12.9%)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와 여당은 시민대표단의 숙의 결과를 무시하고, 다수안에서 소득대체율을 44%로 낮춰서 제시했다. 공론위에서는 시민대표단이 3개월에 걸쳐 전문가와 이해관계자들의 설명을 듣고 숙의·토론을 거쳐 지지 대상을 재정안정론으로부터 소득보장론으로 점차 옮겨 갔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황당한 것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이를 덜컥 받아들이자, 대통령실이 말을 바꿔 여야 합의를 무산시켰다는 점이다. 용산 측은 공적연금 체계 전반을 손보는 '구조개혁' 작업을 병행해야 한다며 ‘뜨거운 감자’를 22대 국회로 넘겨 버렸다. ‘구조개혁’은 핑계일 뿐이었다. 보건복지부는 4개월 후인 9월에 구조개혁의 그림자도 담지 않은 모수(母數)개혁(보험료와 소득대체율의 수치를 조정하는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보험료율 13%로 인상, 소득대체율은 지난해 5월 이재명 대표가 수용한 정부·여당안인 44%에서 42%로 인하, 자동 조정장치 도입, 세대별 차등 보험료 인상 등이다. 현행 제도(보험료율 9%, 소득대체율 40%)에서 2055년으로 추계돼 있는 국민연금기금 고갈 시점은 이 개혁안이 시행되면 16년 늦춰져서 2072년으로 연장된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정부의 연금기금 수지 추계의 변수 가운데 인구는 합계출산율이 2046년 이후 1.21명으로 안정화된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산정됐다.
연금기금의 목적이 재정 안정인가, 수단과 목적의 전도
정부는 이렇듯이 소득대체율에 대해서는 축소를 거듭하는 방안(50%→44%→42%)을 제시하고 있다. 재정안정이 과연 적정 노후 소득보장보다 그토록 더 중요한가. 우리나라에서 유독 심각한 노인 빈곤 문제를 떠올려 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불확실할 수밖에 없는 장기인구추계에 따른 후세대 부담 증가보다는 당장 하루에도 11명씩 자살하는 노인들의 문제가 더 시급하지 않은가.
인구학자들은 보통 30년 이상 후의 인구에 대한 추계는 점성술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1990년대까지도 우리나라 정부는 지금 같은 초저출산을 예측하지 못한 채 둘만 낳자는 산아제한 정책기조를 유지했음을 상기해 보라. 요컨대 앞으로 50년 이전이나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다. 기후 위기로 인해 잦아지고 있는 기상재앙이나 전쟁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 후에는 한국전쟁 이후처럼 출산율이 급격히 높아질 수도 있다. 통계청의 2046년 이후 합계출산율 전망 중위값인 1.21명이 낙관적일지, 비관적일지 아무도 말할 수 없다.
이제는 인용하는 것도 좀 민망하지만,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독보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서 빈곤율이란 상대적 빈곤율을 말하는데 구성원을 소득 순서대로 줄을 세워 한가운데 사람의 소득, 즉 중위소득의 50% 이하인 사람의 비율로 나타낸다. OECD의 ‘한눈에 보는 연금 2023'(Pension at a glance 2023)’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40.4%로 조사 대상국 중 가장 높았다. 이는 OECD 회원국 평균 14.2%보다 3배 가까이 높은 수준이다.
더 놀라운 것은 노인 빈곤율과 전체인구 빈곤율 간의 격차다. 2019년 한국의 경우 두 수치가 각각 43.4%와 16.7%로 그 격차가 26.7%포인트에 달해 OECD 평균 1.8%포인트와 근본적 차이를 드러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국민연금제도를 뒤늦게 시행한 데다 아직 연금 사각지대도 광범위하다는 한계에 낮은 소득대체율까지 설상가상(雪上加霜)격으로 더해져 수입은 없고, 평균수명만 늘어난 노인들을 빈곤과 자살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이재섭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는 ‘의도적 조난, 윤석열 호의 연금개혁 중단’이라는 제목의 기고문(프레시안, 2024년 6월 10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연금개혁, 특히 국민연금 개혁은 국민들 편에서 보면 지나치기를 넘어 가혹하기까지 했다. 공무원 등 특수직역 공직자들을 위한 공적 연금제도와는 다르게 대다수 국민이 가입한 국민연금에 대해서는 차별적이고, 선제적이며, 세계사에 유례없는 급격한 삭감개혁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가혹한 노인 빈곤과 노인 자살의 현실이다. (중략) 그동안 국민연금 삭감개혁에 앞장선 관료와 학자들 대부분 공무원연금이나 사립학교교직원연금에 가입되어 있다. 그들은 월 400만 원 가까운 연금이 보장된 분들이다. 부부 합산 월 700~800만 원도 받을 수 있다. 평균 연금액 59만 원인 국민연금 수급자들이 분노하는 이유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입된 공적연금에 대해서는 합리화하거나 묵인해 왔다.”
물론 재정안정도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연금기금도 결국은 기금이 바닥나는 시점에 직면한다. 그래도 나라가 부도나거나 전쟁 등 극한적 위기가 아니라면 연금을 받을 수 없게 되는 일은 없다. 기금적립금이 바닥나기 전에 완전 부과식으로 전환하거나 1년 치 지급분 적립식으로 가면 된다. ‘이대로 가다간 1990년대생부턴 국민연금을 한 푼도 못 받아'라는 보도자료(한국경제연구원, 2022년 1월 13일)와 이를 그대로 보도한 언론들은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공포 마케팅에 종사한 것과 다름없다.
연금개혁 재가동? 구조개혁 위한 향후 로드맵부터 제시해야
재정안정론과 소득보장론의 대립, 적립식과 부과방식의 장단점 등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국민연금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들을 보면 지금까지 논의한 소득대체율과 보험료율 같은 수치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우리는 공적연금 문제에서 특히 더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
가장 먼저 국가재정과 공적연금의 역할 분담 재정립이라는 과제가 있다. 공적연금이라는 게 원래 정부가 재정에서 다 감당하기 어려운 사회복지 수요를 당사자들끼리 세대 간 부양의 방식으로 해결하도록 제도적 장을 깔아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신 정부는 취약계층 지원을 중심으로 사회복지예산을 편성하고 있다. 이제는 국가재정이 기본소득 도입 여부와 공적연금에 대한 직간접적 지원 등을 포함해서 어차피 사회복지의 더 많은 분야에서 더 적극적으로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게 세계적, 시대적 흐름이다. 왼쪽의 국가재정과 오른쪽의 공적연금이라는 큰 틀을 균형적으로 재구축하고, 그 안에서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의 관계도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그 밖에 공무원, 교원, 군인 등 특수직역 연금제도를 국민연금과 통합하는 과제도 매우 시급하다.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의 경우 이미 매년 적자를 세금으로 메워주고 있다. 재정 문제가 국민연금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2024년의 경우 두 연금기금의 적자 규모가 9조 4209억 원으로 추산됐다. 영세 자영업자, 플랫폼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등 국민연금 사각지대의 해소방안,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간의 관계 재조합도 중요하다. 이 모두가 연금개혁의 구조개혁 과제에 속한다.
이기일 보건복지부 제1차관은 지난 1월 10일 보건복지부의 2025년 업무보고 관련 브리핑에서 “가장 좋은 개혁은 가장 빠른 개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연금 보험료율의 인상이 그만큼 시급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모수개혁 추진에 앞서 한덕수 전 총리와 김형오 전 한나라당 대표는 2007년에 왜 지금과 똑같은 연금보험료 인상안을 포기함으로써 세월을 낭비하고, 국민연금의 향후 적자 요인을 이토록 키웠는지 국민 앞에 밝히고,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정부와 국회가 올해 새 정부 출범 전이라도 모수개혁안을 담은 법을 통과시키려고 한다면 우선 연금 구조개혁을 위한 로드맵을 확정하고, 다음 정부 임기 중에 이를 완수하겠다는 대국민 약속부터 해야 한다. 또한 모수개혁안의 소득대체율을 공론화위원회 시민대표단이 선택한 50%로 변경해야 마땅하다. 아니라면 정부는 미래세대의 불확실한 부담의 완화가 지금의 노인 빈곤 해소보다 더 중요한 이유를 시민대표단과 국민 앞에서 공개적으로 설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