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이 가벼운 '거부권'…이번엔 하와이서 전결
윤, 채해병 특검법 또 거부…15번째 거부권
삼권분립 있으나마나…마구잡이 거부권 행사
한덕수 '방패막이' 삼아 '장막' 뒤 전자 결재
거부권 시한 남았는데 숙고 없는 권한 행사
김건희 의혹까지 제기됐는데도 사적 남용
국민의힘 전당대회 이후 재의 재의결 전망
정청래 "거부하면 될 때까지 특검법 발의"
미국 순방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9일 휴양지인 하와이에서 '채해병 특검법'을 전자결재로 거부권 행사했다. 대통령실 대변인실은 이날 기자들에 문자를 보내 "윤석열 대통령은 오늘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순직 해병 특검법 재의요구안'을 재가했다"고 밝혔다. 이번 거부권은 채해병 특검법에 대해서만 두 번째 행사되는 것이며,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5번째 행사되는 거부권이다. 윤 대통령은 독재자 이승만(45회)을 제외하면 대한민국 76년 헌정사에서 가장 많은 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이다.
대통령실 대변인실은 특히 윤 대통령의 재가 사실을 알리면서 "어제 발표된 경찰 수사 결과로, 실체적 진실과 책임소재가 밝혀진 상황에서 야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순직 해병 특검법은 이제 철회돼야 한다"고 했다. 전날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에 대한 경찰의 불송치 결정을 두고 특별법 철회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불송치 결정을 내린 경북경찰청도 수사외압의 대상이고, 그 외압의 중심에 대통령실이 있다. 수사대상인 대통령실이 법안 철회 주장을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또 경찰이 전날 내린 판단은 채 해병 순직사건만 해당된다. 수사외압까지 사건 전체의 진상이 밝혀진 것마냥 '언론 플레이'하는 것은 국민 기만이다. 아울러 경찰은 '구명 로비' 의혹이 있는 임 전 사단장을 제외하고, 박정훈 해병대 전 수사단장이 지난해 업무상과실치사로 이첩하려 했던 해병대 간부 대부분을 검찰 송치했다. 박 전 단장의 당초 수사 방향이 실체적 진실에 가까웠다는 의미다. 따라서 박 대령이 밝힌 수사외압에 대한 진실도 검증할 이유가 더욱 명확해졌다. 그런데도 마치 왜곡됐다는 듯 대통령실이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심각하다.
윤 대통령의 이번 거부권 행사 자체도 이전 거부권 행사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윤 대통령은 그동안 10·29 이태원 참사 특별법, 채해병 특검법 등 자신에게 불리한 법안에 절대 나서지 않았다. 한덕수 국무총리를 '총알받이' '방패막이'로 앞세우고 본인은 '장막' 뒤에 숨었다. 이날도 한 총리가 거부권을 '건의'하고 대통령이 뒤에서 재가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책임을 분산했다. 아울러 대통령은 비난 여론을 최소화하려는 듯, △경찰의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불송치 결정 이후 △해외 휴양지에서 △전자결재 방식을 통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은 해외에 있는 대통령을 대신해 A4 9쪽 분량의 보도자료를 내고 브리핑을 자처하며 특검법이 '위헌'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거부권을 결정하는 태도 역시 이전 문제를 그대로 답습했다. 대통령의 거부권은 민주주의 원칙인 삼권분립을 훼손하는 만큼 최대한 신중해야 하지만, 윤 대통령에게 그러한 숙고는 없어 보인다. 사실상 '반자동' 거부권 행사다. 채해병 특검법은 지난 4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5일 정부(법제처)로 이송됐다. 대통령의 거부권은 법안의 정부 이송 후 15일 이내에 행사가 가능하므로 재의 요구 기한은 오는 20일까지다. 미국 순방 이후 처리해도 될 만큼 기한이 남아 있음에도 정부 이송 나흘 만에 해외 휴양지에서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숙고 없는 거부권 남용이라고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야당을 자극하기 위한 '보여주기'로도 보인다. 법무부 장관은 특검법이 통과되기도 전인 지난 2일 국회 본회의에서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건의할 것이라고 대놓고 말했었다.
무엇보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거부권이 사적 남용된다는 점이다. 최근 대통령실의 수사외압을 두고 대통령 본인뿐 아니라 부인 김건희 씨의 '임성근 구명로비설'까지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 자신이나 가족, 측근의 범죄와 연루된 거부권은 사용해서도 안되고 만약 사용하더라도 최대한 신중해야 하지만, 이에 대한 고려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같은 법안에 대해 두 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로도 보인다. 윤 대통령은 이전에도 김건희 특검법을 거부해 가족 비리 수사를 막은 최초의 대통령으로 이름을 올렸었다. 계속되는 거부권의 사적 남용은 국민들의 저항을 부를 수밖에 없다. 채해병 순직사건 수사외압, 김건희 비리 등을 탄핵 사유로 적시한 대통령 탄핵 소추안 청원도 서명 인원이 130만 명을 넘어섰다.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오전 원내대책회의에서 "공정과 상식을 무너트린 대통령과 정부, 집권여당에 대한 민심이 그만큼 흉흉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몰락의 길로 가는 일만 남는다"며 "특검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르면 오늘 15번째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는 소문이 틀리기를 바란다"며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사유화하고 자신의 범죄 의혹을 덮기 위해 남용했다는 비판만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해병대원 특검법은 흥정의 대상도 아니고 정쟁의 대상은 더더욱 아니다. 정의의 문제이고, 상식과 순리의 문제"라며 "정의를 버리고 상식과 순리에 역행하지 마라"고 경고했다.
정치권에선 국회의 재의결 기한이 없는 만큼 국민의힘 전당대회 이후 채해병 특검법 재의결을 할 것이란 전망이 높다. 당초 민주당은 채 해병 1주기인 19일 전후로 의결을 하려 했으나 국민의힘 이탈표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당권 주자인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대법원장이 추천하는 특검법을 제안한 만큼 여당 분열 등 정치 상황을 지켜본 뒤 결정해도 늦기 않기 때문이다. 대신 야당은 채 해병 1주기인 19일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탄핵 청문회를 열고, 탄핵 사유인 채 해병 순직사건 수사외압에 대해 집중 추궁할 예정이다. 계속해서 여론을 환기하겠단 방침이다. 정청래 법사위원장은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과 인터뷰에서 채해병 특검법과 관련, "거부하면 (통과)될 때까지 계속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