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계 귀화인'에 혁신 맡긴 국힘…'윤석열당' 바뀔까

당 혁신위원장에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 임명

복수국적의 의료 분야 전문가, 거수기 여당 쇄신?

"통합 추진할 것…부인과 아이만 빼고 다 바꿔야"

박근혜‧윤석열 지지…"박정희 위대, 백선엽 존경"

5‧18 때 광주 들어가 시민군 통역…DJ 존경하기도

윤 정권 극우보단 유연하지만 '장식용' 그칠 우려

2023-10-23     김호경 에디터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김기현 대표와 인요한 혁신위원장이 만나고 있다. 국민의힘은 이날 오전 인요한 연세대 교수를 혁신위원장으로 임명했다. 2023.10.23 [공동취재] 연합뉴스

정당사에 유례가 없던 일이 국민의힘에서 또 연출됐다.

'김태우 공천'으로 상징되는 '대통령 거수기' 노릇과 브레이크 없는 극우 행보로 민심 이반을 부채질하던 여당이 사정이 다급해지자 복수국적의 미국계 귀화인을 구원투수로 선발했다. 보궐선거 참패와 지지율 추락의 늪 속에서 허우적대며 총선 패색이 짙어지던 집권여당을 과연 '푸른 눈의 의사'가 구제해줄 수 있을까. 당내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기대감과 함께 일시적인 장식 효과에 그칠 것이라는 회의론이 교차한다.

국민의힘은 23일 당 쇄신 작업을 이끌 혁신위원장에 인요한(64) 연세대 의대 교수를 임명했다. 10·11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12일 만이다. 당 안팎에서 사퇴 압박을 받아오던 김기현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같은 인선을 발표하고 혁신위에 전권을 부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 대표는 "혁신위는 그 위원의 구성, 활동 범위, 안건과 활동 기한 등 제반 사항에 대해 전권을 가지고 자율적·독립적 판단을 하게 될 것"이라며 "우리 모두 변화하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절박한 각오로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요한 신임 혁신위원장은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임명 직후 이만희 사무총장 등과 상견례를 겸한 회의를 갖고 혁신위 운영 방안을 논의했다. 그는 기자들과 만나 "통합을 추진하려고 한다"며 "생각은 달라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통합"이라고 했다. 이어 "고(故) 이건희 회장님 말씀 중 제가 깊이 생각한 게 '와이프하고 아이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많이 바뀌어야 한다"며 "국민의힘에 있는 많은 사람이 내려와야 한다. 듣고 변하고 희생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희생 없이는 변화가 (없다)"고 강조했다.

혁신위 활동 방향에 대해선 "당 안에서의 활동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대한민국의 먹거리가 뭔지, 살아나갈 길이 뭔지, 선진국이고 7대 강국인데 어떻게 더 발전할 건가, (어떻게) 후대에 조금 더 좋은 세상을 물려줄 건가, 거기에 중심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본인의 총선 출마 여부에 대해선 "그건 다 내려놓은 것"이라며 "여러 가지 말도 있고 유혹도 있지만 여기 이 일을 맡은 동안에는 다른 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으로 임명된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가 2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주요 당직자들과 만난 뒤 나오며 취재진 질문을 듣고 있다. 2023.10.23. 연합뉴스

1959년 순천에서 태어난 인 위원장은 연세대 졸업 후 1987년 서양인 최초로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했으며, 1991년부터 32년간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장으로 일해 왔다. 부모가 모두 미국인이라서 원래는 단독 미국 국적이었지만 2012년 3월 가문의 교육·의료 분야 공헌을 인정받아 '특별귀화 1호' 대상자로 선정됐다. 한국 국적과 미국 국적을 모두 가진 복수국적자로 미국 이름은 존 린튼이다.

'푸른 눈의 한국인'으로 잘 알려진 그의 가문은 4대째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교육·의료 활동을 펼쳐왔다. 구한말 미국에서 건너온 유진 벨 선교사가 외증조부다. 인 위원장의 조부 윌리엄 린튼은 1912년 선교사로 입국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드는 데 공헌했고 3·1운동을 해외에 알리는 데 역할을 했다.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부친 휴 린튼은 6·25전쟁 참전용사다. 인천상륙작전에 미국 해군 대위로 참전했으며, 이후 순천기독치료소를 설립해 결핵 퇴치 활동에 앞장섰다.

인 위원장은 연세대 가정의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0년 5‧18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시민군의 통역을 맡았던 이력도 있다. 연세대가 계엄령에 따라 폐교되자 순천에 내려가 가족 집에 머물렀는데, 광주에서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우여곡절 끝에 광주 시내로 들어가 시민군의 외신 기자회견을 통역하게 됐다는 것. 이 일로 신군부에 의해 한국에서 추방당할 뻔하기도 했다.

1997년 형과 함께 외증조부의 이름을 딴 유진벨재단을 설립해 대북 의료지원 활동을 펼쳤다. 무료 진료, 구급차 기증, 결핵퇴치사업 등을 위해 29차례 방북했고 북한에 총 200여 개의 결핵진료소를 설치했다.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006년 펴낸 책 제목이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일 정도로 호남과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자신을 '순천 촌놈'이라고 칭하며 평소에도 자연스럽게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한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100%대한민국대통합위원회 임명장 수여식에서 인요한 국민대통합위 부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2012.10.16. 연합뉴스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12년 10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 합류하면서 국내 보수 정치권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었다. 당시 호남 지역 유세에 동행해 지지 연설을 하면서 '대한민국 여성 대통령론'을 펴 눈길을 끌었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 인수위원회에서 국민대통합위 부위원장을 지냈다.

윤석열 대통령 측과도 지속적으로 교류해왔다. 지난해 5월 취임식에 '국민대표 20인' 중 한 명으로 참석한 데 이어 올해 4월에는 윤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연출, 방송된 제2차 국정과제점검회의에 5명의 전문가 패널 중 한 명(국가보훈처 정책자문위원장 자격)으로 출연했다. 6월에는 윤 대통령 부부가 한미동맹 70주년 특별전을 관람할 때 참전용사 후손 자격으로 동행했다.

지난 8월엔 친윤계 의원들의 '국민 공감' 모임에 강연자로 나섰다. 인 교수는 당시 강연에서 윤 대통령이 미국 방문 때 영어 연설을 하고 '아메리칸 파이' 노래를 부른 것을 언급하며 "대통령 영어가 거의 완벽하다. '아메리칸 파이'는 미국 사람 심금을 울리는 노래"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최근엔 국민의힘 총선 영입 대상으로 연세대 신촌캠퍼스가 위치한 서울 서대문갑 지역구 출마가 거론돼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2차 국정과제점검회의에 입장하며 인요한 연세대 의과대학 세브란스병원 소장과 인사하고 있다. 2023.4.5. 연합뉴스

인 위원장은 지금까지 여러 인터뷰와 연설 등을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위대한 지도자" "미국에서 최고로 알아주는 사람이 링컨 대통령인데 한국 민족한테는 링컨보다 더 훌륭한 분이 박정희 대통령" "백선엽을 아주 존경한다" "백선엽 장군은 영웅인데 일부 국민이 친일파 군인이라고 깎아내린다" "국민건강보험은 사회주의적" "의료보험은 소외된 계층 위주로 가고 반드시 영리법인(병원)을 도입해야 한다" 등의 발언을 해 정치적으로 보수우파 성향으로 분류돼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김대중 대통령을 존경한다"며 "김대중 대통령은 평화로운 정권 교체와 IMF(사태)를 극복한 대통령"이라고 밝히는 등 윤석열 정권의 주류 극우 인사들보다는 유연한 편이다. 그는 지난 7월 한 인터뷰에서 '보수냐 진보냐'라는 질문을 받자 "그건 나도 가끔은 판단이 안 된다. 내가 한 행동도 그렇지 않냐"면서 광주항쟁 때 시민군 통역을 했던 일이나 대북 의료 지원 사업에 매진했던 일 등을 열거했다. 그러면서 "내 스스로는 사상적으로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며 나름대로 균형 있게 역사를 보고 살려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신앙에 기초해 옳은 일에 대해서는 옳다고 하고, 불의한 일은 어떤 식으로든지 작은 저항이라도 하고 산 것 같다"고 말했다.

인 위원장이 극단적 수구 지향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지만 친윤계와 영남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국민의힘에서 실질적인 '전권'을 행사하며 쇄신 작업을 제대로 진두지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특히 현역 의원과 원외 경쟁자들이 사활을 걸고 부딪힐 내년 총선을 앞두고 공정한 공천 기준을 마련하는 작업은 혁신위의 성패를 좌우할 핵심 과제인데, 당 내부 사정을 잘 모르고 전문성이 거의 의료 분야에 국한된 인 위원장이 감당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당장의 필요에 의해 '장식용'으로 쓰이다 별 효과가 없으면 언제든 용도 폐기될 수 있다는 얘기다.

 

23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공부모임 '국민공감' 행사에서 김기현 대표, 윤재옥 원내대표, 초청 강사인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 등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3.8.23. 연합뉴스

수도권 4선인 윤상현 의원은 채널A '정치시그널'에서 "인 교수님은 '국민통합위원장'으로 적절한 분인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당 체제를 개선하고 총선에 바람을 일으킬 대수술을 할 수 있는 집도의"라고 지적했다. 천하람 전남 순천갑 당협위원장은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정당 내부를 혁신하는 데 있어서 그 정도 전문성과 경험을 가졌는지 좀 지켜봐야 하는 부분"이라며 "흥미롭고 혁신적인 느낌은 나지만 실제 우리가 불편한 건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카드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인 위원장 배후에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이 있어서 특정한 의도를 갖고 추천한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지만 김 위원장 측은 "추천하지 않았고 국민의힘 당무에도 일절 관여하지 않고 있다"고 부인했다. 윤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로 통하는 김 위원장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일부 언론 등에서 말하는 신당 창당은 생각해본 일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며 내년 총선 역할론에 대해서도 "저는 정치를 떠나 있는 사람이고, 지금은 제가 맡고 있는 국민통합위 일에 전념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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