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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 저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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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예프 베주코프
등록일
2024-10-06 19:55:47
조회수
316
가을이다. 이곳 베른에서는 벌써 눈 내린 알프스가 아침 안개 사이로 비친다. 고국에서도 여름에 지나쳤던 상록수들이 눈에 띌 것이다. 땅은 눈맞을 준비를 분주히 해나가지만 우리는 또 나름의 이유로 초조히 이 천고마비의 계절을 지샌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가려져 있고 그들 모두가 그냥 넘기기 어려운 것들이다. 첫눈이 내릴 때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할까? 수능이 끝나고 수라장이 된 입시를 안주로 또 그는 무슨 술을 잔에 부을까? 자신의 운명을 국회의 거수자들에게 맡기고 그는 그 쓰디쓴 에탄올의 끝맛에 어떤 이름을 붙일까? 그것이 루이 16세의 심정일까? 그의 파멸은 어디까지 왔나? 떨어지는 낙엽들에 질문들을 붙여본다. 검찰개혁, 언론장악, 뉴라이트, 채상병 같은 기사 제목들이 잠시 떠오른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로 '눈앞에 있는' 그러한 주제들은, 슬프게도 내게 주어진 과제가 아니다. 이것들은 그대들의 것이고 그대들이 매듭지어 내게, 그리고 나의 세대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부탁이자 그대의 의무에 대한 재확인이다.
한 달 남짓 남은 16을 바라본다. 그대들과 다르게, 나에게는 세기말까지의 생존이 기대된다. 나이가 들어 세기라는 개념이 역사책에서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을 차츰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한 세기 전에 우리는 무엇이었는가? 신생 제국의 야심 찬 식민지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한 세기 후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다음 세기의 16살들은 노회찬을 모를 것이며 노무현은 수많은 암기 사항 중 하나로만 생각할 것이고 유시민은 흔적조차 없을 것이다. 슬픈 일이다. 나는 노무현의 시대에서 노무현의 섭리를 배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혹시 아는가? 그들은 나의 시대를 살아갈 수도 있다. 펜대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고 우리의 의지는 앞으로의 시대를 기술할 것이다. 그리고 미래는 우리의 시대정신을 배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떳떳한 질문자로서 묻는다.
그대는 우리 사회를 어떻게 끌어왔는가?
그리고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기성세대는 오랫동안, 당연히 교육자였다. 선행된 세대에겐 그 지식과 경험에 상응하는 존경이 따랐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적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발전, 혹은 변화해 가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멀리 가지 않고 20년 전만 하더라도 내가 이 글을 대중에게 전달 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었다. 수백 년간의 저널리즘의 권위가 20년도 채 안 된 뉴 미디어의 도전에 깨져가고 있다. 실체적 지식은 인공지능 시스템들을 통한 정보가 더욱 널리 쓰이고 있다. 지성에 대한 고전적 잣대조차도 뒤바뀌고 있다. 그대의 비전은 불확실하고, 그대의 교육은 수년 안에 의미를 잃거나 반박될 수 있으며 그대의 권위 또한, 이제는 그대 스스로가 벌기 위해 좇아야 한다. 이 것이 그대들을 향한 위협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앞으로 그대가 뒤에 살아갈 세대를 위해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묻는 것이다.
상속하고자 하는 의지는 누구에게나 조금씩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선 후행 세대 전체에게이고 그 형태는 공교육의 형태를 띄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 교육이다. 너무나 간단한 답이지만 더 좋은 대안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럼 이제 무엇을 남겨야 하나?
그것은 특정한 사실이나 사실의집합이어선 안 된다. 그것들은 곧 무가치해 지고 정말 귀중한 것들은 전체가 유출 없이 가지고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시대 정신의 원리이자 우리가 근본적이고 자명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더 나아가 그것은, 어쩌면 사회가 붕괴하더라도 새로운 사회를 구축할 수 있도록 하는 강인하고 의연한 의지여야 한다.

민주주의다.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민주주의다.
헤겔이 말했듯 우리의 시대정신을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오만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지난 100년이 민주주의라는 단순한 이상이 정착되는 과정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지금 보이듯이 민주주의는 우리의 생각보다 취약하다. 아니,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그 붕괴는 스스로를 되먹여 손쓸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때마다 민중은 그의 힘을 과시했다. 다른 모든 것이 그랬듯 민주주의 또한 피 위에 세워졌고 피로써 지켜질 것이다. 이 것만큼은 모두의 의무일 것이고 그것이 나의 유일한 믿음이다.
우리의 공교육은 개인을 계발하고 한명의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습득, 발현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이제는 더 나아가 한명의 시민,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가진 시민을 키워내야 한다. 그러나 청소년에게 시민으로서의 능력은 아직 너무나 먼 개념이다. 청소년 조직은 산발적이고 약하며 각 당의 청소년 위원회는 아예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도대체 '그들', 청소년은 누구인가?

그간 피교육기와 피교육자에 대한 인식은 그저 실체적 개인이 되는 과정일 뿐, 과장 좀 보태서 모체 밖 태아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감히 반박하겠다. 예로부터 인간을 종이로 치환하여 생각하는 사상들이 있었다. 인간은 완벽히 무지하게 태어나며 학습을 통해 정보를 축적하고 이를 통해서만 재창출한다는 것이다. 완벽한 혹은 이에 준하는 환경결정론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반영되어 계몽 이후에 식자 계층은 혁명의 전위라거나 국가자본주의 관료와 같은 형태로 엘리트층을 구성하여 민중을 다스리곤 했다. 그러나 그런 엘리트들이 보여준 무능과 압제에 대하여 민중은 저항했다. 일반 대중이 항상 합리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권만큼은 그들 스스로 인식하고 지켜낸다는 것이다. 인간 지성의 발달에서 환경을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이들, 이제 막 세상에 던져졌음을 자각한 청소년들의 지성이 멸시받고 무시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 또한 인지하고 생각하며 행동한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은 그러한 사고를 촉진하긴커녕 굉장히 무관심하며 어떨 땐 적대적이다. 이는 이러한 적극적인 생각의 개진을 위축시키며 이것이 반복되어 자아가 더 이상의 사회적 참여에 대한 직접적 동기를 잃어버리면 그제야 사회가 바라는 '생산 기계'가 되거나 냉담자가 되어 버린다. 이후의 참여는 이해에 따른 활동이지 사회참여를 통한 자아 실존에 대해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생활기록부를 위한 활동이라는 것이다.
내게 대단히 큰 충격을 준 일이 있었다. 내가 학교에서 교복의 자율화를 발의했을 때의 일이다. 대의원회의에서 학칙 개정에 대해 발표했다. 담당 선생님과 학칙 개정에서 필요한 각 과정과 숙지사항들에 대해서 모두 의견을 나누고 한 것이었다. 제대로 된 발의안 접수도 없고 공론화에 필요한 과정도 없었다. 장기적인 비전도 제대로 된 정책도 없다. 밖에선 초등적인 포퓰리즘이라 부르던 것이 엄연한 선거이고 이제는 아예 인기 중심적 포퓰리즘의 대명사로 학교의 선거가 자리 잡았다. 각 학급의 대의자들은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학급 자치회는 연례행사 준비에 바쁠 뿐이었다. 사실 불만, 애로사항 신고가 차라리 어울릴 지경의 회의였다. 그러고서도 그것은 학생 전체의 대의기관이라 불린다. 내가 그곳에서 발표를 마치자 그것은 그저 소소한 웃음거리로 소비됬다. 몇번의 웃음기 섞인 반대토론이 이어졌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중 어느 한명의 반대의견이었다. 그것은 단순했다. 이곳은 교복을 입는 학교이니 발의자가 불만이 있으면 떠나라는 것이다. 물론 농담이겠지만 얼마나 끔찍한 발상인가? 이것이 다수의 생각이 아니길 나는 간절히 바란다. 개인에게는 너무나 단순하고도 현명한 선택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게 그러한 무기력은 정말 치명적이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투사들이 반도 진입을 목표하고 시도하지 않았다면 열강들이 우리를 독립시켜 주었을까? 민주화 투사들이 그저 도피하려 했다면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가장 슬픈 점은 내가 이러한 입장이 소수이고 앞으로도 소수라고 장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냉담과 무기력 앞에서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 과연 가능키나 할까?
앞으로 민주주의가 영속하리라 막연히 생각하진 말길 바란다. 당장 세기말까지 우리는 지금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을 한참 초월하는 위협이 계속될 것이며 우리가 그에 굴복하지 않으리라고는 누구도 보장할 수 없다.
나아가야 한다.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청소년들의 참여를 촉진하고 지원하며, 무엇보다 그들이 천부적인 정치적 효능감을 인식하고 느낄 수 있게 하여야 한다.
학생 인권법은 그 첫 단추일 뿐이다. 이러한 사회적 권리뿐만 아니라 헌법적인 참정권도 일반 유권자와는 다른 방식이라 할지라도 정비하고 제도화해야 한다. 학생 계층 전체를 대의할 기구가 있어야 하며 민주주의적 참여는 정규교과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각 당의 청소년 조직은 독립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존재해야 하며 청소년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쉬운 요구는 아니다. 그러나 그대가 물려받은 것을 우리에게 물려주지 말라는 부탁일 뿐이다.
세기말에 우리에게 익숙하던 이름들은 거의 완전히 잊힐 것이다. 역사학자들 입에서나 오르내리려나. 봉하마을은 점차 한산해질 것이고, 평산책방도 조용한 유적이 될 것이다. 세계 패권은 또 다른 방식으로 도전받고 우리의 조국은 다시 위기를 겪을 것이다. 아마 나와 내 또래들은 그런 시대를 볼 것이다. 그 시대 속에, 설산의 소나무 같은 상록의 민주정체가 있다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지 않을까.
작성일:2024-10-06 19:55:47 188.62.16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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