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사라진 대기업…절반 이상 5년간 신사업 “없음”
한국 대표 기업 삼성전자도 10년간 ‘제로’
331개 중 175개 “5년 간 신규 사업 없어”
경영권 3, 4세 넘어가며 '기업가정신' 쇠퇴
혁신 살리려면 대기업 지배구조 개혁 시급
미래형차·에너지·인공지능 빅데이터 인기
대기업의 도전정신과 혁신 성향이 갈수록 떨어지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가 나왔다.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가 31일 공개한 국내 대기업 신규 사업 현황 보고서가 그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500대기업 중 절반 이상이 최근 5년간 신규 사업목적 추가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메모리 반도체 경기 회복에 힘입어 이날 깜짝 실적을 발표한 한국 대표 기업 삼성전자는 최근 10년간 사업목적 추가가 1건도 없었다.
CEO스코어가 국내 500대 기업 중 2018년 이후 5년간 사업보고서를 제출한 331곳의 사업 목적 추가 현황을 조사한 결과 조사 대상 기업의 절반이 넘는 175개(52.9%)가 신규 사업목적을 추가하지 않았다. 나머지 156개 기업(47.1%) 중에도 문서상으로만 신규 사업을 추가했을 뿐 실제로 사업을 영위하지 않은 비중이 30%에 육박했다. 이들 기업이 신규로 추가한 사업은 684개인데 해당 사업을 하는 곳은 487개(71.2%)에 불과했다.
나머지 197개(28.8%)는 사업목적만 추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 기업 중 신규 사업을 추가만 하고 모두 다 영위하지 않은 곳이 15개나 됐다. 예컨대 아이에스동서는 최근 5년간 추가한 사업목적 14개를 전부를 영위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우기술(9개)과 한화오션(5개),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3개) 등도 추가한 사업 중 영위하지 않는 사업이 많았다.
대기업들이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지 않는 사정은 많을 것이다. 국내외 경기가 장기간 침체한 데다 세계 시장에서 경쟁이 심해지는 등 위험이 커진 것이 신규 사업 진출이 저조한 이유일 수 있다. 그러나 대기업의 절반 이상이 최근 5년간 신규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다는 건 심각한 문제다. 위험을 감수하는 도전정신,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려는 기업가정신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가정신이 투철한 기업은 어려울 때일수록 큰 기회를 찾는 성향이 있다. 삼성과 SK, 현대차, LG 등 대기업 창업 세대는 정경유착의 흑역사가 있기는 하지만 기업가정신은 투철했다. 이에 비해 재벌 3, 4세로 올수록 도전정신이 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대기업의 신사업 진출이 뜸한 것은 경영권이 3, 4세로 승계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 기업들이 도전정신과 혁신 성향을 되살리기 위한 차원에서도 재벌기업의 지배구조를 개혁할 필요가 있다. 단지 혈연만으로 경영권을 승계하는 전 근대적 행태가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업목적을 추가한 기업들은 ‘미래형 자동차’와 ‘에너지’,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사업에 관심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미래형 자동차는 현대글로비스, 엔브이에이치코리아, 아이마켓코리아, 롯데케미칼, CJ대한통운 등 22개 사가 영위 중이다. 이중 현대글로비스는 미래형 자동차 인프라 관련 사업목적을 4개 추가했다. 구체적으로 전기차 충전사업, 수소차 충전사업, 수소 저장사업 등이다. 엔브이에이치코리아도 전기차용 내장재 제조사업, 전기차용 배터리 모듈 팩 제조사업 등 전기차 배터리 관련 사업목적을 4개 추가하며 미래형 자동차 사업에 관심을 보였다.
에너지는 HD현대오일뱅크와 계룡건설산업, 한진, 한국가스공사, 에쓰오일 등 17개 기업이 영위하고 있다. 에너지 부문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사업은 태양광 발전사업이다. 구체적으로 주차장, 공장 옥상 등 유휴부지에 태양광 발전 설비를 설치하는 사업을 하는 기업으로 한진, BGF리테일, HL만도, 계룡건설산업, 롯데칠성음료, 하림, 호텔롯데 등 7곳이 있다. 한국가스공사,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 한화토탈에너지스, 대성산업 등 5곳은 수소 에너지 생산과 인프라 구축 사업에 진출했다.
AI 빅데이터 사업목적을 추가해 영위하는 기업 중 여신금융사는 신한카드, 하나카드, 삼성카드 등 7곳으로 조사됐다. 여신금융사 외에 SK텔레콤과 코스맥스가 AI를 활용한 신사업에 투자하고 있다. SK텔레콤은 동물병원 엑스레이 촬영과 영상진단 사업에 진출했으며 코스맥스는 AI 추천시스템을 활용한 초개인화 뷰티 플랫폼을 운영 중이다.
친환경 사업목적 추가는 SK에코플랜트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이 회사는 폐수처리 관리와 폐수처리 시공, 탄소 포집, 에너지 관리 시스템 사업 등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효성티앤씨, SK지오센트릭, 현대엔지니어링, 하림 등도 대표적인 친환경 신사업 영위 기업으로 꼽혔다. 신규 사업목적 추가가 가장 많았던 기업은 대한제분이었는데 최근 5년간 43개의 신규 사업목적을 추가했다. 그러나 이중 영위하는 사업이 14개에 불과했다. 반면 SK에코플랜트는 추가한 신규 사업 목적이 19개인데 모두 실제 운영하고 있다.
이번 조사는 2018년에서 2023년 설립된 기업과 기간 내 사업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은 기업은 제외했다. 합병으로 인해 추가된 목적사업도 제외했으며 수정·개정된 목적사업은 고려하지 않았다. 신규 중 사업에서 파생된 사업목적의 경우는 주요 사업과 같은 카테고리로 묶었다. 사업분류는 창조경제혁신센터의 ‘4차 산업혁명 15대 핵심기술 분야’를 참고했다고 CEO스코어는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