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정부 서민·취약층 예산 확대 “아랫돌 빼 윗돌 괴는 꼴”
내년도 예산안 시정 연설 모순 가득
민생 예산 늘린다며 세출은 확 줄여
R&D 예산 전용해 취약층 지원 확대
과학계 “국가 미래 포기한 황당 발상”
연금·노동 개혁도 말 따로 행동 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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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국회에서 내년도 정부 예산안 시정 연설을 했다. 연설 내내 경제와 민생을 걱정했다. ‘경제’와 ‘민생’이라는 단어를 각각 23회와 9회나 반복할 정도였다. 특히 서민과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이 절실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을 줄여서라도 취약계층을 지원하겠다며 사용처까지 하나하나 열거했다. 미래세대를 위해 연금과 노동, 교육 등 3개 개혁에 협조해 달라며 국회에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 연설 내용을 자세하게 보면 서로 모순되는 대목이 적지 않다. 건전재정을 명분으로 세출을 대폭 줄이겠다면서 서민과 취약계층을 위해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하겠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1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 북 카페에서 주재한 비상경제민생회에서도 똑같은 말을 했다. 어려운 서민들을 두툼하게 지원해주는 쪽으로 예산을 재배치했다는 것이다. 긴축 재정을 해야 하는 이유로는 고물가를 꼽았다. 물가가 오르면 서민과 취약계층의 삶이 힘들어진다고 강조했다. 재정을 확장하면 물가를 자극할 수 있으니 긴축 재정을 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긴축 재정을 하면서 서민 지원을 늘리는 일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확장 재정과 물가를 연계한 것도 침소봉대한 측면이 있다. 물가는 재정 외에 공공요금과 원자재 가격 상승, 기준금리 등 다른 요인에 더 영향을 받는다. 지금의 고물가 상황은 초저금리가 오랜 기간 지속되며 시중에 돈이 많이 풀린 데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국제 에너지 가격이 급등 탓이 크다.
윤 대통령이 시정 연설에서 구체적으로 밝힌 사회적 약자와 취약계층 지원은 △생계급여 지급액 인상 △장애인 1대1 전담 서비스 제공 △자립 준비 청년 수당 인상과 저소득 가구 청년 대학 등록금 지원 △소상공인을 위한 저리 융자 등이다. 모두 지원이 필요한 분야인 것은 맞는다. 문제는 이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서민과 취약계층을 위한 다른 예산을 삭감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에서 서민 주거예산과 고용유지 지원금, 일자리 안정 기금 등 잘 드러나지 않는 예산을 전액 또는 대폭 삭감했다. 장애인과 저소득층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회적기업에 대한 지원을 줄이려는 것도 그중 하나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재정 건전성을 명분으로 세출을 과도하게 줄였기 때문이다. 정부는 내년도 총지출을 2005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인 2.8% 올려 편성했다. 이처럼 재정을 확대하지 않고 서민 예산을 늘리려다 보니 결국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가장 황당한 대목은 “(국가 R&D 예산의) 구조조정을 해서 마련한 3조 4000억 원을 약 300만 명의 사회적 약자와 취약계층을 더 두텁게 지원하는데 배정했다”는 부분이다. 국가의 미래 경쟁력을 높일 R&D 예산을 일회성 복지 비용으로 쓰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예산을 늘리는 건 좋으나 R&D에 투입할 재원을 전용하겠다는 발상은 이해하기 어렵다.
당장 과학계는 미래를 포기하자는 것이냐며 반발하고 있다. R&D 예산을 감축하면 대학원 연구생들의 인건비를 주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윤 대통령이 과학기술계를 카르텔로 몰고 선진국과 비교하면 많지도 않은 R&D 예산마저 삭감하겠다고 하자 해외로 떠나겠다는 연구원도 줄을 잇고 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간사인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린 글에서 “윤 대통령은 과학기술계와 사회적 약자를 이간질하겠다는 것이냐”며 “과학기술 혁신과 복지 증진은 모두 헌법이 부여한 국가의 의무인데 헌법상 의무를 저버린 국가의 무책임을 계층, 집단 간의 싸움을 부추겨 해결하겠다는 건 얄팍한 인식”이라고 비판했다.
연금과 노동, 교육개혁에 대한 대목도 말 잔치로 들릴 뿐이다. 윤 대통령은 연금 개혁과 관련해 “최고 전문가들과 80여 차례 회의를 통해 과학적 근거를 축적했으며 24번의 계층별 심층 인터뷰를 통해 국민 의견을 경청하고 여론조사도 꼼꼼하게 했다”며 “국회가 초당적 논의를 통해 연금 개혁 방안을 법률로 확정할 때까지 지원하겠다”고 했다. 정부가 방대한 자료를 축적했으니 이제 국회가 결정할 일이라는 뜻이다.
정부는 지난달 27일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을 발표하며 수급 개시 연령 조정이나 보험료율, 소득대체율 등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내용을 빠뜨린 방안을 내놓자 ‘맹탕 개혁안’이라고 비판이 쏟아졌다. 이에 윤 대통령은 또 전 정부 탓을 하며 “숫자만 제시하는 것으로 결론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고 강변했다. 윤 대통령이 아무리 우겨도 연금 개혁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수급 연령 조정을 구체적인 숫자로 명시하는 게 핵심이다. 그것을 뺀 채로 국회로 공을 넘기는 것은 개혁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노동 개혁 성과로 꼽은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회계 공시 결정도 윤 대통령 연설과 사실이 전혀 다르다. 양대 노총이 회계 공시에 참여하기로 한 이유는 정부의 노동 정책에 따랐다기보다 조합원의 경제적 불이익을 막기 위한 차원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 노동 개혁은 사실상 후퇴하고 있다. 양대 노조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건설 노조 탄압과 노란봉투법 저지, 중대재해처벌법 확대 시행 연기 같은 반노동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1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윤 대통령 시정 연설에 대해 “재정 건전성에 대한 집착만 더 강해진 것 같고 민생 위기에 대한 실질적 대책 없고, R&D 예산 삭감에 대해서 합리적인 설명보다는 무책임한 변명만 있었던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또 “병사 월급을 올리겠다고 했는데 병사들 복지예산은 1857억 원이나 삭감하겠다고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삼모사의 고사성어를 빗대 “국민을 원숭이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고 질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