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이회영 일대기를 목판화에 새긴 이동환 작가

각각 5~6년에 걸쳐 140, 220개 판 완성

세월호 침몰, 윤 정부 횡포가 작품 원동력

2025-04-29     임종업 에디터

 

판각 틈틈이 완성한 한국화 '미치광이' 시리즈 앞에 선 작가. 

“네 그림 준다고 할까 봐 무섭다고 그래요. 누나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그 말이 자부심으로 다가왔어요. 현대미술이 지나치게 상업화하면서 그림이 치사해지고 있거든요. 인테리어 장식품으로 전락했다고 할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남들 취향에 맞추기보다 제 의지로 풀어나가고 싶어요.”

한국화 작가이자 판화가인 이동환(b1968) 작가는 지난 25일 경기도 파주시 분수리 작업실에서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털어놨다. 그는 2018년 장준하의 파란만장 일대기를 140여 개 판화작품으로 재구성한 바 있다. ‘칼로 새긴 장준하’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묶어 3쇄를 찍었다. 그래봤자 1500부다. 2023년에는 진천군립생거판화미술관에서 특별기획전 형식으로 펼쳐 보였다. 관객이 많이 들었다지만 지역미술관에서다. 돈 버는 데 젬병인 작가는 뭘 먹고 사나?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요. 동화책 삽화, 타일벽화 제작, 대학 보따리 강사 등등. 얼마 전에는 디엠젯 민간인 마을 대성동에 품팔러 다녀왔어요. 애 엄마가 교사라 그나마 유지가 돼요. 수입이 많지 않지만 그런대로 아이들 셋을 키웠어요. 잘 자라준 거죠.”

작가는 최근 혁명가 이회영 일대기를 220여 개 판화작품으로 집대성해 전시와 출판을 앞두고 있다. 장준하 일대기를 완성한 직후인 2018년 착수해 올해 초 매듭지었으니 장장 6년에 걸친 대공사다. 조각도를 움켜쥐고 딱딱한 나무판을 파내느라 손떨림이 생겼다는 그는 국을 떠먹을 때 증세를 체감한다고 했다. “전에는 글씨를 잘 쓴다는 말을 들었는데”라며, 오른쪽 어깨 회전근 파열도 목판작업 후유증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했다.

 

판화 원판이 가득 꽂힌 작업실 붙박이장.

장준하, 이회영 목판 원판이 가득 꽂힌 붙박이장 앞에서 그동안의 경과를 설명하는 그한테서 자부심이 묻어났다. 이회영 목판 3분의 1은 경기도미술관 ‘한국 현대 목판화 70년: 판을 뒤집다’ 전시 기획자가 쓸어가 비어있는 상태다. 1958년 한국판화협회 창립을 기점으로 한국 현대목판화 70년을 되돌아보는 전시는 이례적으로 이동환 작가 몫으로 벽 하나를 할애했다. 조진호, 홍성담, 김진수, 김경주, 이상호, 전정호, 홍선웅, 김봉준, 이인철, 김준권, 손기환, 김억, 류연복, 최병수, 박경훈, 이윤엽 등 1980년대 민중미술로 불리는 현실주의 미술운동의 계보를 잇는 젊은 작가에 주목한 것이다. 대부분 70줄에 든 작가들 가운데 50대 이동환은 단연 눈에 띌 수밖에. 게다가 독립운동사에 우뚝 선 두 거인의 삶을 잇달아 작품화하는 일은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일임에랴.

칼로 새긴 장준하. 

“장준하 작업을 끝 낸 뒤 분에 넘친 칭찬을 듣고 룰루랄라 하고 있었는데 다음 작품을 준비해야 하지 않느냐는 주변의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전태일 열사, 김수환 추기경을 염두에 두고 자료를 뒤졌다. 전태일 열사의 경우 만화 일대기를 보고 그 작품성을 뛰어넘을 자신이 없었고, 김수환 추기경은 스토리가 정적이어서 이를 시각화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낙점한 인물이 이회영(1867~1932)이다.

자산을 모두 팔아 일가 6형제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무장투쟁에 앞장, 아나키즘에 심취해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항일구국연맹 등을 창설, 국내외 단체와 연대,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시설파괴, 요인암살을 지휘, 한인 교포의 밀고로 체포되어 고문으로 최후를 마친 인물이다. 혁명가의 삶 자체가 드라마틱하려니와 한국 독립운동사와 중첩돼 작품화하기에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추적을 피하려 메모나 일기를 남기지 않아 그의 삶을 재구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던 차 ‘서간도시종기’를 보고 결심을 굳혔다.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이 기억을 되살려 1966년에 출간한 자전수기다. 지근거리에서 남편을 지켜보고 기록한 것이어서 현장감이 뛰어난데다 가족이나 동료 독립운동가들의 근황까지 들어있어 이회영의 삶이 입체적으로 보였다.

 

 

텍스트로서의 얼개를 갖춘 것과 이를 시각화하는 일은 별개다. 시각자료를 미친 듯이 찾았다고 했다. 하지만 직접적인 인물자료는 기념사진 4~5장이 고작이고 그나마 중국복식 차림이었다. 나머지는 참고자료들. 이러한 핸디캡이 작가한테는 되레 도전이 되었다. 시종기를 여러 차례 숙독하며 시간 경과에 따른 씬을 만들어갔다. 그는 강점기 여성노동운동가 강주룡의 예를 들었다. 흑백사진 속의 강주룡은 을밀대 지붕에 올라가 쪼그려 앉은 모양이지만, 언론에 의해 선택된 장면일 뿐, 그 자세 5분 전에는 종주먹을 쥐고 노동해방을 외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수집한 관련자료에서 작가의 상상력을 보태 당시 상황을 파워풀하게 각색했다. 당시 자금성, 제암리 흑백사진을 참고하고 베이징 뒷골목을 찾아가 스케치하면서 주인공의 활동 배경을 되살려냈다. 안중근, 한용운, 윤봉길, 김구, 이봉창 등 익히 알려진 인물들은 몇 개의 선으로 특징을 잡아내 근사하게 표현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한국화에서 다져진 시각화 훈련이 큰 도움이 됐다고 털어놨다.

220개로 완결한 작품의 가제는 ‘칼로 새긴 독립전쟁’. 이회영의 연대기적 활동을 중심으로 한 도도한 독립운동사다. 리얼하게 묘사한 씬을 기본으로 하되 씬과 씬 사이는 작가의 상상력을 녹여넣는 식이어서 다양한 기법을 채용할 수밖에 없었다. 피나무와 자작나무 합판 등 두 가지 판에 새긴 것은 그런 연유다.

“피나무는 재질이 물러서 칼이 쉽게 나가요. 크게 뜯겨나가는 성질이 있어서 서정적이고 회화적인 맛을 살리기에 제격이죠. 반면 자작나무는 단단해서 미세한 선으로 서사적인 장면을 새기기에 적당합니다. 전자는 나무 맛, 후자는 칼 맛이 난다고 할까요?”

장면에 따라 나무 맛, 칼 맛을 살렸다지만 대체로 회화성이 두드러진 게 특징이다. 한때 사실성을 살리려 대상의 형태나 비례에 충실하려 시도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흡사하게 새긴 것을 막상 찍어놓고 보니 별 감흥이 없더라고 했다. 미세함보다 단순함이, 정확보다 왜곡이, 팔등신보다 삼등신이 훨씬 리얼하게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는 이회영이 고문 후유증으로 숨지는 장면을 예로 들었다. 애통한 심정으로 망치를 두들기다가 판이 쩍 갈라졌다. 이를 이어붙여 살렸더니, 망치로 찍어 만든 점들보다 갈라진 틈이 만든 흰색 선이 혼이 떠나는 정경에 딱 맞더라며 판이 갈라진 게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한국현대사 대작. 

작가는 장면마다 들인 시간이 다르다고 했다. 아이디어가 쉽게 떠오르는 것은 짧고, 그렇지 않은 것은 길다는 것. 잘 나갈 때는 하루에 네 판을 새겼고, 그렇지 않을 때는 며칠이 걸렸단다. 장준하 때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새겨가다가 막히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까지 손을 놨는데, 이번에는 후속 작업을 이어가며 고민이 무르익기를 기다렸단다. 작업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낙관, 또는 기다림의 미학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기본 크기는 20×30, 25×35cm. 큰 것은 122×120cm, 작은 것은 15×15cm.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에 따라 구도나 스케일에 변주를 주었다. 대체로 출판에 적당한 크기다. 작가의 성정으로 보아 욕심을 부릴 만도 한데? 그는 한켠에 세워둔 대형 합판을 차례로 펼쳐보였다. 60×120cm짜리 15개를 이어붙인 대작이다. 동학, 한일합방, 삼일운동, 독립투쟁, 해방까지 한국 현대사를 형상화했다. 장대한 태백산맥에 잇닿은 용맹한 호랑이로써 한국인의 기상을 바탕에 깔았다.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판각에 몰두하게 했을까. 장준하, 이회영이 훌륭한 인물이어서?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거창한 무언가를 기대했지만 그의 답은 뜻밖이었다.

장준하의 경우, 우연히 들른 동네책방에서 집어든 ‘돌베개’가 원인이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기성세대의 말을 따른 아이들이 어이없이 숨져간 세월호 사건으로 무기력에 빠져있던 그에게 용렬한 위정자 탓이 큰 국망의 상황에서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간 장준하의 삶은 큰 위안이 되었다. 책을 그대로 책꽂이에 반납하기엔 가슴이 너무 벅차 목판을 잡았다. 애초 서른 개 정도 예상했다가 일이 커졌다.

이번 이회영은 윤 정권의 무도함이 동력이었다. 세월호 때만큼이나 무력했고 이를 견디기 위해서는 장준하에 준하는 귀감이 필요했다. 조각도를 잡고 한 판 한 판 새기며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자문했다. 작품의 완성을 윤 정부 공으로 쳐야 하는지 아이러니다. 하지만 작년 12월부터는 칼을 놓았다. 국난을 맞아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다. 작가는 일 속으로 도피하기보다 맞서기를 택했다. 어지러운 역사는 몸으로 기억해야 오래 간다는 지론이다. 형편이 닿을 때 광화문 집회에 나가 동료작가들과 함께 깃발을 잡았다. 

작가는 3년 전 이곳 분수리로 작업실을 지어 옮겨 왔다. 이회영 작품에 바뀐 분위기가 조금은 반영되었지 싶다. 심기일전해 하고 싶은 작업은 한민족의 디아스포라. 연해주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떠올리겠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일본, 중국, 러시아, 하와이, 남미 등 나라를 잃은 뒤의 대규모 이주다. 나라 없는 민족의 간난신고, 나라 없이도 꿋꿋이 살아낸 민초의 강인함을 담겠다는 포부다. 기왕의 작업이 텍스트 기반이라면 새로운 작업은 현장답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작가가 제작에 참여한. 이순신 순국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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