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예산 삭감 포기 못한 윤석열…본인 외교 홍보 일색
[대통령 예산안 시정연설] 반성 없는 '마이웨이'
"R&D 구조조정 시급해"…원전 R&D 대폭 확대
오직 원전…기후위기, 탄소중립 등 언급도 전무
외교 홍보 일색…출산·양육 대책 언급은 '한 줄'
역대급 세수 펑크에도 '건전재정' 앵무새 반복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3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며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필요성을 강조하고, 본인의 외교 치적을 홍보하는 데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앞서 정부는 지난 8월 29일 국무회의에서 올해 본예산 대비 2.8% 증가한 656조 9000억 원을 내년도 예산으로 의결했다. 재정통계가 정비된 2005년 이후 최저 증가율이었다.
특히 이번 예산안은 윤 대통령이 지난 6월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뒤, R&D 관련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서 문제가 됐다.
정부가 책정한 내년도 R&D 예산은 25조 9152억 원으로, 올해 예산(31조778억원)보다 16.6% 줄어 학계와 산업계 등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야당도 R&D 원상 복귀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이 같은 비판에도 "R&D예산은 2019년부터 3년간 20조 원 수준에서 30조 원까지 양적으로는 10조 원이나 대폭 증가했으나, 미래 성장동력 창출을 위해 질적인 개선과 지출 구조조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어 "국가 R&D 예산은 민간과 시장에서 연구 개발 투자를 하기 어려운 기초 원천 기술과 차세대 기술 역량을 키우는 데 써야 하는 것"이라며 "첨단 AI(인공지능) 디지털, 바이오, 양자, 우주, 차세대 원자력 등에 대한 R&D 지원을 대폭 확대했다"고 했다.
세계적인 화두인 탄소중립과 관련해 R&D가 30.5% 삭제돼 논란이 되고 있지만, 윤 대통령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저탄소나 탄소중립, 기후위기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차세대 원자력 지원 의지만 피력했다.
정부가 차세대 원전으로 거론하는 소형모듈원자로(SMR)는 지속적으로 안전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한국은 후발주자로 경제성도 담보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는 미국도 SMR의 경제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아울러 중소기업 R&D 예산 삭감도 문제가 되고 있지만, 윤 대통령은 "중소기업들이 자금 여력 부족으로 투자하기 어려운 기술 개발 분야와 인공지능, 머신러닝, 자율주행 등의 딥테크 분야에 대한 R&D 투자도 확대하겠다"며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했다.
윤 대통령은 "R&D 예산은 향후 계속 지원 분야를 발굴하여 지원 규모를 늘릴 것이지만, 일단 이번에 지출 구조조정을 해서 마련된 3조 4천억 원은 약 300만 명의 사회적 약자와 취약계층을 더 두텁게 지원하는 데 배정했다"며, R&D 예산 삭감의 당위성을 재차 설명했다.
또한 그는 "최근, 국가 재정 R&D의 지출 조정 과정에서 제기되는 고용불안 등 우려에 대해서는 정부가 세심하고 꼼꼼하게 챙기고 보완책도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실질적인 대책은 제시되지 않은 '공염불'이었다.
본인 외교홍보 자평에 상당 부분 할애
복합 위기 속에 내년도 경제상황 악화와 민생 파탄이 우려되고 있음에도, 윤 대통령은 7653자(공백 포함)짜리 시정연설에서 본인의 외교 활동을 홍보하는 데 가장 많은 부분(1342자)을 할애했다.
전기차·배터리·반도체 공급망 문제와 직결된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법 대응 실패로 뭇매를 맞았음에도, 윤 대통령은 "올해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안보, 경제, 첨단 기술, 정보, 문화를 망라한 글로벌 포괄 전략 동맹을 구축했다"고 자평했다.
이어 "세계적인 공급망 위기에서 긴밀히 작동하는 한미 경제 안보 협력 메커니즘은 우리의 위기 관리 능력을 더욱 튼튼하게 할 것"이라며 "반도체, AI, 우주와 같은 첨단 분야의 전략 동맹은 우리 기업과 국민들에게 더 많은 기회와 일자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했다.
강제동원 피해자 제3자 변제안, 후쿠시마 핵 폐수 해양투기 용인 등 굴욕적인 대일 외교의 결과물임에도 "한일 양국의 경제협력과 비즈니스가 이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며 호평했다.
그러면서 대일 외교 성과로 "올해 한일 양국을 오간 방문객 수가 역대 최대치인 연간 1000만 명 수준에 근접했다"고 홍보했다. 일본 수출규제 해제, 통화 스와프 재개 등도 성과로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미국과 일본을 설명하는 데 대부분을 할애하고, 인접국인 중국에 대해서는 단 3줄만 언급했다.
지난해부터 대중국 무역적자가 문제가 되고 있지만, 윤 대통령은 "올해 8월부터는 중국으로부터의 단체관광이 재개되어 인적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며 "양국 기업과 국민들이 더 많은 교류의 기회와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할 것"이라고 했다.
각종 예산이 삭감되는 가운데 대통령 순방 비용이 '역대 최대' 규모로 늘어 도마에 올랐지만,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1년 반 동안 93개국과 142회의 정상회담을 했다"면서 순방 횟수를 치적처럼 내세웠다.
이 밖에 지난 중동 순방에 대해 언급하며 "약 107조 원의 수출과 수주성과가 이뤄졌다"고 했지만, 이는 본계약이 아닌 양해각서(MOU)와 투자약속 등을 합한 금액에 불과하다.
연금개혁이 과학적?…저출산 대책 한 줄
본인이 올해 신년사에 밝힌 연금·노동·교육 3대 개혁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숫자도 없는 '맹탕' 연금개혁안이라 비판받는 '국민연금 종합 운용계획안'을 두고 전날 국무회의 발언을 재탕했다.
윤 대통령은 올해 연금개혁을 강조해왔지만, 이번에 발표한 운용계획안에는 보험료율, 수급개시연령, 소득대체율 등 구체적인 수치 조정안은 담기지 않아 '맹탕' 비판을 받는다. 총선 전 국회에 공을 떠넘긴 '몸 사리기'라는 지적도 나온다.
윤 대통령은 이러한 비판에도 "우리나라 최고 전문가들과 80여 차례 회의를 통해 과학적 근거를 축적했다"며 "24번의 계층별 심층 인터뷰를 통해 국민 의견을 경청하고, 여론조사도 꼼꼼하게 실시했다"고 했다.
노동 분야의 경우, 대통령의 인식 수준이 드러났다. 대대적인 노조 탄압, 유혈 진압 등이 문제가 됐음에도, 그는 "합법적인 노동운동은 철저하게 보장하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노와 사를 불문하고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해 왔다"고 자평했다.
그러면서 대표적인 탄압 수단으로 평가되는 '노조 회계 공시'와 관련해서도 "최근 양대 노총이 회계 공시를 하기로 결정했다"면서 "늦었지만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회계 공시를 마치 노동개혁 성과처럼 말한 것이다.
민주노총은 지난 24일 회계공시와 관련해 입장문을 내고 부당함을 주장는 한편 "회계공시 결정은 회계투명성을 빌미로 한 윤석열 정부의 노동조합 탄압, 혐오조장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라며, 정부의 압박에 의한 '고육지책'임을 밝혔다.
윤 대통령은 전날 국무회의에서도 민생 현장에서 "국민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생생하게 듣고 왔다"면서 이주노동자 임금 차별, 국제노동기구(ILO) 탈퇴를 언급해 논란이 됐다.
그는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식당에서는 끝없이 올라가는 인건비에 자영업자들이 생사의 기로에 있음을 절규하며 '외국인 노동자의 임금을 내국인과 동등하게 지불해야 한다는 ILO 조항에서 탈퇴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비상 대책 마련을 호소했다"고 말했다.
교육과 관련해서는 난데없는 수능 카르텔, 킬러 문항 발언으로 본인이 논란을 키웠음에도 "수십 년간 공고하게 유지되어 온 사교육 카르텔을 근절하고 공정 입시를 실현하여 누구나 공평하게 꿈을 이룰 수 있는 교육시스템으로 변화시켜가고 있다"고 했다.
서이초 교사의 극단적 선택 뒤 제기된 교권 문제와 관련해선 "교권 확립을 위한 교권 보호 4법을 개정하여 학교 현장의 정상화를 위한 큰 걸음도 내딛었다"고 국회의 공을 평가했지만, 언급뿐이었다. 교사들이 요구하는 실효성 있는 대책에 대해선 한 마디도 없었다.
정부는 공교육 내실화를 하겠다고 밝혔지만, 말뿐인 '공염불'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교원 증원 요구 등에도 정부는 유치원, 초·중등 예산을 올해 80조 9000억 원에서 내년 7조 1000억 원으로 대폭 삭감했다.
민생 파탄 나고 있는데 '건전재정'만 반복
윤 대통령은 민생 경제 위기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지만 "우리 정부의 재정 운용 기조는 건전재정"이라며 내년에도 정부의 '곳간'을 걸어잠그겠다는 의지를 재차 피력했다.
올해 9월까지 국세 수입이 전년도 같은 기간 대비 50조 9000억 원이나 감소해 '역대급 세수 펑크'가 현실화되고 있지만, 윤석열 정부는 '부자 감세' 비판을 받는 대기업 법인세 감면 기조 등을 여전히 강조하고 있다.
내년도에도 경제 복합 위기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에서 사회 곳곳에 '온기'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정부의 '세수 펑크'와 '건전재정' 기조로 민생 경제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윤 대통령은 이에 대해 "건전재정은 단순하게 지출을 줄이는 것만이 아니고, 국민의 혈세를 낭비없이 적재적소에 효율적으로 쓰는 것"이라며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 편성과정에서 총 23조 원 규모의 지출을 구조조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를 통해 마련된 재원은 국방, 법치, 교육, 보건 등 국가 본질 기능 강화와 약자 보호, 그리고 미래 성장 동력 확보에 더 투입하겠다"고 말했지만, 구체적인 활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23조 원이나 되는 예산의 구조조정 내역도 아직까지 알려진 바 없다.
이번 예산안은 저출산, 고령화 등 구조적 문제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시정연설에서는 고령화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으며, 출산·양육과 관련해서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부모 급여를 인상하고, 출산 가구에 공공 분양 주택과 임대주택을 우선 배정하겠다"는 단 한 줄만 언급했다.
민주 "반성한다더니…반성없는 맹탕 연설"
민주당은 윤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국정실패에 '반성'없는 '맹탕 시정연설'이라고 비판하며 "'국민의 절박한 삶'과 '위기 극복의 희망'은 없었다"고 했다.
윤영덕 원내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시정연설에 대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면서 "당면한 경제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이나 국민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공감, 그리고 실질적인 대안은 찾아볼 수 없는 한마디로 '맹탕연설'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무엇보다 반성한다던 윤 대통령의 말씀과는 달리 국정운영 기조는 단 하나도 바뀐 것이 없었다"며 "민생을 챙기겠다던 대통령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경제 위기를 온몸으로 견뎌야 하는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고, 억지 성과를 자화자찬하며 자기합리화에 급급했다"며 "R&D예산 삭감에 대한 구차한 변명만 장황하게 늘어놓는 대통령을 지켜보며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건전 재정을 앞세운 지출 구조조정이라고 변명하지만 지역을 살리는 예산, R&D 등 미래를 준비하는 예산 등 필수 예산 삭감은 공약 파기 수준의 '묻지마' 삭감에 불과하다"며 "국민들은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마구잡이 삭감으로 점철된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한민국의 미래, 국민의 내일은 없었다"며 "적극적 감세 정책으로 세수 펑크를 초래한 것으로 부족해 민생을 내팽개치고 국가 미래마저 펑크를 내려고 하느냐"고 했다.
윤 원내대변인은 "민주당은 신사 협정을 존중해 본회의장에서 고성과 야유 등을 자제했다"면서도 "국민의 삶과 국가의 미래를 포기한 예산안에는 조금의 양해도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한편 윤 대통령은 이날 오전 국회 시정연설에 앞서 5부 요인 및 지도부 사전환담을 했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오셨어요? 오랜만입니다"라고 말하며 짧게 악수했고, 이 대표는 옅은 미소만 띄고 아무런 답변은 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본회의장에 입장하면서도 이 대표와 가장 먼저 악수하고, 이어 차례로 민주당 의원들과 악수했다. 윤 대통령은 연설 뒤 퇴장하면서도 이 대표 자리 쪽으로 나가며 악수를 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지난해 시정연설 당시 '바이든-날리면 사태' 욕설 파문과 관련해 항의를 하고 헌정사상 최초로 시정연설 보이콧을 했지만, 올해는 차분한 분위기에서 시정연설을 경청했다.
여야는 지난 4일 국회 회의장 내에서 피켓 시위와 상대 당을 향한 고성·야유 등을 하지 않는 내용으로 신사협정을 체결한 바 있다.
다만 민주당 의원들은 신사협정에 따라 올해는 본청 로텐더홀 계단에서 '민생경제 우선' '국정기조 전환' '국민들 무서워하라' 등이 적힌 팻말을 들고 '침묵 피켓 시위'를 했다.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윤 대통령이 국회에 들어서자 "여기 좀 보고 가라"고 외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