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음이라 착각하고 그름을 행하는 자와 옳음을 행함으로 핍박받는 이들을 보며 참담함으로 떨리는 손으로 이글을 휘갈겨 본다. 마태의 복음을 그분의 생명수로 봄이 아니라 선악과로 보고도, 알고도 그것을 마치 생명나무로 알고, 붙잡고 자신이 다른이들보다 잘난것 처럼, 많이 아는 것처럼 당당히 그것을 읽는 이들과 그것을 보고 방관하는 이들에게 존경(?)을 표하고자 펜을 든다.
본문: “…모든 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은 삼십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갖다 주며…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은을 성소에 던져 낳고 물러가 목메어 죽은 지라…대제사장들이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네 말이 옳도다…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총독이 기이히 여기더라…명절…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더라…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이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 하거늘…이에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이에…군병들이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희롱…침뱉고…머리를 치더라…쓸개탄 포도주…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강도둘이 십자가에 못박히니…성전을 헐고 짓는 자여…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구시 즈음에…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엘리야를 부른다 하고…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예수의 부활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그 이튿날…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모여…사흘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기억하노니…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마태복음27장의 본문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신 “내가 너희에게 불어넣어준 생기인 선한, 옳음의 빛인 생명나무를 보고 그로 그 선함, 옳음을 회복하여 돌아오라”는 함의를 품고 있으며, 그것을 백성들을 구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신들(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의 안위와 탐욕과 자리보전을 위해 그름을 본 자(유다)를 꼬드겨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팔게 하고, 저희들도 가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로 가려는 백성을 가로막고 현혹하여 그 분을 옳지 않음, 그름으로 백성을 지배하는 자들의 힘을 빌려 십자가에 매달리게 함과 아울러 부활하는 빛, 옳음에 두려워 돌로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려 한다는 것이다. 공의, 옳음의 부활은 돌로 막을 수, 그들 즉 그름의 완력으로 막을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근자에 위의 마태복음을 팔아서 자신들의 치부를 덮고자 하는 짓거리가 벌어졌음을 접했다. 그 행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정 예수님의 빛을 품고 있는 자인지, 그냥 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 자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행태를 보건대, 그 상황에, 무엇을 전하고자 마태의 복음을 읽었는 지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대의를 위해 희생하라는 의미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말하는 대의가 무엇인가? 백성들의 장로였고, 국민의 민의를 대표하는 이들의 대의는 무엇인가? 그 때도 그랬듯이 자신들의 치졸한 자리지킴과 명예, 권위에 대한 탐욕으로 보인다. 진정한 대의, 하나님의 공의(Righteousness), 정의(Justice)는 하나님의 생명으로의, 예수님의 빛이신 사랑으로의 백성들의 구원이며, 국민의 행복한 삶으로의 인도에 있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음을 말하고 행하고 있는 이에게 예수님에게 십자가행을 권하는 제사장과 백성의 장로의 행태를 재현하는 것이 어찌 타당하다 할 것인가, 그것도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타민족을 점령하고 점령지를 법이 정의라고 외친 키케로식의 로마법으로 다스리고 있는 자들에게, 그와 같은 민족인 너희들이 원하니 어찌하겠는가, 너희들 율법에 의한다 하니 나를 원망치 말라, 그러면서 당시의법에 의거 십자가형으로 시행했다.
마태의 복음을 읽은 자야 보아라, 예수를 따른다고 입으로 외치는 자야 보아라, 작금의 행태가 그 때와 무엇이 다른 지를 보아라. 너희의 작태가 당시의 백성의 장로와 제사장들과 같고, 백성의 하나님에로의 구원과 국민의 행복에로의 인도에 쓰여 질 율법과 법을 구원에로의 장애물로, 국민의 안위를 위협하는 칼로 사용함이 같고, 아울러 하나님의 생명의 빛인 공의로 다스려지는 세상을 구현하려 함이 아니고, 옳음이 아닌 그름을 지향하는 요상한 무당과 선지자인 척하는 요부의 혀에 의해 다스려지는 작금이 그나마 로마법으로 다스려지던 그때보다도 더 처참하지 아니 한가?
마태의 복음을 읽은 자와 그것을 보고 미소를 머금은 자들아 너희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라면 당시의 백성들의 장로 같음이니 모든 것을 버리고 은거하여 다시금 마태의 복음을 읽고, 읽어 하나님과 예수님의 생명의 빛을 각성하기 바라며, 예수를 따르지 않는 자들이라면 하나님의 공의와 사회적 정의가 무엇인지 공히 은거 후 각성하기 바란다. 각성 후 백성 앞에, 국민 앞에 나서라 그렇지 못하고 나서면 소경이 백성을, 국민을 작금과 같이 절망의 구렁텅이로 인도하는 위선, 가식의 자들이 될 것이다.
이렇듯 마태의 복음을 읽도록 가르친 교회의 지도자들이여, 이렇듯 마태를 읽음에도 방관하고 있는 지도자들이여, 또한 묵시의 동의를 표한 지도자들이여 그대들은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에 있음인지 정이 알지 못하는가? 예수 따름이 입으로만 펼쳐지게 하는 것이 그대들의 사명인가, 그름이 옳음을 누르고 지배하려 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생명의 빛으로 그것을 돌려놓아야 하지 않음인가, 그대들이 숨죽이고 있음이니 요부들이 그리스도라 외치고 백성과 국민을 현혹하고 있음이 아니던가, 분연히 일어나 생명의 빛을 발해 주기를 호소한다. 최소 옳음이라 떠드는 그름은 옳음이 아니라고 말해 주기를 바란다.
그름을 그르다고 절규하며 옳음을 행하는 이들은 의로 인해 핍박 받는 이들과 같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세상을 꿈꾸고 만들려는 자들이며 그들은 와 있는 그의 나라의 문을 열 자들인 것이다.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현세에 험악한 짓을 했다 한들 입으로 회개하고 물질로 바쳐 상급을 얻으면 천국행에 발을 걸칠 수 있다고 떠드는 이들아, 너희가 중세말의 연옥이 있다하고 천국 행 면죄부 장사를 하는 요부들과 무엇이 다르다 할 것이냐?
그름을 그르다고 외치며 옳음을 행하고자 하는 이에게 권하고자 적어본다.
첫째, 모든 책임을 매고 가되 백성의 장로, 제사장이라 말하는 이들의 의에 반하는 행위에 개의치 말고 나아가기를 원한다. 그들의 죄는 그 죄 이상의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당시와는 다른 백성들의, 작금 국민들의 개안에 의해, 스스로의 내적 번민에 의해 죄의 대가를 받을 것이 자명하다. 로마의 총독 무리들도 그들과 다른 옳은 법의 집행에 그 때는 기이하다는 정도였으나 작금은 당황, 초조, 허둥되는 상황에 빠질 것이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네 말이 옳도다…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총독이 기이히 여기더라’
둘째, 비록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어떠한 수모도 감수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옳음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어떠한 잔도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군병들이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희롱…침뱉고…머리를 치더라…쓸개탄 포도주…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셋째, 수모를 당하는데 그치면 노고나 고난에 대해 감사의, 동정의 말들에 그치고 만다. 행동하여야 한다. 그들 제사장과 백성의 장로, 로마의 총독은 자신들의 배부름을 위해 백성의 안위와 먹거리를 포기하고 있다. 권한이 없기에 어찌할 수 없다, 법적 지위가 없기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외치고 항의하는 것 만으로 아니된다. 그들이 망국의 길로 백성을 인도하고 있다면, 그 백성들이 그들이 아닌 그대를 원하고 있다면 결단해야 한다. 작금은 백성을 위하는 정부는 없고, 국가를 망치고 팔아먹으려는 저작거리의 양아치들만 가득하다. 구한말의 상황에 견주어 뒤쳐짐이 없다. 그렇다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정부라면 그 정부를 대신할 정부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그들을 대신할 임시정부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4년 이후에도 연계할 수 있는(지금의 작태라면 조만간 닥칠지도 모르나)부처를 당내에 만들고 세상의 인재들을 모아 부처를 담당할 부장으로 임명하자, 외교부장, 국무부장, 법무부장, 외교부장…등으로, 4년후 그 때가서, 그들이 물러나고 나서 인재를 찾고 부처를 추스리고, 정책을 바꾸고 대처하면 이미 수많은 참사가 벌어지고 나서인 만큼 그 수습의 기간은 길어져 좋은 정책일지라도 실기의 우를 범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이라도 정부조직을 만들어 외교 국방 경제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인재를 모아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라 반문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나, 이런 이들로 구성치 말라, 그들은 현자들 일지는 모르나 지혜(즉 진리, 긍휼의 마음과 그 진리를 행함)를 지닌 자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국회에 사법, 외교, 국방위 등이 있기에 거기서 정부의 정책에 대해 질의하고 조언하고 있지 않는가 라 반문할 것이나, 그것은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고, 상호의 의견이 존중되는 보편타당한 상황에서의 기구들의 역할들 인 것이다. 국가의 존망, 국민의 안위가 걸린 중차대한 시기인 만큼 그런 안일한 생각과 행태는 도적들이 옆집 담을 넘어 물건을 훔쳐가고 있는 것을 보고 경찰이 와서 해결하겠지, 그들의 의무이니 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진배가 없다. 그 물건을 훔쳐 팔고 나면 그 범인을 잡은 들 원래대로 원상복구가 가능하다고 보는 가, 훔쳐간 가전제품이 손상되어 있다면 원상 복구의 비용은 누가 지불할 것인가, 사용되어진 현금은 어떻게 돌려받을 것이며, 해결까지의 기간에 드는 비용은 누구에게 청구할 수 있나? 개인에게 일어나는 상황도 이러 함일 것인데, 하물며 국가간 발생하는 손해를 어떻게 단시간에, 적절한 보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향후의 수권정당의 대표이름으로, 미래 국민의 위임을 받은 위임자의 이름으로, 외교 부장을, 통상부장을 관련국에 파견하여 당사국의 대표를 만나 국민의 뜻을 전하고 재협상을 하자, 물론 대표자격을 문제삼아 만나 주지도, 상대조차 안 해줄지도 모른다. 이준열사의 심정으로 두드리고 선포해야 한다. 그래야 최소의 피해로 막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때의 수모를 기억하고 그들의 진위를 확인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옳음을 선포하고, 또 선포하면 상대국의 양심 있는 자들이 움직여, 불합리한 거래를 지연할 수도 있을 것이고, 양심 있는 국내 정부조직원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국방부장, 법무부장, 국무부장으로 하여금 옳음의 정책을 매일 발표하고, 그 세부사항을 지시하고 간담회를 열어 간다면 뜻있는 자들이 동참하고 동행할 것이며, 부당의 정책시행을 최소한 연기하지 않겠는가?
저들의 무지 무식함은 결코 두번의 실각을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한번은 백성의 민의에 당황해 부지불식중에 권력을 내려 놓았으나 두 번은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무지 무식함은 전과 같으나 이들은 악랄함, 무 논리, 철면피적 똥 배짱의 무기를 장착했다는 것이 다르다. 그름으로의 진화를 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대들도 백성의 민의라는 기존의 무기에 임시정부의 핵무기를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들은 이전의 사태에서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고 오로지 백성들의 민의에 얹혔다. 이제는 그대들의 옳음의 행위가 더해져야 저들의 그름으로 부터 백성을 구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모든 족속으로 제자삼아…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신학을 접하고, 그로 살아온 날들에 새로운 날들로 남은 날들을 채우려 하는 자의 시각으로 보기에도 너무나 괴이하고, 개탄스럽고, 더한 안타까움에 소름이 이는지라 글주변이, 말주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견을 밝히는 것이니 그 실에 너무 많은 책망이 있지 않길 당부하는 바이다.
어찌하였던 하나님의, 예수님의 생명의 진리인 빛은 그의 공의를 알고 그의 본원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며, 또한 그의 공의를 알고 깨닫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하지 않으면 그의 나라는 도래치 않음이라는 것이다. 어둡고 어두운 터널로의 길에 진입하나 그의 빛으로, 우리 안에 있는 그의 빛으로 어둠을 밝혀 나갈 수 있으리라 소망하며, 더하여 나가야 함의 당위성을 읊조려 봅니다.
작성일:2023-03-12 01:28:50 24.99.222.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