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미일동맹 동남아시아 쟁탈전…한국도 가담

일본-ASEAN 특별정상회의 개최 배경

ASEAN과의 교역액, 중국이 일본 압도하자

안전보장 핵심의제로…군사지원 통로 열어

2023-12-21     한승동 에디터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왼쪽)가 18일 도쿄 게이단렌 회관에서 열린 일본-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우호·협력 50주년 기념 오찬에서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건배하고 있다. 일본과 아세안 회원국들은 전날 열린 특별 정상회의에서 '우호 협력에 관한 공동 비전 성명'과 실시계획을 채택했다. 2023.12.18. EPA 연합뉴스

최근 10년간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10개 국에 대한 일본의 직접투자(FDI)는 총 1980억 달러였다. 이는 미국의 2090억 달러에 이은 두번째 규모다. 중국은 1060억 달러.

이것만 보면 지금 이 지역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미일동맹과 중국 간의 힘 겨루기에서 중국이 미일동맹에 크게 압도되고 있는 듯 보일 수 있다.

ASEAN과의 교역액, 중국이 일본 압도

하지만 교역(무역) 규모의 변화 추이를 보면 전혀 다른 상이 그려진다.

2010년의 중국-ASEAN(동남아국가연합) 교역액은 2360억 달러, 일본-ASEAN 교역액은 2190억 달러로 비등했다. 그런데 12년 뒤인 2022년엔 중국-ASEAN 교역액이 7220억 달러였는데 비해 일본-ASEAN 교역액은 2690억 달러로, 중국 교역액이 일본의 약 3배나 됐다.(<이코노미스트> 12월 14일) 일본은 거의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데 비해 중국은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형국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앞줄 가운데)가 18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열리는 '아시아 제로 에미션 공동체'(AZEC) 정상회의에 앞서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정상 등 참석자들과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이 회의는 전날 열린 일본-아세안 특별 정상회의를 계기로 개최됐다. 2023.12.18. AFP 연합뉴스

일본-ASEAN 특별정상회의 개최 배경

지난 16~18일 일본정부 주도로 도쿄에서 일본과 ASEAN의 우호 50주년 기념 특별정상회의가 열린 것은 이런 변화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이 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지난 12일 시진핑 중국 주석이 하노이를 찾아가 응우옌 푸쫑 베트남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를 만난 것, 그 전인 11월에 기시다 총리가 필리핀으로, 같은 달에 보반트 엉 베트남 국가주석이 도쿄로 간 것도 이런 급격한 정세(세력)변화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더 멀리는 9월에 얼마전까지도 동남아에 무관심한 듯 보였던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한 것도 마찬가지다.

‘일본인들의 낙원’이었던 동남아

20세기까지만 해도 동남아시아는 경제적으로 일본의 텃밭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73년 석유 파동(오일 쇼크), 그리고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 엔이 초강세가 되면서 일본 자본과 기업들이 동남아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고, 양자 간의 엄청난 경제력, 통화가치의 차이 때문에 동남아를 여행하는 일본인들은 그들의 기준에서는 몇 푼 들이지 않고도 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다.

1988년에 방콕 후알람퐁 중앙역 주변의 3인용 방 하루 숙박비가 약 600엔이었고 역 앞 식당의 볶음밥이 약 30엔, 콜라는 10엔이었다. 그 10년 뒤인 1998년 아시아 통화위기가 덮쳤던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근교 하숙집 방세가 약 4천 엔이었다. 그야말로 “일본인들에게 동남아는 낙원”이었다.

그러나 그 20년 뒤 그곳을 찾아간 일본인들에게 동남아가 일본의 낙원이던 시대는 끝나 있었다. (<아사히신문> 12월 16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오른쪽)가 18일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훈 마넷 캄보디아 총리에게 수교 70주년 기념 은화를 선물하며 악수하고 있다. 이날 만남은 일본과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우호·협력 50주년을 맞아 도쿄에서 개최된 특별 정상회의를 계기로 성사됐다. 2023.12.18. AFP 연합뉴스

21세기 들어 흔들리는 일본

일본은 별로 바뀌지 않았지만 동남아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국내총생산(GDP) 변화 추이를 봐도 일본은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뒤처지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같은 기사에서 일본과 ASEAN의 GDP를 비교했다. 2000년도에 ASEAN 전체 GDP(인플레 등을 감안해 조정한 실질[real terms] 기준) 규모는 일본 GDP의 약 30%였다. 그런데 지난해 ASEAN은 일본의 72%까지 따라붙었다.

동남아에서 거의 독점적이었던 일본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여기에 한국이 적극적인 동남아 지원국으로서 새로운 경쟁자로 등장했고 태국과 인도네시아도 예전의 일방적인 수원국이 아니라 역내 지원국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했다.

 

18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ASEAN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위쪽)이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와 담소하고 있다. 2023.12.18. AP 연합뉴스

중국 대 한미일

<아사히>는 20일 싱가포르 외무차관을 지낸 빌라하리 카우시칸과의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다. “(동남아) 지역의 안정을 위해 한미일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한 카우시칸은 “일본의 ODA(정부 개발원조) 외교의 파워가 약해지고 있다”며 던진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대단히 모욕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질문이다. ASEAN의 모든 국가들이 수령한 기부(원조)만을 토대로 관계를 평가하는 거지로 상정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국의 국익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토대로 (자주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한국이 ASEAN에 대한 무기수출을 늘리고 있는데, 일본은 방위장비 이전 3원칙 완화가 난항을 겪고 있다는 지적에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ASEAN의 중요한 경제 파트너이고, 점점 중요한 전략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무기수출은 이 새로운 역할의 한 징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일본은 무기수출을 자유화해야 한다.”

카우시칸 전 차관은 동남아에 대한 중국의 최근 급속한 영향력 증대를 걱정하면서 미일동맹이 이에 대한 균형(대항)세력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고, 한국도 미일동맹에 가담해서 중국 견제에 나서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믿음의 소유자로 보인다. 이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 등 일본 우파 집권세력의 일반적인 상황인식이기도 하다. 윤석열 정부는 그것을 기회로 여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뒤에는 미국이 있다.

 

 18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ASEAN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한 리센룽 싱가포르 총리가 참석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2023.12.18. AP 연합뉴스

후쿠다 독트린

ASEAN 10국 가운데 2021년 2월 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미얀마를 제외하고, 대신 ASEAN의 새로운 멤버가 될 동티모르를 넣어 일본까지 11개 국 정상들이 모인 우호 50주년 기념 특별정상회의는 경제협력과 인적 교류 확대, 기후위기 대응,  안전보장 분야의 제휴 강화 등을 논의했다. 우호 50주년이란,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대까지의 고도성장으로 경제대국이 된 일본이 1973년 오일 쇼크로 경제적 난관에 봉착하자 동남아와의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한 해다. 그 전 해인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중국 전격 방문이 가져다 준 충격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 다음해인 1974년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동남아 5개국을 순방할 때 ‘반일 폭동’이 일어났고, 1977년 후쿠다 다케오 총리 동남아 순방 때도 반일 폭동이 일어났다.

당시 압도적 경제력을 지닌 일본의 동남아 진출을 현지에서는 ‘제국주의적 경제 침략’이라며 반발했다. 베트남에서 물러난 미국 대신 재무장한 일본이 다시 동남아를 군사적으로 지배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도 작용했다. 일본의 합성고무가 동남아 지역 주요 수출품이었던 생고무 산업을 위협하는데 대한 반감도 있었다.

동남아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다나카 5원칙’이 발표됐고, 그것은 나중에 ‘후쿠다 독트린’(동남아시아 외교 3원칙)으로 정리된다. 그 내용은 일본이 “군사대국이 되지 않을 것”이고, “상호신뢰를 토대로 한 파트너십을 구축”할 것이며, “대등한 파트너로서 ASEAN의 단결과 활력을 강화하는데 적극적으로 공헌”하겠다는 것이었다.

1990년대까지 세계 최대의 ODA 지원국이었던 일본 자본의 상당 부분이 동남아로 밀려 들어가 그 지역 경제 사회적 인프라 구축에 기여했다. ‘신뢰’와 ‘마음’, ‘대등’을 표방한 일본은 20세기까지 동남아에서 경제적으로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누렸다.

 

18일 일본-ASEAN 특별정상회의와 함께 열린 아시아 탄소제로(AZEC) 지원 공동성명 발표회 뒤에 기시다 일본 총리(오른쪽에서 3번째),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4번째) 등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2023.12.18. EPA 연합뉴스

중국에 대한 대항틀 만들기

우호 50주년 기념이라 했지만, 기념해야 할 대단한 무엇이 없는 모호한 설정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된 정세 속에서 일본이 ASEAN을 불러들일 필요가 있었고, 50주년은 그것을 위해 고안해 낸 명분 같은 것이었다.

그 목적은 일본의 동남아 역내 지반을 다시 다져 이 지역에서 중국의 대두를 억제하고 대항하는 것이다.

안전보장을 핵심의제로 삼은 이번 회의에서 일본은 중국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과도한 영해 설정과 무력까지 동원한 실력행사로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주요국들과 갈등,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충분히 활용했다. 중국을 공동의 ‘적’으로 설정함으로써 일본과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결속해 대항하는 틀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었다.

 

17일 도쿄 아자부다이에서 열린 일본-ASEAN 특별정상회의 축하행사장에 모인 ASEAN 회원국 학생들. 2023.12.17. AFP 연합뉴스

새로운 군사지원 통로 OSA

기시다 총리는 전체회의와 만찬회에 앞서 각국 정상들을 차례차례 개별적으로 만나 일본의 ‘정부안전보장능력강화지원’(OSA)을 통해 함정이나 감시용 드론 등 안보군사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OSA는 지금까지의 정부개발원조(ODA)에서는 제외했던 군사 지원을 할 수 있게 만든 새로운 지원틀인데, 지난 4월에 도입했다. 이를 통해 필리핀, 방글라데시를 지원해 온 일본정부는 이번엔 말레이시아를 대상에 추가했다. ASEAN 의장국인 인도네시아의 조코 위도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는 90억 엔짜리 대형 순시선 한 척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기시다 정부가 방위장비 이전(수출) 3원칙 개정작업을 벌여 온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동남아로의 무기 수출 확대일 가능성이 높다.

한미일 군사동맹체제

한국과 일본 우파 정권은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에서 그 중요성이 점점 더 크게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과 러시아를 동시에 대적해야 할 미국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까지 불거진 상황에서 단독 대처가 어려워지면서 동맹국들을 활용한 대응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동남아를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일본, 한국에게 요구되는 역할도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한일간의 과거사 갈등을 봉합하도록 압박했다. 이것을 자발적으로 수용한 한국과 일본 우파 정권은 사실상의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체제까지 거침없이 밀고 나가, 미국이 의도하고 있는 동아시아 신냉전체제를 완성해 갈 태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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