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권을 거부하다! 정치다운 정치를 위하여!

사례 둘: 포드 정보공개법, 레이건 남아공 제재법

2024-06-20     김평호 미국 톺아보기
김평호 저술가·전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거부권이 우리 사회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는 형국이다. 대통령 윤석열의 거부권 통치 때문이다. 거부권을 뜻하는 ‘비토 veto’는 본래 라틴어로 ‘나는 반대한다’라는 뜻이다. 25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통치제도로 로마 공화정에서 비롯한다. 왕정을 폐기하고 들어선만큼 공화국 로마 통치구조의 기본 원칙은 권력분립이었다. 민회와 민회에서 선출한 집정관과 호민관, 그리고 원로원으로 통치 기구를 나눴고, 집정관과 호민관에게는 거부권을 부여했다. 예를 들어 호민관은 로마 시민의 대표로 집정관이나 상원의 결정을 거부, 무효화할 수 있었다. 권력분립이 실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미국은 권력분립, 견제와 균형 같은 공화정 로마의 통치 원리를 헌법에 그대로 새겨 넣었다. 거부권도 그중 하나다. 국가기관의 자의적 권력 행사를 막고자 하는 거부권 자체에는 죄가 없다. 죄는 거부권 행사의 이면에 숨어 있는 사악한 의도와 행태에 있다. 달리 말하면 거부권은 민주주의를 배척하는 합법적이면서도 아주 효과적인(?) 정치도구로 악용된다. 이 때문에 거부권 행사의 사유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한다. 정당하고 합리적인 사유가 없다면 대통령의 거부권은 의회가 더욱 강력히 거부해야 마땅하다. 그렇지 못하다면, 정치는 물론 나아가 그 나라의 민주주의도 크게 망가진 것이다.

사실 의회의 입법행위를 제어하는 대통령의 거부권은 매우 강력한 헌법 장치다. 미국의 경우 건국 이후 오늘날까지 대통령의 거부권을 넘어선 의회의 재의결 비율은 고작 7%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거부권을 거부한 사례는 매우 큰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

거부권을 거부한 사례 1 — 포드 대통령과 정보공개법

1974년 8월 9일, 닉슨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거짓말로 무마하려다 들통이 나고 탄핵의 위기에 몰리자, 스스로 사임한 것. 경과는 이렇다. 72년 10월 <워싱턴 포스트>의 특종 보도로 드러난 사건의 수사를 위해 73년 5월 특별검사가 임명됐다. 특검의 칼끝은 대통령을 향했다. 그러자 대통령이 법무장관에게 특검 해고 명령을 하달한다. 장관은 거부하고 사퇴한다. 닉슨은 차관에게 명령한다. 이번엔 차관이 거부하고 사퇴한다. 세 번째 해고 명령은 기어이 이루어졌다. 일명 ‘토요일의 학살(Saturday night massacre)’ 사태다. 이 사태는 대통령 탄핵의 문을 연 계기가 됐다.

 

‘토요일 학살’ 사태를 다룬 73년 10월 21일 자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 머리기사

닉슨은 탄핵의 불명예 대신 자진사퇴를 택한다. 이후 가장 시급한 과제는 정부에 대한 국민 신뢰를 회복하는 것. 핵심 과제는 투명한 정부였고, 이는 자연스럽게 ‘정보 자유법(Freedom of information act 약칭 FOIA)’, 곧 정보공개법의 강화로 이어졌다. 탄핵 절차와 별도로 상하 양원은 법안 개정논의에 들어갔다. 74년 3월부터 그해 여름, 닉슨이 사임하고 부통령 포드가 이어받은 새 정부가 시작할 무렵까지. 여러 차례 논의와 표결을 거쳐 정보공개 원칙을 더욱 강화한 법안은 완성됐으나, 포드 정부는 애초의 입장을 번복하고 거부권을 행사했다.

 

사진 왼쪽부터 D. 럼스펠드 대통령 비서실장. 포드 대통령. 부실장 D. 체니.

거부를 주도한 인물은 비서실장과 부실장—훗날 부시 정부에서 국방장관과 부통령으로 이라크 전쟁을 진두지휘한 악명높은 네오콘의 주역들—과 당시 법무부 수석 변호사로 레이건이 연방 대법관으로 임명한 A. 스칼리아. 역설적인 것은 1966년 최초로 정보공개법이 제정될 때, 당시 의원이던 포드 대통령은 찬성표를 던졌고, 럼스펠드는 아예 당시 법안의 공동발의자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되고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자, 이들은 법안에 대한 입장을 뒤집었다. 이들의 논리는 상투적이었다. 하나는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것. 둘은 위헌 소지가 있다는 것. 그러면서 이들은 CIA, FBI, 그리고 법무부의 강경파 간부들을 접촉, 여러 논리와 방법으로 의원들을 설득하거나 압박하도록 이끌었다. 국방부, 재무부 등 정부 다른 부처들도 앞다투어 법안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이처럼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자, 의회는 곧바로 재의결에 들어간다. 11월, 하원은 371대 31, 상원은 65대 27. 압도적 가결로 거부권을 거부한다. 특히 공화당 의원들(하원 129명, 상원 15명)의 참여가 결정적이었다. 의원들의 핵심 논리는 ‘알 권리가 없는 곳에 사상 표현의 자유는 무의미하다’라는 원론부터, ‘워터게이트라는 비극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관료적 비밀주의가 투명한 정부를 가로막을 수 없다’라는 교훈이었다.

거부권을 거부한 사례 2 — 레이건과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제재법

1948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의 소수 백인 정권은 흑백 차별과 인종 분리를 제도화했다. 아파르트헤이트다. 남아공 언어로 ‘분리’를 뜻하는 아파르트헤이트는 인종 간 혼인금지법을 시작으로 인종별 거주지역 분리법, 이동, 직업 선택, 교육에 대한 제한, 그리고 무엇보다 인구의 80%에 이르는 흑인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았던 것. 차별과 배제, 분리에 대한 흑인의 저항은 폭력적으로 진압됐다. 남아공 흑인의 처지는 식민제국의 노예와 다르지 않았다.

 

백인 전용 장소임을 알리는 아파르트헤이트 표지판. 케이프타운 부근.

60년대 미국을 달구었던 흑인민권운동은 그 연장선상에서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에 눈길을 돌렸다. 1972년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위한 법 제정 운동이 시작됐다. 69년에 만들어진 하원의 흑인의원모임(Congressional Black Caucus. 약칭 CBC)이 주역이었다. 1974년 유엔도 총회의 결의로 남아공의 회원 자격을 정지했다. 1986년 6월, 14년여에 걸친 CBC의 끈질긴 노력으로 남아공 제재법은 의회를 통과했다. 법은 남아공과의 교역 제한, 상품 수입 금지, 금융제재, 정부와 기업의 신규 투자금지 등을 담았다. 하원은 ‘함성 투표(voice vote)—참석 의원들의 함성으로 찬반을 표결하는 방식—로, 상원은 84-14라는 압도적 표차로 가결했다.

레이건은 거부권을 내밀었다. 그즈음 그는 고르바초프와 세기의 회담을 이어가고 있었다. ‘회담에 나서는 내 체면을 봐서라도 거부권을 인정해 달라’고 읍소하다시피 사정했다. 또 한편으론 경제전쟁에 해당하는 제재보다 건설적 개입이 더 효과적이라며 행정명령으로 문제를 풀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아공 외무장관에게 로비 전술을 귀띔하여 주었다. 극우 반공주의자인 상원의원 J. 헬름스는 ‘남아공 정부를 압박하는 것은 혁명적 변화를 가져와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하고 결국 폭정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격렬히 반대했다.

그러나 그의 행정명령은 솜방망이 수준이었다. 남아공 장관은 로비가 아니라 ‘우리는 미국 농산물 수입을 금지할 것, 그러면 피해는 오히려 미국 농민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협박(?)했다. 남아공 저항운동의 대표이자 정신적 지주인 D. 투투 주교는 ‘레이건은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분노했다. 의원들은 ‘(제재법이) 도덕적 외교를 추진하라는 미국과 미국민의 의지를 보여준 것’임을 강조했다.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 B. 돌은 ‘미국 정부는 우리가 억압자의 편인지, 피억압자의 편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의회는 재의결 절차에 들어갔다. 결과는 하원 313(민주 232, 공화 81)-83, 상원에서 78(민주 47, 공화 31)-21로 재의결, 대통령의 거부권을 거부했다.

 

레이건 거부권 하원 재의결 관련 기사.

재의결 직후 레이건은 이렇게 말했다. “이 법으로 오히려 남아공 정부가 더 폭력적이고 억압적 행태를 재연하지 않을까 우려한다. 우리 정부는 법을 집행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물론 레이건의 희망(?)은 어그러졌다. 이미 독자적 제재에 들어갔던 유럽 국가들은 재의결 이후 제재를 더욱 강화했다. 인도, 캐나다, 호주, 그리고 일본도 미국과 같은 제재에 들어갔다. 남아공 경제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 후 4년여, 1990년 남아공은 감옥에 가뒀던 넬슨 만델라를 27년 만에 석방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그렇게 종식을 고했다.

미국에서 정치다운 정치에 대한 기대는 추억으로만 남은 것인가

의회가 대통령의 거부권을 넘어선다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정치적 과정이다. 집권당(의 일부)도 야당과 힘을 합하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두 사례에서 공화당은 집권당인 탓에 숫자는 적었지만. 참여 의원의 적극성만큼은 야당에 뒤지지 않았다. 말할 나위 없이 거부권을 거부한 사례가 모두 긍정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클린턴 시절인 1995년, 공화·민주 양당은 주주 대표·집단소송을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소송의 남발이 가져오는 기업 경영의 어려움을 이유로 경영진에 대한 소송요건을 까다롭게 만든 내용이다. 클린턴은 금융 탈규제의 선도자이지만 이 법만큼은 거부했다. 양당은 거부권에 맞서 법안을 재의결했다. 기업과 증권 및 회계업체 등,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이 투자자, 소비자, 연기금 기관, 규제당국을 제친 셈이다.

정치는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개인과 사회 공동체의 노력이다. 따라서 현실의 정치에서는 목표를 향한 노력과 그에 대한 반동이 중첩하고 순환한다. 사회의 평등한 발전, 투명한 정부 운영, 정의로운 외교를 거부하는 행태는 반동이다. 그런 반동을 거부한 70년대, 80년대 양당의 정치력은 정치다운 정치를 위해 노력한 모범사례다. 이제 그런 정치는 추억일 뿐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신보수(네오콘)-신자유주의 체제가 지배하면서, 반동을 제어할 수 있었던 이념적(예: 개혁적 리버럴리즘), 법제적(예: 금융, 조세, 환경, 노동 규제), 사회적(예: 엘리트 집단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규범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금 국내적으로는 금권정치(예: 로비, 빈부격차)에, 국제적으로는 패권정치(예: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 전쟁)에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 시위 대학생은 잡혀가고, 불온한 자는 쫓겨나며, 비판은 위축되는 감시사회(예: 반이스라엘 금지법)의 길을 가고 있다. 다가오는 것은 내부의 갈등과 분열, 그리고 자신과 세계가 맞서는 대립과 충돌의 국면이다.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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