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주주 횡포 문제 묻자 “상속세 많은 탓” 윤의 동문서답

“상속세 때문에 서민·중산층 피해” 황당 논리

소액 주주 손실 끼치는 기업 결정 비판하자

“대주주 상속세 할증이 한국 증시 발전 막아”

초부자 감세 마지막 퍼즐은 상속세 완화?

2024-01-18     장박원 에디터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지난 주말 전 세계 부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외신이 화제가 됐다. 글로벌 화학 기업 바스프 창업자 가문 상속인인 마를레네 엥겔호른이 자신이 물려받은 2500만 유로(약 360억 원)를 기부하려고 하는데 사용처를 시민들이 직접 결정해 달라고 했다는 보도였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단순 기부 대신 시민 토론을 거쳐 사용처를 결정하려고 하는 이유를 묻자 엥겔호른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기부처를 결정하는 것조차 부당하게 얻은 특권이라는 생각한다. 부유한 상속인들이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나 단체에 돈을 기부하거나 재단을 만드는 것 역시 상속받은 부에서 나온 권력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17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4.1.17. 연합뉴스

많은 이의 감흥을 불러일으킨 이 뉴스를 접하지 못했는지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7일 ‘부유한 상속인’의 세금을 깎아줘야 한다는 정반대 주장을 펼쳤다. 그것도 과도한 상속세가 중산층과 서민에게 피해를 준다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웠다. 한국은 상속세가 많아 가업 승계가 어렵고 이것이 기업 가치를 떨어뜨려 주식시장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날 한국거래소에서 개최된 민생토론회에서 나왔다. 인기 경제 유튜브를 운영하는 전석재 씨는 “기업들이 대주주를 위한 결정을 내리면서 소액 주주의 손실을 감수하도록 하는 결정을 내리곤 하는 사례를 많이 봤다. 이것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배경이 되고 있다”며 대통령 의견을 물었다. 이는 지난해 11월 미국의 경제전문 방송 CNBC가 한국 재벌기업의 지배구조(거버넌스)와 한국 증시의 단점을 집중적으로 파헤치며 제기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답변은 당연히 대기업집단(재벌기업) 대주주인 총수 일가의 일감몰아주기 등 사익편취를 개선하는 방안에 관한 것이어야 했다. 대기업집단 소속 상장사들에 피해를 주는 원인은 대부분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 과정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질문자를 비롯한 참석자들은 공정거래법과 상법 등 관련 부분을 개선할 것이라는 답변이 나오길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이 질문을 세제와 연관시키며 느닷없이 ‘대주주 상속세 할증’ 문제를 거론했다. “상속세가 과도한 할증 과세라고 하는 데 대해 국민적인 공감대가 필요하다. 소액 주주는 주가가 올라야 이득을 보지만 대주주는 주가가 너무 올라가면 상속세를 어마어마하게 물게 된다. 재벌과 대기업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상장 기업들이 가업을 승계한다든가 이런 경우에 주가가 올라가게 되면 가업 승계는 불가능해진다. 결국 주식시장 발전을 저해하는 과도한 세제는 우리 중산층과 서민에게 피해를 준다라고 하는 것을 국민께서 다 같이 인식하고 개혁하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참석자들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동문서답’이었을 것이다. 소액 주주 권리 보호를 위해 대주주 횡포를 견제할 대책을 요구하는 질문에 대주주 상속세 할증을 없애야 하고 이를 위해선 대통령령으로는 할 수 없으니 국회에서 법을 바꿀 수 있도록 국민이 도와달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질문의 맥락과 상관없이 그동안 상속세 경감 또는 폐지를 줄기차게 요구했던 재계와 부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셈이다.

 

  100억 원 초과 재산상속 현황. 연합뉴스

이 같은 맥락을 떠나 상속세가 주식시장의 발전을 막고 서민과 중산층 피해를 준다는 주장은 억지에 가깝다. 일단 상속세 부담을 줄여주는 것은 서민·중산층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상속세는 이런저런 조건을 충족하면 기본 공제를 해준다. 그러다 보니 실제 과세 대상은 많지 않다. 연합뉴스가 분석한 통계청 자료를 보면 지난 2022년 상속세 납부 인원은 1만9506명에 불과했다. 지난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연평균 사망자 수가 30만 5913명였으니 전체 사망자의 6.4%만 상속세를 낸 것이다.

대주주가 상속받으면 시가로 측정된 주식 평가액의 20%를 더 내는 할증하는 제도가 있다. 하지만 이 제도 때문에 가업 승계가 어렵고 이는 기업 가치 하락으로 이어져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이 된다는 주장도 따져봐야 한다. 승계는 기업 가치를 결정하는 여러 요인 중 하나일 뿐이다.

총수 일가가 승계하지 않으면 기업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는 말도 100% 맞는 말이 아니다. 전문 경영인이 승계해 성공한 기업도 적지 않다. 결국 재계와 윤 대통령 주장은 상속세 경감을 노린 궤변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대주주가 상속세를 덜 내려고 세금 납부 시점에 맞춰 일부러 악재가 되는 공시를 낼 수 있다. 이때 소액 투자자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대주주의 꼼수가 상속세 할증 제도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는 될 수 없다.

 

상속 (PG)[장현경 제작] 일러스트

상속세야말로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명기한 헌법 119조 2항을 가장 잘 반영한 세금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와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 등 엄청난 재산을 보유한 부자들조차 더 많은 상속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부의 과도한 편중과 양극화가 그들을 부자로 만들어준 자본주의를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속세율을 낮추고 대주주 할증을 없애는 세제 개편은 법인세와 주식 양도세, 금융투자소득세를 감면하거나 폐지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적정한 소득 분배를 통해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소하는 최후의 보루를 허무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물가·고금리로 많은 국민은 실질임금이 줄어 어려움을 겪고 있고 소득 격차도 심해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개호 정책위의장은 18일 “윤 대통령이 상속세 완화까지 시사한 것은 초부자 감세 시리즈의 마지막 퍼즐로 생각된다”며 “부자들 세금을 줄인 만큼 평범한 월급쟁이들이 근로소득을 더 내라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도 빚으로 빚을 갚으면서 버티는 자영업자들에게 세금을 더 내라는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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