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에 관한 '잘못된 상식' 세 가지를 타파한다

[탄핵 이후 사회개혁 구상] 기본소득, 상식의 파괴

게을러진다? 기본소득은 노동 의욕을 꺾지 않아

세계 각국 실험서 오히려 고용 늘고 불평등 감소

일부에게 주나 모두에게 주나 마찬가지 재분배

'세금 폭탄론'은 '재정 환상'이 빚은 착각에 불과

국고 축날 일 없고 중산층도 순수혜자로 만들어

2025-01-09     임항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운영위원,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중소상인, 자영업자, 시민단체들이 22일 용산 대통령실 인근에서 가계부담 긴급대책 촉구 회견 후 난방비 등에 힘든 서민을 표현하고 있다. 2023.2.22. 연합뉴스

상식이 존중받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우리는 흔히 말한다. 그러나 그 상식이 '지배하는 상식', '유일한 상식'이 되는 순간 몰상식이 시작된다. 사회학자 노명우(아주대 교수)는 "사람들이 각자 상식적 판단을 하지만 각자의 상식적인 판단이 모였을 때 무시무시한 몰상식이 생겨난다"고 말했다. 외환위기가 초래한 엄혹한 시기에 유행했던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카피에서 비롯된 '부자 되기'라는 상식이 "유일한 상식이 되는 순간 몰상식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겠다고 부동산 투기에 나서고, 이과생들이 모두 의사만 되려고 하는 상황은 상식에서 분명 벗어나 있다고 노교수는 말했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사계절, 2014, 25~26쪽)

상식과 양식의 대결 : 상식의 허구와 양식의 공허함

모든 상식이 올바르지는 않다. 따라서 상식과 상식이 서로 견제할 때 몰상식의 발호를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상식은 힘이 세다. 그 힘이 정치인에 의해 악용된다면? (이때 상식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거의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노명우 교수는 이 대목에서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라는 이탈리아 혁명가가 '옥중수고'에서 성찰한 상식의 역설을 소개한다.

"자신의 생각을 시대의 상식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을 장악할 수 있다. 만약 자신이 만든 생각을 세상의 보편적 상식으로 만들 수 있는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면, 시중에 떠도는 상식을 이용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조정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둔한 사람은 힘으로 지배하지만, 교묘한 사람은 상식을 이용해 사람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 (같은 책, 27쪽)

상식이 바람직함을 갖추면 양식(良識)이 된다. 하지만 양식은 상식 앞에서 무력하다고 노명우 교수는 말한다. "상식을 자극하는 '경제를 살리겠다'는 슬로건을 내세운 보수정당은 '서민'의 표를 얻고, 경제정의를 외치는 진보정당은 빈민층의 전폭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같은 책, 29쪽) 정치인들이 더 정확한 표현인 '빈민'이나 '저소득층'보다 '서민'과 그들의 '살림살이'나 '민생'을 더 많이 들먹이는 것도 그런 이유다.

기본소득의 상식과 양식

기본소득의 사전적 정의는 '모든 구성원에게 개별적, 정기적으로 재산 유무와 노동 여부에 상관없이 무조건 지급하는 현금 소득'이다. 여기에서 세 가지 핵심은 소득과 재산조사(자격심사)가 필요 없다는 보편성, 노동 여부나 일할 의사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무조건성, 가구가 아닌 개인에게 주어지는 개별성 등이다. 이런 특징들 덕분에 기본소득은 지금 시대의 새로운 복지 모델로 부각되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취업 준비, 실업, 질병으로 인한 장기요양 등 인생의 빈칸, 또는 과도기에 처한 사람에게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안전판을 제공한다. 특히 기본소득의 무조건성은 자본주의 사회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어야 하는 약자들에게 계약 당사자로서의 교섭력을 제공한다. 최소한의 생계가 보장되므로 형편없는 일자리를 거부할 자유가 생기는 한편, 소득은 적지만 적성에 맞아 하고픈 일을 선택할 용기도 준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기본소득의 이런 장점보다는 부정적 측면이 훨씬 더 자주 부각되는 게 현실이다. 이 글에서는 우선 기본소득에 대한 부정적 상식 세 가지에 대해서 반론을 제시해 볼 것이다.

 

가이 스탠딩 영국 SOAS 교수가 23일 서울 이화여대에서 열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3.8.23.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제공

기본소득은 노동 의욕을 꺾지 않는다

첫째,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사람들이 노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즉 기본소득이 게으름을 부추길 것이라는 상식이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진부한 격언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기본소득이 시행되고 있는 곳을 보면 고용이 늘어나고 불평등이 감소하는 등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현재 국가 단위에서 기본소득을 시행하는 나라는 없지만,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기본소득 제도를 실시하거나 일부 집단에서 실험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노동시간은 줄어도 고용이 줄지 않거나 오히려 늘어난 경우가 많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가이 스탠딩 영국 런던 아시아·아프리카 대학(SOAS) 연구교수는 "세계 각국에서 기본소득 실험을 해보니 고용이 오히려 늘었다"며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사람들이 게을러져서 일을 안 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2023년 8월 23일 시민언론 민들레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인도 마디아 프레디시주에서 6000명을 대상으로 실험했고, 나미비아, 핀란드, 캐나다 등지에서도 실험이 진행됐다"면서 "많은 실험 결과 영양 상태와 건강이 개선되고 의료 서비스 접근권이 향상됐으며 여성의 지위도 상승했다"고 전했다.

무조건적 현금 지급이 게으름을 부추길 것이라는 강제노동 시대의 인간관은 시대착오적이다. 먼 나라의 실험 결과보다는 기득권층의 시각에서 나온 상식에서 벗어날 필요를 부각시키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지금 노동능력을 지닌 평균적인 한국인이 예컨대 월 50만 원의 기본소득을 받는다고 해도 하던 일을 포기하거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지 않을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서만 노동을 하는 게 아니라 재미와 보람을 위해서도 노동을 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 본관 대강당에서 열린 '서울시-서울시교육청-자치구 유치원 친환경 무상급식 업무협약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2021.12.8. 연합뉴스

일부에게 주나 모두에게 주나 마찬가지다

"재벌 자녀에게도 기본소득을 주다니. 가난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 기초생활 보장제도, 고용보험의 구직수당, 기초연금 등이 모두 선별적 소득보장에 속한다. 선별적 복지 제도는 그만큼 친숙하고 당연하게 여겨진다.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주는 보편적 복지 제도보다 외견상 더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상식으로 통용된다.

그러나 이는 내는 세금을 불변으로 여기고, 받는 보조금만 생각하니까 생기는 착각이다. 기본소득 지급에 필요한 세금을 거둘 때 소득계층별 세율을 비례적, 혹은 누진적으로 설계할 것이다. 이때 세율 배분에 따라 기본소득 제도는 어떠한 선별소득보장 제도에 대해서도 그와 똑같은 재분배 효과를 낼 수 있다. 즉 과세 유예자와 납세자를 포함한 구성원 모두가 보편적 소득보장 제도(기본소득) 하에서 선별적 제도와 똑같은 순(純) 수혜를 누리거나 순(純) 부담을 지게 된다는 말이다. 순수혜는 내는 세금보다 더 많은 보조금을 받는 경우를 말한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한편으로는 선별소득보장과 동일한 금액을 모두에게 기본소득으로 지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선별소득보장 대상자에게는 세금을 걷지 않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선별소득보장 하에서 내야 할 세금에다가 (그들도 받을) 기본소득을 더한 금액만큼을 세금으로 걷으면 된다." (강남훈, 기본소득의 경제학, 박종철출판사, 2020, 14~16쪽)

우리나라에서 선별적 복지가 주축이라고는 하지만, 보편적 복지도 부지불식간에 이미 시행되고 있다. 0~5세 보육료를 하위 70%에게만 지급하던 선별적 지원이 논란 끝에 2013년부터 보편 무상으로 변경됐다. 초중고교 보편 무상급식도 꾸준히 늘어서 이제는 대세가 됐다.

 

2020년 6월 25일 한국지방세연구원이 발간한 '기본소득제도 쟁점과 시사점' 연구보고서를 보면 전국민에게 1인당 월 30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할 경우 2030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비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세금 폭탄론은 '재정 환상'일뿐, 중산층도 순수혜자로

"기본소득 시행에 필요한 막대한 세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마련한다고 하면 나라 곳간이 텅텅 빌 것이기 때문에 국민에게 세금폭탄으로 돌아올 것이다." 정치권에서 증세나 복지 확대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주류언론이 꺼내 드는 전가의 보도가 '세금 폭탄론'이다. 시민들의 머릿속에 복지 확대와 짝을 이뤄 연상되는 '세금 폭탄'이라는 '상식'의 위력은 대단하다.

하지만 정부는 원칙적으로 돈을 쓸 곳을 먼저 정하고 그에 필요한 만큼 세금을 걷는다. 이 같은 균형재정의 원칙을 한국 정부만큼 근사하게 잘 지키는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서도 드물다. 그러니 세금을 많이 내면 그만큼 더 많은 보조금과 정부 서비스를 받게 된다. 세금과 보조금을 종합적으로 보지 못하고 그 중 어느 하나만 고려해서 판단을 내리는 현상을 '재정 환상'이라고 한다. '텅 빈 곳간'과 '세금 폭탄론'은 재정 환상이 빚어내는 착각에 불과하다.

기본소득은 물론 막대한 예산이 드는 정책이다. 모든 구성원을 대상으로 하는 데다 가구가 아닌 개인을 대상으로 지급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을 위해 거둔 세금은 많든 적든 딱 그만큼 구성원 모두에게 균등하게 보조금으로 도로 지급된다. 재정 중립적 정책이니 국고가 축날 일은 없다. 다만 기본소득의 지급 규모가 클수록 순(純)부담층 (상위 5~10% 안팎의 고소득층)의 세금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 제도가 정치적으로 수용 가능하기 위해서도 국민의 절대 다수인 소득하위층과 중산층이 순수혜자가 돼야 한다. 기본소득을 다수가 지지해야 이를 공약으로 내건 정당이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중산층 이하의 소득을 상대적으로 더 늘려야 할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신자유주의 이래 세계적으로, 한국에서는 더욱, 중산층과 고소득층의 소득 및 자산 격차가 커졌다. 우리나라 임금노동자 중에 공공부문과 대기업의 정규직 비중은 계속 줄어들어 전체의 10% 안팎에 불과한 실정이다. 강남훈 사단법인 기본사회 이사장은 이런 상황에서 "중산층을 순수혜자로 만드는 기본소득은 불평등을 줄이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의 책,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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