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 ‘훈맹정음’ 박두성

“남의 불행 건지려고 자기 행복 버린” 맹인의 아버지

10월9일은 578돌 한글날 11월4일은 98회 점자의 날

집현전 방식으로 만든 훈맹정음, 점자책도 200여권

“점자책은 쌓아두지 말고 세워서 꽂으라” 마지막 유언

2024-10-26     이희용 줌렌즈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지난 10월 9일은 578돌 한글날이었다. 세종대왕이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한 날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국내 24만 8360명(2023년 기준)의 시각장애인은 송암(松庵) 박두성(朴斗星)이 한글점자 훈맹정음(訓盲正音)을 발표한 이후에야 손끝으로 더듬어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오는 11월 4일은 98회 점자의 날이다.

1825년 6점 방식 점자 개발한 프랑스인 브라유

현재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형식의 점자는 1825년 프랑스의 루이 브라유(Louis Braille)가 처음으로 고안했다. 그 전에는 점으로 표시하지 않고 알파벳을 그대로 볼록 튀어나오게 만들어 읽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책으로 만들면 지나치게 두꺼워졌다. 더욱이 치명적인 단점은 읽을 수만 있을 뿐 쓸 수는 없다는 한계였다.

브라유는 1809년 파리 근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구(馬具)를 제작하는 장인이었다. 3살 때 아버지 작업장에서 송곳을 갖고 놀다가 왼쪽 눈이 찔리는 사고를 당해 실명했다. 오른쪽 눈도 감염으로 인해 멀었다. 파리의 왕립시각장애인학교를 다니던 중 1821년 통신부대 장교 출신인 샤를 바르비에가 찾아와 자신이 군사 암호용으로 개발한 야간 문자를 소개했다. 캄캄한 밤에 불빛을 비추지 않고도 확인할 수 있도록 돋을새김된 12개의 점을 사용해 명령이나 신호를 소리나는 대로 표시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브라유는 아버지의 송곳을 이용해 6개의 점으로 구성된 점자 체계를 고안했다. 인간이 한 번에 촉독(觸讀)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점의 개수가 6개였기 때문이다. 또 소리에 대응하는 방식 대신 문자에 대응하는 방식을 택했다. 유럽을 비롯해 로마자 알파벳을 쓰는 전 세계 대부분 나라는 이 점자를 쓰고 있다. 그는 ‘세계 시각장애인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이름 자체가 점자를 뜻하는 단어가 됐다.

 

인천 강화군 교동도의 박두성 생가(인천 강화군청)

생활고가 맺어준 시각장애인과 박두성의 만남

박두성은 1888년 4월 26일 강화도 부속섬 교동도에서 평범한 농민이면서 독실한 개신교인 박기만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립운동가 이동휘가 강화도에 세운 보창학교를 다닌 뒤 일본 오사카에서 상점 점원으로 생활하다가 서울의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1905년 처음 교사로 부임한 곳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효제초등학교인 어의동보통학교였다.

제생원 맹아부 교사 시절의 송암 박두성 선생(국립한글박물관)

1913년 조선총독부는 제생원 맹아부를 설립하면서 박두성을 전근 발령했다. 특수교육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은 없었지만 독실한 신앙인이어서 적임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동생과 자녀가 많아 생활이 곤궁하던 박두성은 관사를 내준다는 조건을 보고 발령 제의를 받아들였다.

당시 장애인에 대한 인식 수준은 처참할 정도로 낮았다. 집안에 장애아가 태어나면 먹고살기도 힘들어 몰래 갖다 버리거나,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집안에 숨겨 기르는 게 보통이었다. 시각장애인이 가게에 들어오면 재수없다고 소금을 뿌리거나 물을 끼얹는 일도 흔했다.

“능한 목수는 굽은 나무라도 버리지 않는다”

교육 환경도 열악했다. 일본어 점자를 가르치긴 했으나 교과서도 없었다. 박두성은 일본에 점자 인쇄기(제판기)를 주문해 들여온 뒤 교과서를 찍어냈다. 박두성은 장애인일수록 더 교육이 필요하며, 시각장애인들의 잠재능력이 무한하다는 확신을 지녔다. 그는 장애인 교육을 등한시하는 일본인 동료 교사나 주변 사람들에게 “능한 목수는 아무리 굽은 나무라도 버리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절실한 것은 한글점자였다. 모든 수업을 일본어 점자로 하다 보니 학습 효과도 떨어졌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모국어를 가르치지 않으면 이중 불구가 되어 생활하기 어렵다고 생각해 1920년부터 한글점자 개발에 나섰다.

우리나라에서는 1894년 평양여자맹학교를 세운 미국의 의료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 여사가 1898년 미국의 뉴욕점자를 응용해 최초의 한글점자인 평양점자를 만들었다. 4점 방식이라 낱말이 길어져 읽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자음의 초성과 종성이 구분되지 않아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세종대왕 집현전처럼 8명이 모인 조선어점자연구위윈회

박두성은 세종의 한글 창제 과정을 깊이 연구하며 세종의 방식을 따라했다. 세종이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 8명으로 언문청을 만든 것을 본떠 1923년 4월 제자 8명을 모아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발족했다. 음운 연구를 위해 성삼문을 명나라에 13번이나 보냈듯이 일본으로 유학한 제생원 졸업생에게 브라유 점자를 연구하게 했다.

그러다 보니 세종이 책을 너무 많이 봐서 안질에 걸린 것처럼 박두성도 온종일 깨알 같은 점자를 들여다보다가 눈병을 앓기도 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1926년 8월 12일 한글점자 초안을 완성한 뒤 훈맹정음이라고 명명했다.

훈맹정음의 실용도를 시험하기 위해 같은 날 조선어점자연구회도 조직했다. 첫 모임에서 육화사(六花社)라는 이름이 좋겠다고 의견이 모아져 이튿날 개칭했다. ‘육화’는 눈[雪]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눈의 결정이 육각형인 것에서 유래했다. 점자도 6개의 점으로 구성됐고, 눈[眼]과 발음도 똑같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훈맹정음 표기법(국립한글박물관)

박두성이 만든 한글점자 설명서. 훈민정음 해례본과 같이 훈맹정음을 설명해주는 책으로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송암박두성기념관)

1926년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 한글날 발표된 훈맹정음

1926년은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이었다. 조선어연구회(한글학회 전신)가 ‘가갸날’이란 이름으로 한글날 기념식을 처음으로 치른 해이기도 하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에는 훈민정음 반포일을 알지 못해 세종실록에 “9월에”라고 적힌 구절을 토대로 그해 음력 9월의 마지막 날(29일)인 양력 11월 4일, 국어 관계자와 언론사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훈맹정음을 발표했다.

점 6개의 배열과 조합 63가지(점이 하나도 없는 경우 제외)로 자음과 모음을 나타내는 훈맹정음의 원리는 브라유 점자와 마찬가지다. 배우기 쉽고 헷갈리지 않도록 대칭성을 활용해 체계적으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주로 두 점으로 첫소리와 받침 글자를 만들고, 모음은 세 점으로 나타내도록 했다. 소리가 나지 않는 첫소리 ‘ㅇ’은 빼고, 많이 쓰이는 조사 ‘가, 을, 은, 의, 에, 와’ 등은 따로 떼어 약자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를 가르치려면 총독부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박두성은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편지를 썼다. “맹인들이 쓸 수 있는 점자가 없어서 그들 마음의 눈을 밝히지 못하면 실명이라는 첫째 장애에다 둘째, 셋째 또 다른 장애가 깊어져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낳게 된다”는 것이 골자였다.

북한도 훈맹정음 쓰고 있으나 일부 표기 방식 달라

훈맹정음은 1935년 5월 21일 지역 면협의원 선거에서 점자투표가 도입되며 공인받았다. 해방 후 제헌국회가 제정한 교육법에도 근거 조항이 마련됐다. 1997년에는 한국점자 규정이 고시된 데 이어 2017년 점자법이 제정돼 점자가 일반 활자와 동일한 효력을 지니도록 했다. 그에 따라 1차(2019~2023년)와 2차(2024~2028년) 점자발전기본계획도 수립됐다.

훈맹정음은 계속 확장돼나갔다. 1947년 이중모음과 약자, 약어를 제정했고 1963년 고문(古文) 점자를 개발했다. 수학점자, 과학점자도 개발하는가 하면 점자악보도 외국에서 들여왔다. 1983년 한국점자통일안이 마련된 뒤 1994년 한 차례 개정을 거쳤다.

북한도 훈맹정음을 쓰고 있다. 다만 한글 맞춤법 통일안처럼 분단 이후 변천 과정을 거치며 달라진 점이 생겨났다. 남한은 된소리를 표기하려면 두 개의 점자를 겹쳐 사용하는데, 북한은 된소리 점자가 따로 존재한다. ‘아’ 생략 원칙이나 겹받침 표기 방식도 다르고 문장 어미와 부호 표기에도 차이가 있다.

 

송암박두성기념관에 전시된 점자 제판기.(인천 미추홀구청)

온 가족이 달라붙은 점자 보급, 번역, 출판, 교육 사업

박두성은 보급에도 온몸을 바쳤다. 아연판으로 된 점자 제판기를 만들고 종이를 닥치는 대로 구해 조선어독본, 천자문, 임꺽정전, 삼일운동 비사, 명심보감, 이광수 전집, 성경 등을 200여 권을 점자책으로 펴냈다. 부인 김경내 여사와 둘째딸 박정희 여사, 제자 이경희 씨 등이 점역(點譯) 작업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해방 직후에는 제자 이상진과 함께 인천에서 시각장애인 주간지 ‘촉불’을 발간하기도 했다.

박두성이 전국의 시각장애인들에게 훈맹정음을 보급하기 위해 착안한 것은 통신교육이었다. 우편으로 설명서, 점자책, 점자기, 점자용지 등을 보내주고 점자 편지로 질의응답을 주고받으며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훈맹정음이 전국으로 보급됐고 제자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마지막 남긴 말 “점자책 쌓아두지 말라”

박두성은 1963년 7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유언은 점자책을 쌓아두지 말고 세워서 꽂으라는 것이었다. 책을 쌓아두면 무게에 눌려서 점자의 튀어나온 부분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시각장애인을 생각한 것이다. 1992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됐고 2004년 4월에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됐다.

3주기인 1966년 서울 종로구 신교동 국립맹학교 교정에는 추모시비가 세워졌다. 인천 미추홀구 학익동에는 송암점자도서관과 송암박두성기념관이 설립됐고, 강화 교동도에는 박 선생 생가를 복원해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추모비에 새겨진 이은상의 시조 두 수는 박두성의 생애를 잘 말해준다.

 

점자판 구멍마다 피땀 괴인 임의 정성

어두운 가슴마다 광명을 던지셨소.

이 아침 천국에서도 같이 웃으시리라.

남의 불행 건지려고 자기 행복 버리신 임

한숨을 돌이켜서 입마다 노래 소리

그 공덕 잊으리까 영원한 칭송 받으소서

 

송암박두성기념관 전시실 입구. 박두성 얼굴을 모자이크로 형상화했다.(인천 미추홀구청)

 장애인도 이용할 수 있는 샤워실 표지판 아래 점자로도 표시해놓았다.

 박두성 생가에 조성된 한글점자 체험 코너. 비장애인에게 한글점자를 어떻게 읽는지 체험하도록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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