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도 확 바꿔놓은 100년 전 을축 대홍수

유례없는 폭우로 사망 647명, 이재민 10만 4934명

한강 물줄기 바뀌면서 강북이던 잠실이 강남으로

잠에서 깨어난 백제 풍납토성과 암사동 선사유적

기후변화로 기상 이변, 언제든 또 닥쳐올 자연재해

2025-07-05     이희용 줌렌즈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이번 수해로 용산서(龍山署) 관내에 침수된 가옥은 전부 3695호에 그 손해가 11만 1850원이오. 기타 교량 붕괴, 가옥 붕괴, 도로 파괴, 전답 침수 등을 합하면 용산 관내에만 약 15만 3000원가량이며 뚝섬에 전부 1300호가 침수되며 그 손해가 근 10만 원가량 되더라.”

1925년 7월 13일 조선일보가 ‘漢江(한강) 增水(증수) 三十六尺(36척)/ 沿江(연강) 一帶(일대) 侵水(침수) 四千餘戶(4000여 호)/ 근년에 드문 대홍수로 손해 수십만’이란 제목 아래 보도한 기사의 첫 대목이다.

“비는 밤낮으로 하늘이 꺼진 것같이 퍼부어”

 

을축년 대홍수 소식을 담은 조선일보 1925년 7월 13일자 2면(왼쪽)과 동아일보 7월 18일자 2면.

5일 뒤 동아일보는 ‘慘憺(참담)한 災後(재후)의 廢墟(폐허)에 再次(재차) 掩襲(엄습)한 濁流(탁류)의 暴威(폭위)/ 上流(상류)의 暴雨(폭우)와 下流(하류)의 潮水(조수)로 增水率(증수율)은 一時間(1시간)에 三尺三寸(3척3촌)/ 潮水(조수) 膨脹(팽창)으로 漢江(한강) 逆流(역류)’란 제목의 기사로 홍수 소식을 전했다.

“15일 저녁부터 오기 시작한 비는 조금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하늘이 꺼진 것같이 퍼부어서 물나라를 겪은 경성(京城) 일대는 다시 물세례를 받게 되었다. 먼젓번 홍수에 불어난 한강물이 넉 자만 더 줄면 수준점에 달할 만큼 되었으나 16일 오후 9시부터 다시 불기 시작하더니 17일 오전 6시경에는 벌써 30척이나 불어 동서 이촌동과 마포 일대와 둑도(纛島·뚝섬) 전면은 물결치는 붉은 바다로 변하였다.”(현대식 표현으로 바꿨음)

같은 날 조선일보는 두 차례 호외를 발행해 ‘四千(4천) 生命(생명)이 風前燈火(풍전등화)’, ‘纛島(둑도) 堤坊(제방) 畢竟(필경) 決潰(결궤·둑이 무너짐)로 五千(5천) 生命(생명) 危機(위기) 切迫(절박)’, ‘金浦(김포) 紅島村(홍도촌) 全滅(전멸) 五百(5백) 生命(생명)이 頃刻(경각)에 있다’, ‘宛然(완연) 戰場(전장)! 지옥같이 된 뚝섬 방면의 정보’ 등의 제목을 달아 긴박한 상황을 알렸다.

 

1925년 7월 18일자 조선일보 호외.

태풍 5개 지나며 전국에 물 폭탄 쏟아부어

‘물난리의 대명사’이자 ‘20세기 한반도 최악의 수해’로 꼽히는 을축년(乙丑年) 대홍수가 일어난 지 올해로 꼭 100년이 됐다. 1925년은 경성(서울)이 급속히 도시화되던 시기였다. 수리 방재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한강변에 인구가 밀집해 피해 규모가 컸다.

그해 7~9월 석 달간 태풍 4개가 한반도에 상륙하고 1개가 서해상을 지나며 전국에 물 폭탄을 쏟아부었다. 을축년 대홍수라고 하면 이 가운데 서울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7월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수해를 일컫는다.

7월 6일 필리핀 동쪽에서 발생한 태풍은 7월 12~13일 한반도 중부를 통과했다. 갑자기 내린 비로 한강물이 불어나 뚝섬과 용산 일대를 덮쳤다. 피해를 미처 복구하기도 전인 5일 뒤 또 다른 태풍이 황해도에 상륙해 많은 비를 뿌렸다.

 

용산 일대가 물에 잠긴 모습.(서울역사박물관)

2차 홍수 때는 인천 앞바다의 만조로 바닷물이 한강을 따라 역류해 피해를 가중시켰다. 당시 한강대교 기준 수위는 11.76m(표고 12.23m)였는데, 지금까지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서울 강우량은 7월 9~11일 387.8㎜에 15~19일 590.9㎜였으니 불과 8일 만에 1년 내릴 비의 90%가 퍼부은 것이다. 8월 3차 때는 관서 지방에 집중호우가 내려 대동강·청천강·압록강 등이 범람했다. 9월 4차 때는 낙동강·영산강·섬진강이 넘쳐 남부 지방이 물에 잠겼다.

4차례에 걸친 홍수로 전국에서 647명이 숨졌고 10만 4934명의 이재민을 냈다. 1959년 사라호 태풍 때의 피해 규모(사망 849명, 이재민 37만 3459명)보다는 작지만 그때까지 역대 최대 규모였고, 피해 지역이 서울에 집중돼 언론의 주목을 훨씬 더 받았다.

가옥 붕괴 1만7000여 호, 가옥 침수 4만 6000여 호, 유실된 논과 밭 3191만㎡(960만 평)과 6699만㎡(2030만 평) 등으로 총 피해액은 1억 300만 원이었다.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 예산의 58%에 달하는 금액으로 지금 화폐 가치로 따지면 1조 원이 훨씬 넘는다.

 

무너진 한강철교.(서울역사박물관)

지금의 이촌2동(서부이촌동), 뚝섬, 잠실, 송파, 신천, 풍납동 일대의 마을이 유실됐고 용산, 마포, 영등포의 주택 대부분도 침수 피해를 봤다. 한강변이 아닌 서울 도심의 종로구 안국동과 관훈동 등도 침수 피해를 면하지 못했다.

한강철교와 인도교(지금의 한강대교)가 무너져 기차 운행과 차량 통행이 중단되는가 하면 노량진 수원지와 뚝도 정수장, 당인리 화력발전소가 물에 잠겨 서울의 상수도와 전기도 끊어졌다.

송파나루가 한강변 아닌 석촌호수가에 있는 까닭

잠실은 원래 지금의 서울시 광진구 자양동에 붙어 있던 강북이었다. 뽕나무를 많이 심어 누에를 기르던 곳이었다. 잠실 서남쪽에는 ‘물 위에 뜬 섬마을’이란 뜻의 부리도(浮里島)도 있었다. 종합운동장과 아시아선수촌아파트 등이 들어선 곳이다.

 

1910년 잠실 일대 지도. 오른쪽 아래 큰 섬(잠실) 남쪽으로 한강 본류인 송파강이 흐르고 북쪽으로 지류인 신천이 흘렀다.

1520년(중종 15년) 홍수로 샛강이 생겨 잠실이 섬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샛강 너머)여의도가 한강 이남의 영등포구에 속하듯이 한강 이북으로 여겼다. 이때 생겨난 하천을 신천(新川·새내)이라고 불렀다. 지하철 잠실 새내역(구 신천역)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신천은 여의도와 영등포 사이 샛강처럼 수심이 얕아 배가 지나기 어려웠다. 송파강이라고 불린 본류는 여전히 잠실 남쪽으로 흘렀다. 조선 시대에는 서울 주변의 한강을 경강(京江)이라고 불렀고 지역에 따라 서강, 용산강, 노들강, 동작강, 동호, 서호 등으로 나눠 불렀다.

한강 상류에서 배로 싣고 온 목재·곡식·옹기 등의 장이 섰던 송파나루(松坡津)와 군대가 주둔한 송파진(松坡鎭),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한 삼전도(三田渡·삼밭나루) 등은 지금의 한강변이 아닌 석촌호수 남쪽에 있었다. 지하철 송파나루역과 삼전역이 들어선 자리다.

 

1963년과 2017년 잠실 주변의 개념도.

을축년 대홍수가 덮치자 잠실을 감돌아 흐르던 한강 본류는 잠실 북쪽으로 직류했다. 본류와 샛강이 뒤바뀌어 송파강이 샛강이 되고, 샛강이 한강이 됐다. 강북이던 잠실은 강남으로 둔갑했다. 순식간에 서울 지도가 달라진 것이다.

송파나루는 1960년대까지 뚝섬을 잇는 정기선 선착장으로 쓰이다가 1971년 한강 공유수면 매립사업으로 송파강이 메워져 나루터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에 따라 잠실도와 부리도는 육지가 됐다. 그 대신 강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자 잠실 북쪽의 강폭을 넓혔다. 이때 파낸 모래는 주변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는 데 썼다. 석촌호수는 송파강을 메우고 남은 흔적이다.

망원정·산영루 유실되고 북한산성 행궁도 매몰돼

을축년 대홍수로 사라진 문화유적도 적지 않다. 세종의 형 효령대군이 별장으로 짓고, 성종 형 월산대군이 증축한 마포구 망원동의 망원정(望遠亭)도 통째로 휩쓸려갔다. 지금 합정동에 있는 망원정 건물은 1988~1989년에 위치를 옮겨 복원한 것이다.

북한산성과 탕춘대성도 훼손됐다. 북한산 중흥사 인근 비석거리 앞의 산영루(山映樓)는 풍치가 빼어나 정약용과 김정희 등 시인 묵객과 명사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주춧돌만 남고 다 떠내려갔다가 고증을 거쳐 2015년 새로 지었다.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행궁 일부는 산사태로 매몰됐다.

 

1911년 독일의 베버 신부가 찍은 북한산 산영루. 이 사진을 토대로 유실된 산영루를 복원했다.

청계천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곳에 놓인 살곶이다리도 일부 유실됐다가 1972년 복원했다. 홍수로 넓어진 하천 폭에 맞추느라 27m가량의 콘크리트 다리를 잇대어 증설해 원형을 잃었다. 전설상의 군신(軍神) 치우천왕(蚩尤天王)에게 제향을 올리던 뚝섬의 사당 둑신사(纛神祠)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마을의 정약용 생가 여유당(與猶堂)도 완전히 유실됐다. 지금 건물은 1988년 복원한 것이다. 이 집에는 부인 치마를 오려내 두 아들에게 쓴 편지를 엮은 하피첩을 비롯해 목민심서·흠흠신서 등 정약용의 저서를 담은 궤짝이 있었다. 집에 물이 차자 식구들은 모두 대피했으나 4대손 정규영은 궤짝을 버리고 갈 수 없다고 버티다가 다행히 구조하러 온 배를 타고 무사히 옮길 수 있었다.

뜻밖에 반가운 소식도 들려왔다. 수마(水魔)가 할퀴고 간 지금의 강동구 암사동 일대 모래톱에서 기원전 500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토기 조각이 쏟아져나온 것이다.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와 풍납토성 터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청동자루솥.(국립중앙박물관)

이후 발굴 조사로 선사시대 주거지가 확인되고 옹관묘, 돌칼, 돌화살, 그물추, 옥제 장신구 등이 출토돼 국내에서도 대표적인 선사유적지로 자리 잡았다. 암사동 선사유적박물관은 ‘선사 예술가 특별전’ 등 유적 발견 100주년 기념행사를 펼치고 있다.

백제의 궁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은 1916년 조선총독부 조사 때까지도 백제 토성이 있던 자리로 간단히 보고됐을 뿐이었다. 한강물이 넘치며 토성 서벽 인근이 쓸려나가자 1500년 이상 잠자던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해 8월 일본인 학자 세키노 다다시는 청동자루솥과 항아리 등을 발견했다.

봉은사 경내에 세워진 청호 스님 공덕비

유례없는 재난이 발생하자 조선총독부는 구호와 복구 등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조선 수해 이재자 구제회(朝鮮水害罹災者救濟會)’란 단체를 만들어 의연금 모집에 나섰다. 신문사와 청년회 등도 모금에 앞장섰고, 피해 지역 인근 주민들도 팔을 걷어붙인 채 복구를 도왔다.

당시 봉은사 주지 청호 스님은 잠실도와 부리도에 고립된 이재민 708명을 구했다. 절 재산을 털어 여러 척의 배를 사들인 뒤 “사람 1명 구조하는 데 10전씩 주겠다”며 사람들을 모아 수몰 직전의 집 지붕에 올라가 있던 사람, 강물에 떠내려오던 사람, 나무에 매달려 있던 사람 등을 구해냈다.

 

봉은사 경내에 있는 청호 대선사 공덕비(왼쪽)와 송파근린공원의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서울역사박물관)

덕분에 목숨을 건진 나준식 등은 감사의 뜻으로 1929년 ‘청호을축홍수구제기념비(晴湖乙丑洪水救濟記念碑)’를 봉은사 경내에 세웠다. 스님 공적을 기리는 책 ‘불괴비첩(不壞碑帖)’도 펴냈다. 이상재, 정인보, 오세창 등 민족 지도자들이 의로운 행동을 칭송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일본에서도 성원이 답지했다. 독립운동가 박열과 의열단원 김지섭·김시현 등을 변호하고 한국 농민들을 도운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조선 수재민 구호운동을 벌여 성금과 후원 물품을 전달했다.

대대적인 치수 사업에도 수해는 끊이지 않아

일제는 을축년 대홍수를 계기로 한강과 지천의 둑을 정비하는 등 대대적인 치수 사업에 나서는 한편 이촌동 등 저지대 주민을 이주시키고 영등포를 개발해 서울을 한강 이남으로 확장했다. 해방 후에도 서울 홍수 대책은 관련 부처와 당국의 최대 관심사였고, 전두환 정권 들어 범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한강 개발에 나섰다.

그럼에도 홍수로 인한 수해는 끊이지 않아 물난리가 날 때마다 을축년 대홍수의 기억이 소환됐다. 1972년 망원동 침수, 1984년 망원동·풍납동 수해, 1990년 일산 한강둑 붕괴 등의 수재가 일어날 때마다 언론들은 ‘을축년 대홍수 이래 처음’, ‘을축년 대홍수 웃도는 재난’, ‘을축년 악몽 떠올라’ 등의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학자들은 기후변화에 따른 폭염, 한파, 가뭄, 태풍, 폭우 등 기상 이변이 이전보다 훨씬 자주 찾아올 것으로 예고하고 있다. 을축년 대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일상이 되고, 해마다 각종 날씨 지표가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한다는 것이다. 우울하고 두려운 전망이다.

 

지구의 날인 22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기후위기비상행동 주최 '기후재난과 민주주의 위기, 생명돌봄의 정치가 필요하다'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2025.4.22.

치수 시설을 보완하는 등 각종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탄소 발생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땜질식 처방에 불과할 뿐이라는 지적이 높다.

자연은 이미 여러 차례 경고장을 보냈다. 100년 전 을축년 대홍수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를 무시한 채 개발과 성장만을 추구하다가 지구 환경을 망가뜨렸다. 그 업보로 공포스러운 미래를 눈앞에 두고 있다.

 

관련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