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기사가 만난 어지러운 세상, 우울한 고객들

[플랫폼의 노예들 : 대리기사 이야기 ⑰] 최종회

고아원 출신 트럭 노점상의 안타까운 이야기

작가지망생 소기업 사장, 꿈은 모두에게 소중

방출된 20대 중반 야구선수의 암울한 미래

대리기사의 눈으로 본 한국 사회 처절한 민낯

그동안 연재에 감사하며 내년에 더 좋은 글로…

2024-10-20     이득신 작가
이득신 작가

인천에서 화성의 어느 한적한 장례식장을 가는 콜이 잡혔다. 고객을 만나 차량의 문을 여는 순간 우울한 향기가 콸콸 뿌려졌다. 빛보다 냄새가 더 빨리 나에게 덤벼들었다. 오래된 트럭은 내부 조명조차 흐릿했으며 거친 후각이 나의 오감을 자극했다. 달랑 두 자리만이 세상의 전부인 트럭 안에서, 뒤엉켜 부패된 냄새과 어두운 그림자가 인사를 나누고는, 곧장 차량 밖으로 사라졌다.

차량 내부의 불을 켜는 순간 또 다른 어둠이 보였다. 삶은 사라지고 생존 의식으로 가득한 반 평짜리 공간이 그의 숙식을 해결해 주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빈 소주병과 김칫국물과 편의점 도시락의 찌그러진 플라스틱이 어지러운 관계 맺기를 하고 있었다. 운행을 시작하며 장례식장으로 가는 이유를 넌지시 묻자 젓가락 같은 그의 몸에서 갑자기 코끼리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고객의 아버지는 베트남전쟁이 끝나갈 무렵 전장에서 사망했다. 정확히는 실종되었다고 하지만 시신을 찾지 못하고 사망 통지서만 날아왔다. 이후 모친이 어린 남매를 고아원(현, 보육원)에 맡기고 자신의 인생을 찾아 떠났다. 고아원 시절부터 갖은 고생을 겪으며 모진 세월을 살았다. 동생이 어찌어찌 하여 모친의 연락처를 찾았지만 자신을 버린 엄마를 만나고 싶지 않아서 지금껏 피해 다니기만 한 것이다. 그런 모친의 부음을 받았다. 모친의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에 그는 처음 만난 나에게 인생 하소연을 쏟아내며 거친 세상을 눈물로 토해내듯 스스로를 위로했다.

중년 사내의 투박한 말씨가 여름장마의 눅눅하고 퀘퀘함이 배어버린 차량과 함께 좁은 허공을 맴돌았다. 눈물과 울음은 절규가 되기도 하고 소음이 되기도 했다. 그에게 가족은 아쉬움과 서러움 그리고 복수의 대상이었다. 죽여 버리고 싶은 그리움에 아버지 묘소를 찾아가 봉분을 파헤치기도 하고 동생이 알려준 번호로 한마디 없이 흐느끼고 울기만 하다 전화를 끊기도 했다. 그는 결국 화해하고 싶었다. 늦었지만, 그래서 더 보고 싶은, 언제나 그리웠지만 만나고 싶지 않은 그 얼굴.

‘엄마’

마지막 가는 길, 편안히 보내드려야겠다는 마음, 용서 없이는 자신의 마음이 더 불편할 것만 같은 시린 상처, 키워주지 못한 엄마를 증오하면서 낳아준 엄마에 대한 그리움, 그는 모든 걸 날려버리고 싶었을 게다. 50대의 사내에게서 엄마와 헤어지던 8살 소년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어린 중년의 사내가 고아원에서 겪어야 했던 10여년의 삶은 지독한 군대 생활 같았다. 매일 밤 선배들에게 기합 받고 얻어터지던 기억들, 알고도 모른 체하던 관리자들, 차라리 버려진 토사물 곁에서 움찔거리며 헤매는 구더기가 행복해 보이던 시절이라고 했다.

 

트럭 노점상이 과일을 판매하고 있다. (사진은 본문의 내용과 무관합니다). 연합뉴스

한 시간 여 동안 그의 인생살이 하소연을 들으려니 생존의 나락에서 허우적거리는 대한민국 말초신경들의 가여움이 느껴졌다. 겨울에는 뻥튀기로, 여름에는 과일 팔이로 생계를 해결하고, 봄여름에는 트럭에서, 가을겨울에는 사우나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이미 그의 친구 몇 명이 오래전 서울역 노숙자로 전락한 것을 생각하면 그는 스스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뿌듯함이 한없이 처연해 보인다. 노숙자와 노점상, 단어 한끝 차이로 그의 삶은 마치 로또의 신으로부터 혜택 받은 듯하다.

노점상을 하는 그에게 트럭은 집이자 안식처이며 아내이자 가족이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오래되고 낡았어도 아직 10년은 거뜬하다고 말한다. 고아원 시절부터 자신을 지원해준 기업인과 함께 술 한 잔 걸치고 대리기사를 부른 것이다. 그 트럭도 10년 전 후원자가 마련해 준 것이라고 한다. 그에게는 누군가 자신의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인천에서 장례식장까지는 1시간 거리였다. 장례식장에 그를 내려주고 다시 옮기는 발걸음이 무릎에 돌덩이를 매단 듯 무겁기만 했다.

생후 80일에 입양한 둘째가 어느덧 대학 입시를 준비해야하는 나이가 된 입양부모 입장에서 내가 우리 아이의 부모가 되지 않았다면 우리 둘째는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리고 몇 년간 보육원 자원 봉사를 하며 시설의 아이들을 만났던 지난 일을 생각하면 중년 사내의 지난한 삶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지금 대한민국의 보호시설 출신 아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왼쪽)가 17일 서울 강남구 아이파크타워에서 열린 제18회 포니정 혁신상 시상식에 참석한 후 책에 사인하고 있다. 2024.10.17 [사진공동취재단] 연합뉴스

시흥에서 김포로 향하는 고객을 만난 것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의 평일 밤 10시 무렵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은 사업가였다. 하지만 그는 사실 사업에 대한 욕심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작가의 삶을 포기한 것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직원이 30명 정도인 가전제품 부품회사 오너였다. 나의 본업이 작가이며 기자라고 이야기하자 그는 마치 연락이 끊어진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좋아한다던 그와 함께 대리기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고객과 문학 이야기를 나누는 경험을 했다. 주인공인 와타나베를 비롯한 인물들을 말하면서 그 짧은 시간 고객은 자신의 인생을 되찾은 듯 흐뭇해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해변의 카프카 등 하루키 작품에 대해 작가 지망생답게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 작가 중에서는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였던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에게도 큰 울림이 있는 작가이기도 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고객은 무척 아쉬웠던지 자신이 산다면서 맥주 한 잔을 권유했다. 김포에서 집으로 돌아갈 일이 아득하여 고객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더니 편의점으로 나를 끌고 가서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키의 다른 작품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노벨문학상이 나온다면 어떤 작가가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 등, 그날 함께 술을 마시지는 않았지만 1시간여 동안 나누었던 대화를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고객은 정확히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예언을 적중시켰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못다한 꿈을 펼치길 바란다며 자리를 마무리했다. 하고 싶은 일(글쟁이)을 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대리운전)을 병행해야만 하는 나와, 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물려받은 가업을 운영해야 하는 부자 고객의 잃어버린 꿈 사이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하루였다. 이후 몇 차례 카톡을 주고 받으며 지내다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소식으로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2군 선수들이 훈련하는 2군 전용구장은 보통 한적한 시골에 위치해 있다. 연합뉴스

그는 퇴출된 야구선수였다. 내가 만난 당일 그의 방출 소식이 스포츠 신문 한 켠에 전해졌다. 수도권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18년 하위 순번으로 수도권의 모 구단에 지명된 선수였다. 야구팬인 나에게도 내가 응원하는 우리 팀 1군 선수가 아니라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일 수밖에 없다. 하물며 다른 팀의 2군 방출 선수의 이름을 내가 알 리 없다.

고교 시절엔 제법 잘한다는 소리도 들으며 유명 야구선수를 꿈꾸었지만 이제 그는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채 20대 중후반의 나이로 은퇴 선수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그는 외야수로 1군에서 5경기만 뛰고 내내 2군 선수로 머물렀다. 야구선수가 아닌 현역병으로 군 복무를 해결하고 다시 팀에 복귀했을 때, 열심히 하면 언젠가 기회는 올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입지는 2군에서조차 더욱 좁아져 있었다.

내가 그의 대리호출을 받고 달려간 시간은 이미 새벽 4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함께 퇴출된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신세 한탄을 하면서 술 한 잔 마시자 했던 것이 밤을 새우게 된 이유가 되었다. 1차는 구단에서 제공하는 송별식의 의미로 저녁을 먹었지만 그렇게 얻어먹는 한 끼 식사 자리가 편안할 리 있을까.

그가 퇴출 될 것이라고 미리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감독과 코치가 자신에 대한 관심을 접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 이미 3개월 전부터였다. 보통 시즌이 끝나면 방출 선수를 발표하게 되는데, 그는 자신의 방출을 당시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야구단에서 계속 야구를 하고 싶다는 그의 희망과는 달리 부모님의 입장도 매우 중요한 상황이라 그는 섣불리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꾸려야 할지 막막하다며 우울한 세상을 한탄했다. 프로구단에서는 월급을 받아가며 야구를 하지만 독립야구단은 돈을 내가면서 선수생명을 이어가야 한다. 평생 야구만 했던 고객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야구를 이어갈지조차 답답한 상황으로 내몰린 것이다. 야박한 자본주의의 채찍은 젊은 야구선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대리기사 일러스트. 챗GPT-김호경 에디터

대리운전이라는 일을 부업으로 삼으며 만났던 고객이 지난 22개월간 약 2000여 명에 이른다. 한 달 평균 80명 정도 되는 셈이다. 좋은 고객, 나쁜 고객, 이상한 고객 등 별별 고객을 만나면서 나는 대한민국 사회의 신랄한 밑바닥을 보고 있다. 대리기사는 이 사회의 민낯을 여실히 볼 수밖에 없는 일을 한다. 차마 이곳 지면에 싣지 못하는 19금 이야기는 물론이고 고객의 입과 행동을 통해 전해진 뜨겁고 질퍽한 불륜과 유흥의 밤을 목격한다. 그들이 누구이건 무슨 일을 하건 언제나 행복하고 건강하길 바란다.

※ 지금까지 17회 연재 동안 대리기사 이야기를 애독해주신 시민언론 민들레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연재를 허락해 주시고 지금까지 격려와 용기를 주신 민들레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년에 더 좋은 주제와 내용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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