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소환되는 '불편한 진실꾼' 조지 오웰
단순한 문학적 영향 넘어서는 '감시사회' 경고
'1984'의 '빅 브라더' "영국도 가능" 직설
‘동물농장’ 남의 나라 얘기인 척 영국 지적
BBC 경력으로 언론 독립 강조 영감 얻어
죽은 지 70년 넘어서도 살아있는 목소리
35년을 영국에서 살면서 이 나라 사람들이 조지 오웰을 언급할 때는 으레 묘한 표정을 짓는다는 걸 느낀다. 자랑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마치 '우리 집 막내는 똑똑하긴 한데 입이 너무 거칠어' 하고 말할 때 그런 표정 말이다.
예언자인가, 골칫덩이인가
조지 오웰(본명 에릭 블레어, 1903-1950)은 영국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영국인들에게 "자, 거울 좀 봐요"라고 말하는 불편한 역할을 자처했다. 문제는 그 거울이 너무 선명해서, 보고 싶지 않은 것까지 다 보여준다는 점이다.
오웰의 소설 <1984>를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한국에서 온 나에게는 '빅 브라더'가 그리 낯설지 않지만, 영국인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설마 우리나라가?"라고 생각했겠지만, 오웰은 냉정하게 말했다. "어느 나라든 가능해요."
동물농장의 진짜 타깃
<동물농장>은 겉으로는 소비에트 체제를 비판한 우화다. 하지만 영리한 영국 독자들은 금세 깨달았다. 이 이야기가 꼭 소련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은 더 평등하다'는 그 유명한 문장을 읽으며, 영국의 계급사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오웰의 천재성은 여기에 있다. 남의 나라 이야기인 척하면서 자국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 마치 한국 드라마에서 조선시대 배경으로 현대 정치를 비판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영국 사회에 던진 불편한 질문들
오웰이 영국사회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건전한 의심'의 문화를 심은 일이다. 그는 영국인들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정부가 '국민을 위해서'라고 할 때 조심하세요. '평화를 위한 전쟁', '자유를 위한 통제' 같은 말에 속지 마세요."
이런 메시지는 특히 2차 대전 이후 영국사회에 강력한 파장을 일으켰다. 전시 중 정부의 검열과 프로파간다를 경험한 영국인들에게, 오웰의 경고는 귓가에 맴도는 경보와 같았다.
BBC와 언론에 미친 영향
재미있게도 오웰은 BBC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그때의 경험이 <1984>의 '진리부'를 만드는 데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영국의 공영방송 BBC는 지금도 오웰의 영향을 받고 있다. 정부로부터의 독립성을 강조하고, 권력을 감시하는 언론의 역할을 중시하는 문화 말이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진리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은 확실히 자리 잡았다. 이것이 바로 오웰의 유산이다.
정치인들의 사랑과 미움
영국 정치인들과 오웰의 관계는 복잡하다. 모든 정파가 오웰을 인용하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모든 정파가 오웰에게 공격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보수당은 오웰의 반공주의를 좋아하지만, 계급비판은 불편해한다. 노동당은 사회 비판정신은 환영하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냉소는 달갑지 않아 한다. 결국 오웰은 모든 정치인에게 '불편한 동지'가 되었다.
현대 영국에서의 오웰
브렉시트 논쟁 때도, 코로나19 팬데믹 때도, 영국인들은 오웰을 소환했다. "이게 오웰이 경고했던 그것 아닌가?"라고 말이다. 정부의 감시체계가 강화될 때마다, 언론자유가 위축될 때마다, 영국인들은 오웰을 떠올린다.
이런 반응을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오웰의 진짜 영향력은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준 것이라고. "이게 정말 맞나?", "혹시 속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묻는 습관 말이다.
문화적 DNA에 새겨진 오웰리즘
지금 영국에서는 'Orwellian'(전체주의적인)이라는 형용사가 일상어가 됐다.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것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That's very Orwellian"("그건 완전히 전체주의적이야")이라고 하면, 모든 영국인이 무슨 뜻인지 안다.
이는 단순한 문학적 영향을 넘어선다. 오웰의 사상이 영국인의 문화적 DNA에 새겨졌다. 권력에 대한 건전한 의심, 언어의 왜곡에 대한 경계심, 자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 등이 그것이다.
아이러니한 유산
아이러니하게도, 오웰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 중 하나인 '감시 사회'는 어느 정도 현실이 되었다. CCTV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 중 하나가 영국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에 대한 비판적 논의도 가장 활발한 나라가 영국이다. 이것도 오웰의 유산이다.
여전히 살아있는 목소리
조지 오웰이 세상을 떠난 지 70여 년이 넘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영국 사회 곳곳에서 들린다. 그는 영국인들에게 "편안함에 안주하지 말라"고 계속 속삭이고 있다. 영국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자기비판 능력이라고 느껴진다. 그리고 그 능력의 상당 부분은 조지 오웰 같은 '불편한 진실꾼'들이 길러주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영국이 그리워지고, 영국에 있을 때는 한국이 그리워지는 나 같은 '이중감정자'에게는 오웰의 메시지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어느 나라든, 어느 체제든 완벽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하고, 개선해야 한다.
오웰이 영국에 남긴 가장 큰 선물은 책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정말 그럴까'라는, 간단하지만 강력한 질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