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하마스, 양비론을 넘어서
이스라엘도 문제고 하마스도 문제라는 양비론
저항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피억압자 아냐
팔레스타인 연대와 하마스 무비판적 지지는 달라
하마스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고 비판해야
중요한 것은 팔레스타인 저항의 대의와 정당성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효과적인 전략의 필요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인종청소와 인명 살상이 벌어지는 참혹한 상황에서도 피할 수 없는 문제가 10월 7일에 있었던 ‘기습 공격’과 이스라엘 민간인들의 희생, 공격의 주체였던 하마스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단순히 삭제하거나 축소할 수 없는 문제이고, 그렇다고 ‘이스라엘도 문제고 하마스도 문제’라는 단순한 양비론으로 그칠 수도 없다.
먼저 지적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마스가 보여 준 ‘폭력’의 원인과 책임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폭력적 억압과 지배에 있다는 사실이다. 팔레스타인의 땅을 강제로 빼앗고, 그들을 ‘거대한 열린 감옥’ 같은 좁은 땅에 가둬두고, 수시로 전폭기로 폭격한 결과가 오늘의 비극을 낳았다.
그래서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제도적 인종차별)에 맞서며 무장 투쟁을 하다가 27년간 투옥됐고 나중에 대통령까지 지냈던 넬슨 만델라는 ‘투쟁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피억압자가 아니다. 억압자가 폭력을 사용하면 피억압자도 폭력으로 대응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오랫동안 분석해 온 프랑스의 좌파 이론가인 질베르 아슈카르(Gilbert Achcar)도 이렇게 지적했다. “야만성은 결코 ‘정당한 방어’ 수단이 될 수 없다. ··· 그러나 두 야만성이 충돌할 때 더 강한 야만성, 즉 억압자 쪽이 여전히 더 큰 잘못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 약자의 야만성은 강자의 야만성에 대한 반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지적이 우리가 하마스의 전략과 ‘폭력’을 옹호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지지해야 한다는 뜻은 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억압에 맞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지지하는 것과 하마스를 지지하는 것은 다른 것이고, 혼동하면 안 되는 문제이다. 이것을 구분하지 않고 혼동하면서 국내 일부 진보 단체(노동자연대)는 하마스의 ‘커다란 군사적 성과’를 ‘역사를 다시 쓴 일’로 치켜세우며 심지어 “한 방 먹인 것을 기뻐하자”고 했다.
물론 아무리 문제와 결함이 있더라도 하마스도 팔레스타인 저항의 일부이기 때문에, 하마스를 악마화하는 것에 동조할 수는 없다. 예컨대 지금 이스라엘 정부와 미국 정부는 하마스를 ‘이슬람국가(ISIS)와 똑같다’, ‘순수하고 완전한 악’ ‘인간이 아닌 짐승들’이라고 매도하고 있는데, 이런 접근은 우리가 하마스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비판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마스는 ISIS와는 분명히 다르다. ISIS는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주민들을 고문하고 참수했으며, 유럽 등에서도 민간인을 겨냥한 테러를 저질러 왔다. ISIS의 이데올로기도 이슬람근본주의에 입각한 반동적이고 반혁명적인 성격이 강하다. 또 한 번도 민주적 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잡은 적이 없다. 2010년부터 ‘아랍의 봄’으로 민주주의 혁명들이 중동의 여러 나라를 강타했을 때 ISIS는 명백히 반혁명적인 위치에 서 있었다.
반면, 하마스는 이슬람주의에 기반하긴 했지만 종교적 근본주의보다는 이집트 등에서 반독재 저항운동과 민주주의 혁명을 이끌었던 ‘무슬림형제단’과 더 성격이 비슷하다. 실제로 하마스는 무슬림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로 출발했고 자신들이 반대하는 것은 ‘유대인이 아니라 시온주의’라는 입장이었다.
또, 이스라엘의 억압에 반대하며 팔레스타인 해방의 염원을 반영할 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복지, 교육 등을 위한 노력과 캠페인을 하면서 지지를 모아 나갔다. 그래서 하마스는 2006년에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당시 집권 세력이던 ‘파타’보더 더 많은 팔레스타인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승리한 정치세력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파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하마스의 성장을 묵인하고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를 갈라치는 이스라엘의 전략이 작동한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정치세력으로서 하마스는 분명히 몇 가지 문제와 한계를 가지고 있다. 먼저 하마스가 기반한 이슬람주의의 종교적 보수성은 민주주의나 소수자의 권리와 충돌하는 게 사실이다.
하마스는 여성과 성소수자에게 차별적인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가지고 있고, 고위 간부 중에서 여성은 극히 드물다. 또 하마스는 이란, 카타르 등의 아랍 정부들과 동맹을 맺고 협력하며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추구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대부분이 권위주의적 독재 정부로서 자국의 아랍 민중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데 있다.
나아가, 하마스는 정치조직과 무장조직으로 구분돼 있고, 무장조직이 전개하는 무장 투쟁(‘폭탄 테러’와 카삼 로켓 공격)을 민족해방의 주요 전략으로 삼고 있다. 이런 전략은 비밀스럽게 무장 투쟁을 계획하고 지휘하는 소수의 엘리트 간부들에게 권한을 집중시키며 대다수 팔레스타인인들을 수동적 지지자로 만드는 문제가 있다.
더구나 원시적 무기들에 의존하는 무장 투쟁만으로는 결코 압도적 군사력을 과시하는 이스라엘군을 상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런 문제점들과 가자지구의 악화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에 하마스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늘어나고 지난 여름에 반대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나아가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수교하며 팔레스타인의 뒤통수를 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아마도 하마스는 10월 7일의 ‘기습 공격’으로 이런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수천 발의 로켓을 쏘고, 장벽을 넘어서 이스라엘군을 공격하고, 행글라이더로 공중 침투하는 동시다발적 군사 작전으로 복잡한 정치적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는 이러한 기대를 질베르 아슈카르는 “마술적 사고”라고 꼬집었다.
물론, 거듭 확인하듯이 10월 7일에 벌어진 것은 이스라엘의 억압과 폭력이 낳은 비극이고, 그 정확한 진상에 대해서는 현재 이스라엘군과 하마스의 주장이 서로 엇갈리고 있기에 단정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스라엘은 음악 축제를 즐기던 민간인들의 대규모 희생을 제시하며 하마스를 규탄한다.
반면 하마스는 ‘장벽이 예상보다 너무 쉽게 무너지고, 당황한 이스라엘 경비대와 교전 중에, 뒤늦게 도착한 이스라엘 군대가 무차별 포격을 하면서 혼돈 속에 희생자가 늘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마스가 민간인들도 표적으로 삼아온 것은 부정하기 어렵고, 이번에도 이스라엘 민간인만이 아니라 키부츠에서 일하던 가난한 타이 이주노동자 등의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다. 이주노동자들은 하마스에 인질로도 잡혀가 있다.
무엇보다 하마스의 ‘알-아크사 홍수’ 작전은 팔레스타인 저항의 대의와 도덕적 정당성에 훼손을 가하면서, 마치 9.11이 미국 부시 정부와 ‘네오콘’에게 이라크 침략이라는 오랜 숙원 사업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듯이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극우 연정에게 ‘제2의 나크바’를 실행에 옮길 기회를 제공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질베르 아슈카르는 이렇게 지적했다.
“하마스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하마스의 전략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봉사하고 더 많은 이스라엘인을 대의에 동참시키는 대신 유대 민족주의적 단결을 촉진하고 시오니스트 국가에 탄압을 강화할 구실을 제공한다. ··· 오늘날까지 팔레스타인 투쟁에서 가장 효과적인 사례는 1988 인티파다처럼 비무장 투쟁이었다.”
탈식민주의를 연구해 온 팔레스타인 출신의 진보적 학자인 바시르 아부 만네(Bashir Abu-Manneh)도 비슷한 지적을 했다.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이 작전에는 완전히 비생산적인 측면이 있다. 그런 접근 방식이 점령의 종식에 더 가까워질까, 아니면 이스라엘의 폭력과 국가 테러리즘을 고착화시킬까? ··· 민간인을 표적으로 삼아도 되나? 답은 ‘아니오’이다. 팔레스타인의 대의는 정의와 평등에 헌신해야 한다. ··· 도덕적 싸움에서 이것을 잃는다면, 특히 힘의 균형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우리는 상당히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우리는 F-16 전투기를 보유하고 서방의 엄호를 받으며 마음대로 폭격하는 핵보유국과 싸우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던 1988년 1차 인티파다와 같은 대중항쟁과 총파업, 국제적 연대가 다시 쉽게 되풀이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그런 투쟁의 부활을 막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서안과 가자를 갈라놓았고, 모든 저항과 연대의 싹을 잘랐고, 5000여 명의 투사들을 끌고가 감금했고,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이 이스라엘 산업에 끼칠 경제적 구조와 힘을 제거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하마스같은 이들이 “마술적 사고”에 의존하게 되는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새롭고 더 효과적인 전략에 대한 고민을 포기해도 된다는 뜻은 될 수 없다. 팔레스타인의 투사들과 민중은 결국 답을 찾아낼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응원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단순히 하마스를 매도하는 것도, 팔짱끼고 양비론을 펴는 것도, 10월 7일의 비극과 희생을 삭제하거나, 문제점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 점에서 신자유주의와 기후 위기 등에 맞서온 저명한 작가이며 사회운동가인 나오미 클라인이 최근 <가디언>에 쓴 글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일부 좌파들이 이스라엘 민간인의 희생을 축소하고 심지어 축하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 반인종주의자나 반파시스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유대인들의 죽음을 축하할 때, 시오니즘 강경파의 주장은 힘을 얻는다. 그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연대, 인종과 종교를 넘는 휴머니즘, 반유대주의와 모든 혐오에 대한 격렬한 반대, 누구의 총이든 누구의 아이든 언제나 총보다 아이의 편에 서는 국제적 좌파, 윤리적으로 일관성 있는 좌파, 일관성을 점령자와 피점령자 사이의 동등성으로 착각하지 않는 좌파, 사랑이다. 이 힘든 시기에 나는 그런 좌파의 일부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