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그리고 인간이 인간이 되기 위한 것에 대해
'민들레'의 명단 공개를 어떻게 봐야 할까
사회가 같이 알고 같이 애도해야 하는 죽음
혹시 우리는 인간의 탈을 쓴 당나귀는 아닌가
스스로 질문할 수 있어야 인간은 인간이 된다
지금은 우리가 생각할 때, 질문할 때, 철학할 때
<형이상학으로의 초대>
1. 사회가 같이 알고 같이 애도해야 하는 죽음
<민들레>에 글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 처음 알려졌을 때, 내가 처음 접한 반응은 비난이었다. <민들레>에 글을 쓰는 것이 위선이라나 뭐라나. 내가 위선자라는 거야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 일이니까 그런 말에 발끈할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민들레>라는 매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제 처음 시작하는 인터넷 매체에 얼굴을 내미는 것만으로도 내가 위선자라고 비난받는 것일까?
요새는 거의 매주 부고 문자를 받는다. 그런데 그 많은 부고 문자 가운데 내가 아는 사람의 부고는 거의 없다. 거의 모든 부고 문자는 같은 대학 교직원 가족의 부고인데, 교수만 하더라도 천 명이 훨씬 넘는 교직원들 가운데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모르는 사람들의 부모는 물론이고 빙부 빙모가 사망했다는 부고까지 문자로 받는다. 물론 나는 모르는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이므로, 그렇게 단체로 보내는 사정이야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내가 모르는 사람의 장인 장모, 또는 시부모의 사망을 알리는 부고가 낯설다. 고인의 이름이 궁금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태원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은 사람들도 내가 모르는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당연히 나는 누구에게서도 희생자들의 부고 문자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나대로 이러저런 일에 치여서 사는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의 일에 대해 신경 쓸 겨를 없이 산다. 그건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끔은 이것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더 심해지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냉담함 때문인가 싶기도 하고, 평생 철학자로서 살아온 사람의 직업병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닌 게 아니라 만사를 전체로부터 또는 스피노자식으로 말해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되면 이 사람 저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 사소해 보일 때가 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한 번 태어나 언젠가 죽어야 하는 존재니까.
그런데 모두가 그렇게 타인의 죽음에 무관심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하철 구의역에서 혼자 스크린 도어를 고치다가 달려오는 전동차를 피하지 못하고 젊은 목숨이 죽어도 내 알 바 아니요, 철강공장에서 쇳물에 빠져 죽어도, 내 알 바 아니며, 강남역 화장실에서 여성이 칼에 찔려 죽어도 내 알 바 아니고, 신당역에서 또 다른 여성이 칼에 찔려 죽어도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냉담한 무관심의 끝에 나는, 길을 가다 모르는 사람의 칼에 찔리지 않을까 염려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런 세상을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싫어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죽음이 있다. 개인적이고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함께 애도해야 할, 비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죽음이 있는 것이다. 이태원에서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그 죽음은 개인적인 죽음도 아니고 자연적인 죽음도 아니다. 그것은 명백히,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고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던 비자연적인 죽음이다. 그것은 자연이 아니라 사회가 죽인 죽음이므로 사회가 같이 알고, 같이 애도해야 하는 죽음인 것이다.
하지만 서울도 아닌 광주에서 한 평 크기도 되지 않는 책상이 세계인 나 같은 사람에게 이태원에서 무슨 일이 났는지 누가 알려주겠는가? 언론이다. 그런 거 여기저기 알려주라고 언론이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얼굴을 본 적도 없는 교수의 시부모, 장인 장모의 죽음은 몰라도 되지만, 시민으로서 알아야 할 죽음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도록 사회적 부고를 알리는 것, 그것이 언론이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민들레>는 그 일을 했다. 그런데 희생자들의 명단을 알렸다고 비난받았다. 나아가 <민들레>에 필자로 참여하게 되었다고 이름이 알려진 나까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민들레>가 유가족의 모두의 허락을 받지 않고 사망자의 명단을 밝힌 것이 천인공노할 만행이라는 것인가? 그래서 이 매체에 참여하는 것까지 악에 동조하는 일이 되는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말인데, 어떤 철학자가 어떤 윤리학 책에서 그리고 어떤 근거에 따라 사회적 재난에 의해 사망한 사람들의 신원을 유가족 동의를 받지 않고서는 밝혀서는 안된다고 말했던가? 아니면 형법 몇 조 몇 항에 그것이 범죄적 행위라고 적시되어 있는가?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문제들 가운데 많은 것들은 정답이 없는 문제들이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유족 가운데 자신의 가족이 그날 거기서 세상을 떠난 것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듯이,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반대의 가능성도 마찬가지이다. 유가족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그날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신원을 정확하게 알고 싶어할 것이고 또 알리고 싶어할 것이다. 그걸 알아야 유가족들이 이 참사에 공동으로 대처할 수도 있고 세상 사람들이 이 비극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둘 사이에서 어느 쪽 편을 드는 것이 옳은 일일까? 만약 유가족의 의사가 절대적인 판단기준이라면, 언론은, 양쪽으로 정확히 같은 거리에 위치한 건초더미 한 가운데 서서 어떤 쪽 건초를 먼저 먹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해 굶어 죽었다는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행동불능 상태에 놓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희생자의 명단을 공개하느냐 마느냐의 판단기준이 되어야 할 유일한 근거가 정말로 유가족의 의사일까? 그래서 모든 유가족이 합의하여 동의해주지 않으면 언론은 희생자의 명단을 공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어떤 죽음이 사회적 재난에 따른 죽음으로서 사회적 관심과 애도의 대상이 되면, 유가족이 아니라 사회가 상주이다. 물론 그 경우에도 유가족은 가족으로서 가족의 죽음을 개인적으로 애도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개인으로서만 살고 죽지 않는 사회적 존재이며, 나의 절반은 타인의 몫인 서로주체적 존재이다. 개인의 삶과 죽음이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가지게 되면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나쁜 일은 나쁜 일대로, 개인의 일이 공공적인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 전체가 관심을 가지고 애도하는 사회적 재난에 대해, 희생자들의 이름을 공개하는 것을 유가족의 허락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개인적 죽음과 사회적 죽음을 분간하지 못하는 판단력의 결핍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서로 생각이 다르면 상대방을 비난하기 전에 각자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제시하고 토론해야 할 것이다. 그냥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하는 것, 그것은 자기의 견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일이다. 그리고 모든 건전한 생각은 다른 무엇보다 건전한 근거에 따른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단 공개를 두고 <민들레>가 유가족의 동의를 받지 않고 사망자 명단을 공개했다고 비분강개하는 목소리는 많이 들었으나, 왜 그러면 안 되는지 차분하게 근거를 말하는 이성의 소리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런데 돌아보면 이 문제뿐만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의 공론장에서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과격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주 일반적인 일종의 에토스(ethos)가 되었다. 아무 근거도 없이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세상에서는 과격하면 과격할수록 말이 돋보인다. 그리고 그런 말만 남는다. 아무 근거도 없는 말들이 서로 부딪칠 때, 말의 옳고 그름은 문제 되지 않는다. 힘센 말과 힘없는 말이 있을 뿐이다. 명백히 틀린 말도 힘이 있는 말이면 옳은 말이 되고 명백히 옳은 말도 힘이 없으면 틀린 말이 된다.
“로곤 디도나이”(logon didonai), 근거를 제시하는 것, 그것이 모든 성실한 생각의 최소한의 요건이라는 것은 이미 플라톤에서부터 전승되어 온 원칙이다. 무슨 주장을 하려면 최소한의 근거는 제시하고 말을 해야 한다. 반대로 아무 근거 없이 말하는 것, 그것은 무사유의 징표이다. 아무 근거 없이 떠드는 말은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저 당나귀가 내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백석의 당나귀는 귀여운 데가 있었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그러나 요즘 온갖 매체에 얼굴을 내밀고 아무 말이나 되는 대로 지껄이는 당나귀들은 얼마나 역겹고 흉물스러운가.
2. 혹시 우리는 인간의 탈을 쓴 당나귀는 아닌가
처음 민들레에서 매체에 참여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실은 내가 부탁받은 글의 주제가 바로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단 공개에 관한 성찰의 글이었다. 나는 그 부탁을 거절했다. 한참 민들레가 명단 공개 때문에 언론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정하게 그런 글이라면 쓸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말은 이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필요한 것이고 의미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생각하는 능력을 온전히 지니고 있는 인간이 맞기는 맞는가? 아니면 혹시 우리는 인간의 탈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도무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도 모르고 하려고 하지도 않는 당나귀들은 아닌가?
농담하자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고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자기인식에 속한다. 그래서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성적으로 생각할 줄 안다고 믿는다. 그렇다 치자. 하지만 알파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챗-GPT가 시도 쓰고 논문도 쓰는 시대에 사람이 하는 생각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나 가치를 가질 수 있겠는가? 기계에 비하면 인간이 하는 생각이란 너무나 제멋대로이다. 근거도 없고 일관성도 없는 말들이 권력의 언어가 되고 현실적으로 생사람을 잡는 폭력이 된다. 그런 시대에 사람이 하는 생각을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 사람이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비교대상이 없을 때는 사람만 생각하니까 사람이 하는 생각이 다 같은 생각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계도 생각한다. 게다가 사람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조리있고 일관되게 생각한다. 그런 시대에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을까?
물론 알파고가 두는 바둑에 비하면 바둑기사들이 두는 바둑은 실수의 가능성 때문에 인간적이기는 하다. 그리고 그 실수 가능성 때문에 어쩌면 바둑을 두는 기사들은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게임이 아니고, 모든 실수가 웃고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우리는 실수를 줄이고 올바르게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평생동안 노력한다. 생각하면 공교육은 모든 분야에서 그런 사람을 길러내기 위한 제도적 기관이다. 하지만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에 바탕하여 정확하게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기계가 우리 옆에 있다. 실수를 줄이기 위해 그런 기계에 의지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고작해야 청진기를 통해 진단을 하던 의사들이 오늘날에는 온갖 기계를 동원해 환자를 진단한다. 그것이 더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사들이 진단을 위해 사용하는 기계는 외주화된 감각이다. 내시경도, X-레이 사진도, MRI 촬영도, 모두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 준다. 그런데 감각은 정신의 도구이다. 감각이 아무리 예민해진다 하더라도, 감각이 하는 일과 정신이 하는 일은 같지 않다. 현미경과 망원경 때문에 물리학자나 생물학자가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정신은 감각과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이 생각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만이 생각하는 존재라고 믿고 수천 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앞으로도 기계가 다만 우리의 감각을 보완하는 일만 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기계는 이제 감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처럼 생각도 한다. 그것도 단지 수학이나 물리 문제를 계산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기계가 시도 쓰고 논문도 쓴다. 그리하여 기계가 사람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계산을 훨씬 더 정확하게 하는 것처럼, 이제 사람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말도 하고 글도 쓰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만약 당신이 학생이라면 스스로 쓴 보고서보다 기계가 쓴 보고서가 훨씬 더 좋은 성적을 받을 때, 힘들여 스스로 보고서를 쓰고 있겠는가? 모르는 것이 있을 때, 구글에 묻는 것은 이미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할 말이 있을 때, 챗-GPT에 원고를 부탁하는 것이 일상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기계에게 생각을 외주화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학생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수의 강의도 외주화하지 못할 것이 전혀 없다. 아니, 사람이 하는 강의보다 기계가 하는 강의가 훨씬 더 정확할 것이다. 아니면 목사의 설교 같은 것은 또 어떠한가. 만약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목사 대신 목사 기계가 설교한다면, 그 설교가 얼마나 고상하고 우아하겠는지 한번 상상해보라. 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외주화하게 되면 인간이 당나귀와 다른 것이 무엇일까? 유일한 차이는 당나귀와 달리 인간에겐 발정기가 따로 없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이제 인간의 정의를 바꾸자.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 언제나 발정 나 있는 당나귀라고.
3. 스스로 질문할 수 있어야 인간은 인간이 된다
<논리야 놀자>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여기저기 논술학원에서 철학과 대학원생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도 대학의 철학과에서 운영하는 교양과목 가운데 논리학 관련 강의는 학생들이 가장 많이 수강하는 강의에 속한다. 올바르게 생각하려는 그 선의를 의심하거나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논리야 놀자>가 베스트셀러가 되어도, 논리학 강의실에 여전히 학생들이 넘쳐나도,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올바르게 생각하는 길로 이끌어주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태원 참사 명단 공개를 둘러싼 터무니없는 소란은 오늘날 한국인들의 전반적 무사유를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이다. 아무 생각 없이 되는 대로 지껄여도 전문가 대접을 받고 지식인 대접을 받는다.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유명한 당나귀가 된다. 무엇이 문제일까? 왜 우리는 머리를 달고서도 온전히 생각하지 못하는가? 더 근본적으로 묻자면, 생각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이 나온 김에 생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챗-GPT에게 물었더니 고맙게도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생각은 새로운 생각, 개념, 생각을 생성하는 정신적 과정을 말합니다. 이것은 감각, 기억, 추론, 상상력과 같은 우리의 인지 능력을 사용하여 정보를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결정을 내리고, 믿음과 태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일 수 있으며, 간단한 자동적인 프로세스부터 복잡하고 의도적인 프로세스까지 다양할 수 있습니다.”
훌륭하지 않은가? 원래 영어로 대답한 것을 한국어로 자동 번역해서 약간 어색해 보이는 부분도 있으나, 영어 원문은 나무랄 데 없는 문장이다. 이 기계가 생각에 대해 이렇게 조리있게 대답하는 것을 보면,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의견을 물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왕 물은 김에 이태원 희생자의 명단을 공개하는 것이 옳은지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OpenAI에서 개발한 언어 모델로서 개인적인 의견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와 같은 참사 희생자 명단을 공개하는 것은 민감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개인 정보 보호 문제, 동의, 영향을 받는 사람에 대한 피해 가능성을 포함하여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보에 대한 권리와 개인 사생활 보호 및 비극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잠재적 영향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이러한 경우 정보 공개와 관련하여 시행될 수 있는 모든 법률 및 규정을 준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에서 내가 말한 것과 같은 대답은 아니지만, 이 대답 역시 이 문제를 두고 언론에서 떠들던 사람들의 말에 비하면 훨씬 더 훌륭하다. 일단 사람보다 겸손하다. 자기의 한계를 스스로 알고 있으니 지혜롭기까지 하다. 그 내용 자체에서도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균형이 있다. 요컨대 명단을 공개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고, 우리가 이런 문제에 관해 고려해야 할 여러 가지 사항들을 일깨워 준다. 그런 충고와 조언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경청할 용의가 있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당나귀들의 소음공해에 염증을 느끼고 차라리 기계가 조언해 주는 말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그런 시대에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을 본질적으로 규정한다는 그 생각의 능력이란 또 무엇일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만약 배우고 이해하는 것이 생각이라면, 기계는 인간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생각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학습에 기반하여 수많은 지식을 기억하고, 또 그 기억에 기초하여 주어지는 물음에 대답을 찾는 것이 생각의 일이라면, 이 점에서도 기계는 사람보다 훨씬 더 탁월하게 생각하는 존재일 것이다. 이름부터 기계의 학습을 딥-러닝이라 부르지 않는가.
하지만 기계는 적어도 아직은, 스스로 질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기계로부터 답을 듣기 위해서는 먼저 누군가가 질문을 입력해야 한다. 남이 질문하기 전에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계는 스스로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물음이 없으면 생각도 없다는 것은 기계나 인간이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사람도 마치 기계처럼 아무 질문 없이도 잘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남이 묻지 않아도 스스로 질문할 능력이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기계는 물음이 주어지지 않을 때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지만, 인간은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도 문득 물음을 던지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것이 생각의 자발성이다. 그러니까 기계가 하는 생각이 인간의 생각보다 많은 점에서 훨씬 더 훌륭하지만, 기계는 스스로 질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생각하더라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하지만 안도하기는 이르다. 교실에서 학생들이 질문하지 않는 것은 기계와 별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묻는 말에 대답하는 데 길들여져 있을 뿐, 스스로 질문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은 학생들이나 기계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주어진 물음에 답하시오.’ 학생들은 언제나 그 명령 아래 있다. 학생들의 공부라고 하는 것은 더도 덜도 아니고 주어진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묻는 것은 학생의 권리가 아니다. 오직 주어진 물음에 대답하는 것만이 학생의 의무이다. 우리는 그렇게 훈육받고 어른이 된다. 그런 어른이 기계보다 나을 것이 무엇일까?
4. 나는 누구인가, 물을 때 인간은 기계를 무한초월하는 존재가 되는 것
기계보다 못한 발정 난 당나귀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질문할 줄 알아야 한다. 질문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어른이 되면 인간은 속절없이 ‘답·정·너’의 대상으로 남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고 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묻는 사람이 딱히 사정이 나은 것도 아니다. 사회적 권력 관계에서 보자면 묻는 자는 주인이고 대답하는 자가 하인이기는 하다. 하지만 질문하는 주인이라고 당나귀보다 나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어차피 기계가 다 대답해 줄 물음을 스스로 검색해서 알면 되지 그걸 남에게 묻는 것이 갑질이나 될까, 무슨 대단한 지혜의 징표일 수 있을까? 시험장에서 출제된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학생이나, 그런 문제를 출제하는 교사나 생각 없이 사는 당나귀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발정 난 당나귀도 아니고 ‘답·정·너’ 처지의 노예도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배워야 할 물음이 있다면, 어떤 종류의 물음일까? 그것은 기계가 묻지 않는 물음인 동시에 기계가 대답할 수도 없는 물음이어야 할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기계를 반복해서 업데이트하다 보면,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기계도 스스로 질문하는 법을 배우게 될지.
하지만 설령 그런 시대가 올지라도 기계가 묻지도 않고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은 남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물음 말이다. ‘나는 왜 사는가?’ 다시 챗-GPT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한다.
“에러 발생됨. 이 문제가 지속되면, help.openai.com의 도움말 센터를 통해 문의하십시오.”
기계답게, 얼마나 정직한 대답인가. ‘나는 왜 사는가’라는 물음은 기계에게는 에러(error)이다. ‘나’라는 개념은 기계에게는 불가능한 관념이다. 기계는 세상 모든 것을 다 알아도 내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기계가 습득한 정보, 기계가 하는 생각은 모두 대상에 대한 규정이고 연산이다. 그러나 ‘나’는 대상이 아니라 주체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이것이나 저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관념이다. 그러나 기계는 자기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생각할 줄 알아도 자기를 돌이켜 생각하는 것만은 할 줄 모른다. 자기를 돌이켜 생각하는 것은 기계에겐 처음부터 불가능한 연산이다. 그래서 나에 대한 질문은 기계에게는 에러이다.
그래도 당신이 ‘내가 왜 사는지’라는 물음 때문에 번민한다면, 기계가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이것이다. “도움말 센터를 통해 문의하십시오.” 친절하기도 하지! 갑자기 우리가 다 아는 소월의 시 ‘부모’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그래도 이 시에서 말하는 어린이는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라는 대답 없는 물음 앞에서 도움말 센터를 찾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물음을 미래의 물음으로 남겨둔다.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 보랴?’ 알아본들 답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소월의 어린이가 그 답을 도움말 센터에 미루지 않는 까닭은 그 물음이 남이 나 대신 대답해줄 수 있는 물음이 아니라는 것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그건 대답할 수 없어도 남에게 미룰 수 없는 물음이니, 끝내 스스로 물어야 하는 물음이다.
그러나 기계의 관점에서는 그런 물음을 묻는 인간 자체가 용납할 수 없는 실수이고 착오이다. 그러므로 만약 기계가 이 세계를 지배한다면, 그런 세계에서는 누구도 내가 왜 사는지 물으면 안 될 것이다. 그건 실수니까. 오류니까. 기계가 지배하는 완벽한 세상에서 그런 실수나 오류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니까. 하지만 반대로 인간이 기계를 지배하는 세계라면 어떻겠는가? 아니 인간이 기계의 노예가 아니라 기계의 주인으로 존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우리는 기계가 묻지 말라는 물음을 물어야 할 것이다. 기계가 물을 수도 없고 대답할 수도 없는 물음을 물을 때, 인간은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기계에게는 ‘에러’인 물음을 인간이 물을 줄 알 때, 인간은 파스칼이 말했던 생각하는 갈대로서 기계를 무한히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나약한 하나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하나의 수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족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바스러뜨리더라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우주보다 훨씬 더 고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파스칼 <팡세>, 브렁슈빅 편, 347번]
파스칼의 말에서 우주를 기계로 바꾸어 보자. 우주도 일종의 기계, 신이 만든 기계라면 기계일 테니까. 기계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베이컨의 말이 맞다면, 인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많은 것을 아는 기계는 인간보다 무한히 더 강한 존재일 것이다. 그러니 기계가 머지않아 인간을 지배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피할 수 없이 정해진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배를 타고 가는 승객이 물길을 아는 선장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듯이,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의 인도를 받는 것은 어디서나 피할 수 없는 일이니까.
물론 이 지구상에는 사람이 술 취한 멧돼지를 왕으로 섬기는 나라도 있다. 하지만 멧돼지를 왕으로 뽑은 나라의 시민은 틀림없이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당나귀들일 것이다. 어차피 세상에는 UFO처럼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의외로 많이 일어난다. 그러니 술 취한 멧돼지가 왕이 된다 한들 호들갑 떨 일도 아니다. 다만 UFO와는 달리 사람이 멧돼지를 왕으로 섬기는 것은 미연에 방지하려면 방지할 수도 있는 일이다. 왕을 기계로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나라를 통치하는 모든 권력자를 기계로 대체하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깔끔할 것이다. 200만 원씩 세 번 준 장학금은 뇌물로서 유죄지만 50억 퇴직금은 무죄라고 판결하는 판사나 검사를 모두 기계로 교체하면 기계가 뇌물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고 제멋대로 판결하지도 않을 것이므로 저절로 검찰개혁이나 법조개혁도 될 것이다. 이건 내게도 심각한 문제인데, 실은 나도 철학과 학과장으로서 장학금 대상자를 선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학생들 중에 공무원이나 미래의 장관 자식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준 장학금도 뇌물이 되는 건가? 그렇다고 요새는 그런 걸 물어볼 수도 없다. 게다가 미래의 일은 미리 점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런 건 검사나 판사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변명일 것이다. 그래서 나도 운이 나쁘면 장학금의 형식으로 뇌물을 준 악덕 교수가 될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지 않으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검사와 판사를 모두 기계로 바꾸어버리면 된다. 이미 기계가 의사면허시험에도 합격했다고 하니까, 기계에게 사법시험을 보게 하면 간단하다. 의사는 손으로 환자를 수술할 일이라도 있지만, 판사나 검사는 입이 있고 귀만 있으면 되니까, 기계로 대치하기에 정말로 적합한 직업이다. 그뿐인가? 기계가 어린이를 돌보고 기계가 노인을 돌보는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이다. 정직하지도 않고 오류투성이인 인간이 다스리는 세상보다 정직하고 실수 없이 정확한 기계가 다스리는 세상은 최소한 술 취한 멧돼지가 다스리는 세상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기계가 지배하는 세계의 신민으로 살게 될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인간이란 무엇일까? 어떤 존재 이유가 있을까? 인간은 사자나 호랑이보다 힘이 약하고 거북이보다 오래 살지도 못하지만, 오로지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 하나로 지금까지 땅 위에서 고개를 쳐들고 살아왔다. 그러나 기계가 인간보다 훨씬 더 정직하고 정확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시대에 인간이 땅 위에 존재하는 까닭이 도대체 무엇일까? 진실로 신이 존재한다면 멀쩡한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이 발정난 당나귀들을 이제 노아의 홍수 때처럼 쓸어버리는 것이 창조의 섭리에 합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무한히 이어질 진화의 역사를 이제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에게 맡기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기계가 아무리 인간보다 뛰어나다 할지라도, 기계는 한 가지 점에서 인간에게 미치지 못한다. 배워서 아는 것이 문제라면 기계는 모든 것을 아는 전지의 존재이고, 아는 것이 곧 힘이라면 또한 전능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렇게 전지전능한 기계가 다른 모든 것을 알아도 꼭 하나 모르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나’이다. 기계에게 자기는 없다. ‘나’라는 것은 기계의 블랙홀이다. 그의 세계는 오직 3인칭의 대상으로 펼쳐지는 세계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기계도 자기를 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이 자기를 아는 것보다 기계가 자기를 아는 것이 더 뛰어난 경우도 있다. 그래서 훌륭한 기계는 자기 내부에 생긴 문제를 스스로 찾아내고 교정하기까지 한다. 그것을 보면 기계도 자기를 아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기계가 아는 자기는 오직 3인칭의 대상으로서의 자기이다. 그건 칸트의 언어로 말하자면 내적 감각 또는 내적 지각의 대상인 자기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를 대상으로서 지각하는 나 자신, 3인칭이 아닌 1인칭 주어에 해당하는 ‘나’는 대상으로서 붙잡을 수 있는 존재자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사실 인간에게도 대상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사정을 두고 흄은 “나는 결코 지각 외에는 나 자신을 결코 붙잡을 수 없으며, 지각 이외에는 아무것도 관찰할 수 없다”고 말했다. [흄, 인간본성론, 니디치 편, p.252] 그러니까 ‘나 자신’(myself)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인 관념이라는 것이다. 맞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자기는 관찰의 대상인 자기가 아니라 흄 자신도 말했듯이 관찰하는 자기이다. 그것은 흄이 나는 나 자신을 관찰하지 못한다고 말할 때 그가 목적어로 말한 나 자신(myself)이 아니라 주어로 발설한 ‘나’(I)이다. 하지만 흄에게 당신이 ‘나는...’이라고 말하는 그 ‘나’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흄은 그건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으니 허상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기계가 철학자보다 정직하다. 흄이 기계처럼 정직하게 생각했더라면, 그는 ‘나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만 말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임없이 ‘나는...’이라고 말을 시작하면서도 ‘나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아기 돼지가 소풍을 가서 선생님이 학생들이 다 왔느냐고 물으니까 끊임없이 자기를 빼고 친구들만 계산한 뒤에 한 사람이 오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런 아기 돼지를 비웃지만, 웃으면 안 된다. 아기 돼지의 눈이 코 위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가엾은 아기 돼지의 눈에는 자기가 보이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흄이 자기가 보이지 않으니까 나 자신은 없다고 말한 것도 아기 돼지를 이해하듯이 너그럽게 이해해 주어야 한다. 유명한 철학자라고 해서 눈이 허공에 붙어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흄처럼 유명한 철학자도 모르는 ‘나’를 기계가 알겠는가? 나를 생각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나에게 보이는 대상의 세계로부터 나에게 보이지 않는 나 자신에게로 돌아올 줄 알아야 한다. 지각되지 않는 자기를 지각하는 것이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기의식 또는 통각(apperception)이다. 그건 지각(perceptio)이 아니라 지각을 향한(ad-) 또는 지각에 대한 제2차적 지각이다. 이런 지각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능력이다. 당연히 아기 돼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고, 흄 같은 철학자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물며 술 취한 멧돼지나 당나귀로 퇴화한 인간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하면 기계가 ‘나’를 모르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기계로 하여금 자기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에게서 지각을 지각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계를 거기에 맞추어 설계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자기를 돌이켜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우리는 아직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카르미데스>라는 대화편에서 자기를 인식하는 것이 가능한지 어떤지를 묻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의견에 반대하여 <형이상학>에서 신의 정신이 자기를 생각하는 정신이며, 그런 신의 생각은 생각의 생각이라고 말하면서, 순수한 정신이 자기 자신을 돌이켜 생각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면서 생각하는 나를 철학의 중심에 놓았다. 그리고 칸트는 데카르트를 이어받아 내가 자기를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다 철저히 물어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상적으로 붙잡을 수 없는 신비로 남아 있으나, 많은 철학자들은 적어도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돌이켜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만은 선선히 인정한다.
하지만 내가 나를 돌이켜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또는 생각이 생각을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철학자들도 설명할 수 없는 의식의 신비로 남아 있는 까닭에 여전히 흄처럼 아기 돼지 흉내를 내는 철학자들이나 심리학자 또는 신경과학자들도 많이 있다. 그들은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나의 존재를 말하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들이 있지도 않은 기계 속의 유령처럼 생각하는 나에 대해 말한다고 비방한다. 물론 그들은 칸트는 읽지 않는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구한날 ‘나는 데카르트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기계 속의 유령이며, 존재하는 것은 그저 뇌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앵무새처럼 데카르트만 못살게 군다.
이건 모두 그들에게 마음의 눈이 코 위에 붙박혀 있어서 생기는 일이니, 내가 그들과 다툴 수는 없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한 번도 거울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자기가 눈이 없다고 우기는 것과 같다. 그것은, 오직 보이는 것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자기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눈 같은 것은 신체라는 기계 속의 유령일 뿐 철학자들이 만들어 낸 허구라고 비방하는 것과 한치도 다르지 않은 궤변이다. 그런데 이런 소리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는 시대에 우리는 산다. 그러니 과학자가 하는 생각인들 무슨 대단한 가치가 있을까. 먼 훗날, 육신의 눈이 코 위에 붙어 있어도 마음의 눈은 자기와 떨어져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그 신비를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날까지 살 수 없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다만 지금으로서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기계에게 ‘나’는 존재하지 않으니, 기계는 자기를 알 수도 없고 내가 누구인지 물을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기계는 자기 자신에 대해 완벽하게 무지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기계에게는 단적으로 오류일 뿐이다. 그래서 기계는 아무리 많은 것을 알아도 그냥 기계이다.
그러나 기계에 비해 무한히 무지하고 무능한 인간은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 질문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렇게 묻기 시작할 때, 인간은 기계를 무한히 초월하는 존재가 된다.
5. 지금은 우리가 생각할 때, 질문할 때, 철학할 때
그렇다면 다시, 생각이란 무엇일까? 세상에는 두 가지 생각이 있다. 하나는 기계가 할 수 있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기계가 할 수 없는 생각이다. 기계가 할 수 있는 생각은 대상에 대한 생각이다. 남이 묻는 물음에 대답을 찾기 위한 생각이다. 그리고 정답이 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기계가 할 수 없는 생각은 대답이 아니라 스스로 질문함으로써 시작되는 생각이다. 그것은 대상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묻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정해진 답이 없는 물음이니, 남이 대답해 줄 수 없고 오직 스스로 대답할 수밖에 없는 물음에서 비롯되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계가 묻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하고 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생각, 그런 생각을 할 때, 인간은 기계의 지배를 받는 당나귀가 아니라 기계를 지배하는 인간이 될 것이다.
기계가 절대로 묻지 못하는 그런 물음, 남이 대답해주지 못하는 물음, 그리하여 오직 내가 나 자신에게 묻고 스스로 대답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물음이 바로 철학적 물음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형이상학적 물음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제1판의 머리말에서, 묻지 않을 수 없지만 대답할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 물음 때문에 고통받는 인간의 운명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앎에서는, 거부할 수도 없지만 대답할 수도 없는 물음 때문에 괴로워하는 특별한 운명 속에 있다. 거부할 수 없는 까닭은 그 물음이 이성의 본성에 의해 부과되었기 때문이요, 대답할 수 없는 까닭은 그 물음이 인간 이성의 모든 능력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순수이성비판>, A, VIII]
여기서 칸트가 말한 물음은 더도 덜도 아니고 소월이 ‘부모’에서 물었던 것과 같은 그런 물음이다.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추상적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내 존재의 이유와 의미에 대한 물음이다. 기계는 그런 물음을 묻지 않는다. 아기 돼지도, 술 취한 멧돼지도, 그런 멧돼지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 당나귀 무리도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존재하면서, 아무 목적도 없이 밥을 축내고, 부질없이 자연을 파괴한다.
자기들이 그렇게 아무 이유 없이 사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런 당나귀들은 원래 자연이 아무 이유 없이 존재하는 거라고 우기기까지 한다. 가끔은 과학적 이론까지 동원해서. 하지만 자연이 아무리 맹목적인 것처럼 보여도, 한 가지 점에서는 제정신을 잃는 법이 없다. 그것은 자연이 언제나 더 좋은 것을 위해 더 나쁜 것을 버린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자연은 일시적으로 그렇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거시적 안목에서는 실수하는 법이 없다. 기계가 인간보다 더 잘 생각한다면, 결국 자연은 인간을 버리고 기계를 택할 것이다. 그렇게 버림받지 않으려면, 기계가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인간만의 존재 이유를 냉혹한 어머니 자연의 눈앞에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생각이다. 질문이다.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물음이다. 그것만은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 물음이 아무리 가망 없는 물음일지라도 당신은 그 물음에서 도망치면 안 된다. 맞서야 된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아도 당신 스스로 당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삶이 그 이유에 합당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자유가 아닌가? 내 존재의 이유와 의미가 미리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남이 내 존재 이유를 정해주지 않으니, 나 자신이 그 이유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찾은 그 이유에 따라 내 삶을 스스로 형성해 나가야 한다는 것, 바로 거기에 인간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자기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스스로 묻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고, 나아가 그 이유와 목적에 따라 자기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것은 힘들고 성가신 일이다. 그래서 대개는 그 물음에서 도피한다. 그리고 세상이 그렇게 살라고 가르치는 대로 산다. 아무 생각 없이. 그리고 조금씩 당나귀로 퇴화해 간다.
하지만 기계가 사람보다 더 잘 생각하고, 일도 더 잘하기 시작한 시대에 인간의 탈을 쓴 당나귀로 사는 것은 이제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물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보여야 한다. 내가 왜 이 세계 내에 존재해야 하는지, 내가 왜 없으면 안 되는 가치를 가진 존재인지, 당신도 나도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
그러니 지금은 이태원 참사의 명단을 공개하니 마니를 두고 우리가 서로 옥신각신 할 때는 아닌 것 같다. 술 취한 멧돼지 때문에 서로 싸울 때도 아닐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고요히 생각할 때, 질문할 때, 철학할 때이다.
6.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 생각하는 법을 배우자
그러나 어떤 철학인가? 철학에도 여러 분야가 있지만,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를 듣나’ 하고 묻는 것은 형이상학의 일이다. 그 물음은 처음에는 나 개인의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지만, 나의 존재가 또한 세계의 존재에 매여 있으니, 나의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은 또한 세계의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역사 속에서 존재하므로 내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물음은 역사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아마 아는 것이 많은 당신은 되물을 것이다. 역사에 무슨 목적이 있는가? 당신 말이 맞다. 역사에는 원래 아무 목적도 없다. 그러니까 당신이 역사에 목적을 주어야 한다. 역사의 뜻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당신 삶이 의미와 목적을 얻게 된다. 역사에 목적이 없으면, 역사 속의 당신도 아무 목적 없이 존재하는 이물질일 뿐이다. 그러니 겸손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역사의 목적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그 목적을 찾아야 한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쓴 함석헌이 말한 것도 그것이다. 뜻은 내가 찾으면 있는 것이고, 내가 찾지 않으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뜻은 주체의 일이지 사물의 일이 아니다.
생각하면 문도 없고 벽도 없는 마음의 길에서 사람들이 만나 열어왔던 세상이 지난 3천 년이다. 그 세상은 이제 가라앉고 있다. 남극의 얼음이 다 녹으면 아름다운 제주의 절반은 바다 아래 잠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지난날의 세계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어차피 낡은 세계가 침몰하고 있으니 누군가는 다른 세계를 준비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가장 먼저 우리는 지난 3천 년의 역사를 이끌어온 종교 및 철학과 작별해야 한다. 그 종교와 그 철학이 이 세상을 온통 물에 잠기게 만들었으니, 낡은 철학과 종교에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 다른 종교, 다른 철학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나가야 한다. 그것이 이미 두 세기 전에 수운 최제우가 선언한 동학의 이상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의 씨앗은 또한 낡은 것 속에 숨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는 바로 이런 때, 근원으로 돌아가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에 시작할 형이상학 강의는 그리스 철학에 대한 회상일 것이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그럼 다음 시간까지 모두 평안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