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EA 받들고 우리 국민은 비하…정부·언론 판박이
그로시 인터뷰에 특정언론만 불러…비판 언론 배제
의문·의혹 질문 없이 '오염수 문제없다' 녹음기 틀듯
항의하는 야당·시민은 '국격훼손' '국제망신' 비하
일본에서 후쿠시마 핵 오염수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최종 보고서를 공개한 라파엘 그로시 IAEA 사무총장이 지난 주말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갔다. 그는 한국 도착 직후 공항에서 기자들을 따돌리고 서울 시내 호텔에 묵은 뒤 주말~휴일 동안 야당을 만나고 일부 언론매체와 따로 기자회견(인터뷰)을 가졌다.
그로시 사무총장의 인터뷰 기사가 8일 연합뉴스, 10일자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에 실렸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 비슷한 내용의 이 인터뷰 기사에 우스꽝스럽게도 굳이 '단독'이라고 표기했다.) 이번 그로시 총장의 한국 언론 인터뷰 보도는 '핵 오염수 방류가 문제없다'는 IAEA 최종보고서만큼이나 기이한 문제가 있다.
첫째, 인터뷰가 3~4개 ‘특정 성향’의 매체들하고만 이뤄졌다. 수많은 한국내 언론 매체들을 순식간에 '물먹인' 것이다. 둘째, 조중동 등 '특정 매체들'은 인터뷰에서 그동안 그로시 총장이 해왔던 말을 녹음기처럼 틀어놓은 질문과 답변만을 실었다. 여러 의문과 의혹에 대한 새롭고 구체적인 질문-답변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셋째, 그로시 총장을 인터뷰한 매체들은 그로시에 대한 의혹 대신 오히려 야당과 시민들의 정당한 주장과 항의를 비하하고 나섰다.
그로시 총장은 8일 특정 매체 기자들을 숙소에서 따로 만나 인터뷰를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특정 매체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와 연합뉴스였다. 조선, 중앙, 동아는 그동안 일본 핵 오염수 방류 우려를 ‘괴담’으로 몰고 IAEA의 최종보고서가 발표되자 ‘오염수 방류 문제없다’는 기사를 냈던 ‘친윤’ ‘친일’ ‘친원전’ 매체들이다.
정부 보조금을 받는 연합뉴스도 그동안 일본과 한국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찬성입장에 적극적인 문제제기를 해오지는 않은 매체에 속한다. 조중동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온 한겨레, 경향신문을 비롯한 다른 여러 국내 언론사들은 인터뷰에서 ‘배제되어’ 그로시 총장에게 질문 한 번 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이번 인터뷰가 특정 매체와만 이뤄진 이유가 밝혀져야 한다. 그로시 사무총장이 묵고 있는 서울 광화문 모 호텔에서 조중동 기자와 인터뷰를 하도록 주선해준 것이 우리 정부 당국이었다면, 이는 언론의 취재자유를 정부가 나서 가로막은 것이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실이 지난해 정부 비판적 매체인 MBC 기자를 대통령 순방 전용기 탑승에서 배제하고, 비판 언론의 대통령실 출입마저 가로막고 있는 것과 비슷한 행태다. 국민의 85%가 핵 오염수 해양투기를 반대하고 있는데, 이런 여론을 대변하는 매체의 기자의 질문 기회를 박탈한 것은 언론자유를 통제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방해한 것과 같다.
또한, 그로시 사무총장과 인터뷰 보도에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이 IAEA에 대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의혹과 의문을 해소할 만한 질문과 답변이 나오지도 않은 것도 기이하다. 한마디로 그동안 그로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되풀이하도록 지면을 열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국회에서 민주당과 시민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았던 그로시 총장은 지금까지 해왔던 ‘핵 오염수 무해론’을 조중동과 국가기간통신사 지면을 통해 마음껏 펼치고 갔다.
인터뷰를 한 조선일보는 10일자 '그로시 총장 “후쿠시마 오염수보다 북핵을 더 걱정해야”'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일본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우려와 반대가 터져나오는 나라에 와서 그로시 총장은 엉뚱하게 ‘북핵 걱정’을 하고, 조선일보는 이 말을 제목으로 뽑았다.
‘한국인들 오염수 걱정·반발 이해/몇년이 걸리더라도 계속 소통할 것/인터뷰 중 식탁 위의 물 가리키며/ “저기에도 삼중수소는 들어있다/방류수 마실 수 있고 수영도 가능/매일 후쿠시마와 비슷한 물이/韓·中·佛 원자로서 바다로 방류”’라는 부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인터뷰는 그로시 총장이 그동안 몇차례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반복해서 틀어놓은 ‘녹음기 인터뷰’였다.
중앙일보의 ‘그로시 “방류 외 다른 방법? 세계를 실험실 쥐로 만들건가”’제목의 같은 날짜 인터뷰 기사 내용 역시 그동안 그로시 총장이 일본의 핵오염수 투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언급한 말들로 채워졌다. 동아일보의 ‘IAEA 전문가들, 과학적 이견 전혀 없었다’ ‘“오염수 안전 처리땐, 후쿠시마 생선에 방사성 물질 영향 없어”’ 제목의 인터뷰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연합뉴스의 ‘IAEA사무총장 “보고서, 전문가 이견 없었다…일본 편향 아냐”’ 제목의 인터뷰 기사는 한술 더 떠 전날 ‘IAEA 내부에 이견이 있었다’는 로이터 기사에 대한 해명까지 덧붙였다.
결국 조중동과 연합뉴스의 인터뷰는, 일본 핵오염수 투기를 정당화해온 그로시 총장의 발언을 다시 한번 들려주기 위한 마이크를 제공한 셈이다. 정작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나 의혹에 대해서는 질문도, 구체적인 답변도 나오지 않았다.
예컨대, ‘한국의 전문가들의 우려하는 해양생태계 오염 우려 해소할 근거가 있는가’ ‘2, 3차 시료와 환경시료 분석결과를 포함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왜 오염수 해양방류를 대신할 다른 방안을 권고하지 않았는가’ 등등, 국내 전문가들과 방류 반대 단체가 궁금해 하는 질문은 일절 없었다.
‘보고서 조작’ ‘100만 유로 제공’ 의혹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물론, 그로시 총장은 이런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혹 제보가 매우 구체적인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혹 제보자의 동기나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보고서 조작의 정황에 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등 의혹을 풀 수 있는 답변을 끌어낼 질문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조중동과 연합뉴스 기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인터뷰가 실린 10일자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각각 1면 톱에 ‘폭행 빼고 다 당한 IAEA 총장’과 ‘그로시 국회 불러놓고 민주당 호통·시위·욕설’이란 제목의 기사가 올랐다.
조선일보는 기사에서 ‘민주당의 수위 높은 비판’ ‘그로시를 향한 시위대’ ‘한 친야 성향 매체 기자의 100만 유로 질문’ ‘시민들의 공항 시위’ 등을 ‘국격훼손’이라고 보도했다. 이날 사설의 제목은 ‘IAEA 대표를 당혹스럽게 만든 대한민국의 수준’이었다. 앞에서 제시한 어느 것 한가지가 도대체 ‘국격훼손’에 해당되는 것일까? IAEA 정도의 국제기구에 대해 한국 야당이나 국민들이 비판하고 항의하는 것을 조선일보는 ‘국격 훼손’이라고 보는 것이다. 중앙일보는 조선일보와 쌍둥이처럼 보도했다. ‘국회 면담장 밖 노재팬 티셔츠, 욕설 시위…여당 “국제망신”’이라며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야당의 비판과 시민들의 항의를 지적하고는 누군가의 입을 빌려 ‘국제망신’이라고 썼다.
이 두 언론은, 핵 오염수 해양투기가 초래할지 모르는 자기 나라 연안의 해양생태계 오염·파괴와 국민의 건강 훼손 같은 문제보다 국제기구 사무총장에 대한 ‘예의’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느 나라 언론인가? 누구를 위한 언론인가? 국민의 자존심보다 IAEA 사무총장에 대한 예의가 중요한 언론이다. 그런데 이 언론들은 예컨대 국제노동기구(ILO)의 한국 내 노동법 준수 권고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비판하고 항의하던 언론 아닌가?
일본 핵 오염수 방류가 불러올 미래는 아직 불확실하고 우려스럽지만, 방류를 앞두고 오히려 명확해지는 것이 있다. 한국의 일부 거대 언론들은 정권에 '아부'하기 위해 첫째, 수시로 말을 바꾼다는 것, 둘째, 국민의 목소리보다는 일본이나 국제기구의 입장을 대서특필해 준다는 것, 셋째, 국제기구에 항의하면 갑자기 ‘국격훼손’ ‘국제망신’이라고 자국민을 비하한다는 것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