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속한 집단의 질서에서 누군가에 의해 돌출된 행위가 표출 되었을 때, 비록 그것이 소수일지라도 보수 성향의 사람들은 질서가 무너질 것 같은 위기감을 느껴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진보 성향의 인간들은 그런 정도의 돌출된 행위는 사람 사는 세상의 다양성일 뿐이며 함께 하는데 별 의심이 없다. 다시 말하면 돌출된 것들에 대하여 보수적 성향의 인간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진보적 시각에서 보면 호들갑스럽게 보일 뿐이고, 돌출된 것들에 대한 진보적 성향의 인간들이 가지는 포용심은 보수적 시각으로 보면 안전 불감증이나 무모한 짓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원칙에서 벗어날 때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1% 추상적 위험을 100% 현실적 위험으로 전환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대강 이런 식으로 확대된다.
길거리에서 침을 뱉거나 휴지를 버리는 사람을 원칙대로 처벌하지 않으면 대한민국 전체가 침이나 휴지로 뒤 덮인다고 생각을 하거나, 이념적으로 좌익 성향의 인간들이 있으면 비록 그들이 소수 일지라도 궁극적으로 나라 전체가 좌경화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혹은 공권력에 대항한 자에게 법의 관대함이 있다면, 공권력 전체가 무너져 종국에는 나라의 헌정 질서가 파괴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내 몇몇 불량 학생을 본보기로 퇴교시키지 않는다면 학생 전체가 그들의 영향을 받아 마침내 학교 전체가 타락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 원칙을 어김으로서 상상되는 공적 위험의 총량을 공동체 구성 요원을 분모로 하여 나눈 값에 자신의 몫인 1을 곱하면 그 위험 요소란 게 작을뿐더러 간접적이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보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그러한 자신의 작은 위험을 공동체의 위기란 말로 포장을 하며 과민 반응을 한다. 그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1/N의 조그만 위험마저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에 예측의 영역에 있는 작은 불안 요소까지에도 너거러움이란 없다.
진보형 인간들이 보수형 인간들의 이런 과민반응을 호들갑스럽다고 하는 이유는 위기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의 식욕은 여전히 왕성하기 때문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자는 보수성향의 주장은 합리적으로 들리는데, 막상 그들이 말하는 대가 입을 손실이 미미한데도 불구하고 소를 절멸 시키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그런데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이 이처럼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려는 것은 원칙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보면 그들 최고의 가치인 안정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원칙이란 안정보다 하위 가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원칙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안정을 해친다고 생각할 때 그들은 원칙을 쉽게 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진보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이 호들갑스럽게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진보적 사고에는 누군가가 공동체의 원칙을 위반했을 때 자신에게 돌아오는 1/N의 간접적 불행 정도는 충분히 감수하며 포용할 자세가 되어있다.
진보적 사고에서는 결정적이지 않다면 자연계에서 쉽게 나타날 수 있는,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만큼의 위험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1%의 현실적 위험을 오히려 0.1%의 추상적 위험으로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보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진보형 인간들의 이런 안전 불감증이 자신들에게까지 피해가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모하다고 표명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진보형 사람들은 앞에서 예를 든 길거리 침 뱉는 자나 소수의 좌익성향 인간들이나 공권력에 대항하는 자 등에서 그들을 옹호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사회의 암적 존재라고 할 만큼 배척하지도 않을 것이다. 특히 불량학생 사건은 고등학교 다닐 때 저의 경험인데 보수성향의 선생님은 나이가 지긋하신 수학선생이었어며 불량학생들을 제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진보성향의 선생님은 젊은 영어선생이었어며 그래도 졸업시켜야 한다고 했다. 두 선생님의 합의점은 없었고 학교 내부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결국 보수성향의 선생님 반 학생은 제적되었고 진보성향 선생님 반 학생은 구제되었다. 요즘 같으면 전국이 떠들섞거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한 학교에서 벌어졌지만 그 당시 (1970년대 초)유야무야 되며 넘어갔었다. 그 후 50년이 지난 시점에서 보면 학교는 조금도 타락하지 않고 오히려 지금은 전국적 명문고가 되었으며, 두 학생은 전혀 다른 삶의 역정을 겪었다.
이렇듯 같은 상황에서 보수형 인간상에게서는 호들갑스런 반응이 나타나고 진보형 인간상에게서는 안전불감증의 태연한 태도가 나타나는 건 결국 한쪽에는 공포심이 유달리 많이 느끼는 유전자가 뇌세포에 분포되어 있고 다른 한 쪽은 모험적인 유전자가 분포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참고 : 정치성향과 뇌구조 [2014-06-02 16:16:17] YTN과 성균관 대학 이경락 박사 인터뷰]
따라서 보수와 진보 두 성향이 안정과 개혁이라는 과제에서 만큼은 같은 수준의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은 이성적 문제가 아니라 태생적 문제이기 때문에 뇌구조의 변화를 일어 킬 정도의 적극적이고 성실한 토론 없이는 불가능할는지도 모른다.
작성일:2023-06-21 20:44:41 58.230.175.147
저의 생각은 :
세상에 보수와 진보의 성향의 사람으로 분류한다는 전제가 깔린 이준호 님의 글에 공감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태고 싶은 내용의 하나는, <자율과 조화>의 성향의 사람입니다...그리하여 이 세 가지 유형의 설명은 어떨까 싶습니다.
<자율과 조화>는 잘 아시겠지만,
[대한민국헌법]의 제정자인 대한 '국민'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바탕으로 "다짐"한 개념입니다.
이 개념에 대하여, 참된 정부라면 초중고의 교육과정의 최우선으로 가르칠 것으로 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영어 수학보다 두 배 이상의 가중치를 둠이 옳습니다.
국민이 주권적 의지(다짐)로 결정한 이같은 중요한 개념을 국민이 체득할 수 있도록
국민, 국회, 정부, 사법부 등이 도대체 실천적 노력들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세상에 보수와 진보의 성향의 사람으로 분류한다는 전제가 깔린 이준호 님의 글에 공감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태고 싶은 내용의 하나는, <자율과 조화>의 성향의 사람입니다...그리하여 이 세 가지 유형의 설명은 어떨까 싶습니다.
<자율과 조화>는 잘 아시겠지만,
[대한민국헌법]의 제정자인 대한 '국민'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바탕으로 "다짐"한 개념입니다.
이 개념에 대하여, 참된 정부라면 초중고의 교육과정의 최우선으로 가르칠 것으로 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영어 수학보다 두 배 이상의 가중치를 둠이 옳습니다.
국민이 주권적 의지(다짐)로 결정한 이같은 중요한 개념을 국민이 체득할 수 있도록
국민, 국회, 정부, 사법부 등이 도대체 실천적 노력들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