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무례'한 기자가 더 많이 나오길 바란다
대통령에 돌직구 던진 부산일보 기자에 '무례'?
국민을 왕조국가 신하로, 개·돼지·닭으로 보나
언론 우습게 보고 장악·탄압의 대상으로 여겨
윤석열 정권에 질문 않고 아부한 언론도 문제
권력에 무례한 언론 많아야 국민 존중받을 것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두루뭉술하게 사과를 했으니 보충 설명을 해달라’고 한 기자를 ‘무례한 기자’라고 한 대통령실 정무수석이 지탄을 받았다. ‘무례한 기자’ 발언을 한 홍철호 정무수석이 급히 사과했지만 불씨가 꺼지지 않았다.
해당 기자가 소속된 언론사는 물론이고 일부 주류 언론도 사설을 통해 비판했다. 얌전하기만 했던 대통령실 출입기자단은 이례적으로 입장문을 내 ‘규탄’하고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대통령실 수석비서관 사과와 언론의 비판으로 끝낼 해프닝이 아니다.
‘무례한 기자’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아시는 분은 건너뛰시라.) 지난 7일 명태균-김건희 선거개입 의혹으로 코너에 몰린 윤석열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윤 대통령은 국민 앞에 사과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사과인지, 도대체 왜 사과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만 꺼내놨다. 의혹의 핵심은 자신의 부인 김건희 씨인데도 ‘언론이 김건희 씨를 악마화하고 있다’며 언론 탓을 하기도 했다. 다른 여러 기자들이 이런 말을 듣고도 그냥 넘어가자 부산일보 박석호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사과를 할 때 꼭 갖춰야 할 요건 몇가지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사과할지 명확히 하고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제 주변의 일로 걱정과 염려를 끼쳐드렸다고 했는데 어떻게 보면 다소 두룽뭉술하고 포괄적으로 사과를 했습니다...이런 일이 생긴 이유가 휴대폰을 바꾸지 못해서라든가 사람 관계에서 모질지 못해서 생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과를 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 바깥에서 사과를 하라고 하니까 사과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TV를 통해 회견을 지켜보는 국민들이 과연 대통령이 무엇에 대해 사과를 했는지 어리둥절해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보충설명을 해주십시오.”
국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2시간 정도 진행된 기자회견 내내 대통령의 답변도 기자들의 질문도 ‘맹탕’이었다. 이날 뿐 아니라 앞서 열린 두번의 기자회견도 비슷했다. 기자회견을 지켜본 국민들은 그동안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것이다. 기자들은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하지 못했고, 대통령은 두루뭉술하거나 황당한 궤변, 현실과 동떨어진 답변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엉터리 답변을 듣고도 기자들은 꼬리질문(추가질문) 한번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날 박석호 기자가 윤 대통령에게 ‘답변이 두루뭉술하니 보충 설명을 해달라’고 제대로 된 꼬리질문을 한 것이다. 맹탕 기자회견에 처음으로 돌직구 하나를 던진 것이다.
박석호 기자의 질문 내용에 무례한 부분이 있는가? 국민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질문을 하는 동안 박석호 기자의 ‘태도’ 역시 전혀 무례하지 않았다. 그런데 홍철호 정무수석은 “대통령이 사과했는데 어린아이에게 부모가 하듯 ‘뭘 잘못했는데’...이런 태도는 시정해야한다”면서 ‘무례한 질문’이었다고 했다.
홍 수석의 이 발언은 윤석열 정부와 수구기득권 집단이 언론과 국민을 바라보는 시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그리 말하는 게냐”는 조선시대 궁궐 대사를 떠오르게 한다. 기자가 대통령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그저 “아룁기 황송하오나” “통촉하여 주시오소서”라고 해야한다는 것인가? 그들은 언론을 아직도 무시무시했던 군홧발 정권 시대의 정부 홍보 도구로, 국민은 자신을 섬기는 신하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박석호 기자의 이 정도 질문을 무례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윤 정부와 수구기득권 집단의 시대착오적이고 부적절한 언론관·국민관은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다. 입으로는 ‘언론 자유’ ‘언론 존중’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언론을 우습게 알고 마음에 들지 않는 언론은 멋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이 정부가 수사기관을 동원해 벌인 수없는 비판언론 압수수색과 고소고발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리 말하는 게냐”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공영방송을 독립성 보장이 아닌 장악의 대상으로 여겨 권력에 아부하는 자를 사장으로 보낸 것도 마찬가지다. 비판적인 보도를 하는 기자는 기자실에서 쫓아내고 대통령 전용기에서도 쫓아냈다. 대통령실의 다른 수석비서관은 기자들에게 ‘회칼 테러’ 운운하며 협박하기도 했다. 이들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헌법이 보장한 언론의 자유를 짓밟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이다.
언론을 통제하고 탄압해도 괜찮다는 생각은 ‘국민 개돼지론’과 연결되어있다. 국민을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자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국민이 대통령 '임금'과 기득권 '귀족'을 섬기는 신하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 교육부 고위 공직자가 기자를 만나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한다”“민중을 개돼지로 취급해야 한다”고 말해 충격을 준 적이 있다. 닭고기 가공회사를 하다 어느 날 금뺏지를 달고 대통령실 수석비서관 자리에까지 오른 홍철호 수석은 국민을 자신이 키우다 잡아먹었던 닭으로 생각한 것인가? 언론을 잘 길들인 애완견으로 여기고, 주권자 국민을 왕조시대 신하나 개, 돼지, 닭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국민이 대통령 답변에 어리둥절해 한다’고 말한 기자에게 ‘무례한 질문’ 운운하지 않았을 것이다.
홍철호 수석 발언에 몇몇 언론이 발끈했다. 박석호 기자가 소속된 부산일보는 사설에서 “어이없고 기가 막히는 일”“말문이 막힐 뿐”이라며 이렇게 썼다.
“대통령실이 정당한 지적을 하는 언론에 대해 ‘무례하다’는 감정적 대응을 보인 것은 단순한 발언의 의미를 넘어서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언론은 권력을 감시하고 권력의 탈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그 본연의 사명으로 한다. 그 대상이 대통령이든 누구든 의혹 제기에 성역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다. 대통령실의 “무례” 운운은 그런 점에서 언론의 역할과 사회적 책임을 부정하는 위험한 신호로 읽힌다...언론을 통제해 권력의 잘못을 덮고 국민의 눈과 귀까지 막겠다는 의도는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무례를 말하는가.”
국민일보는 “기자가 국민을 대신해 권력자에게 질문할 자격을 얻었기에 가감 없이 묻는 것이 오히려 예의”(22일자 칼럼)라고 지적했고, 중앙일보도 “기자에게 무례한 질문 같은 건 없다” 사설(22일자)에서 “대통령실의 시대착오적 언론관이 충격적”이라며 “도대체 이 기자 질문의 어떤 대목이 무례하다는 것인가. 기자는 대통령이 발언하면 그냥 받아적기만 해야지, 납득이 안 되는 내용에 대해 다시 물으면 안 된다는 뜻인가”라고 되물었다.
중앙일보는 특히 미국 백악관에서 벌어진 기자의 ‘무례한 질문’의 사례를 언급하며 윤석열 대통령실의 잘못된 인식을 비판했다.
“대통령도 기자회견장에서만큼은 언론의 취재원일 뿐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기자가 대통령에게 질문하면 안 되는 어떤 성역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존재해서도 안 된다. 국민을 대신해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례로 따지자면 미국 백악관 출입기자들이야말로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이들이다. 1998년 김대중(DJ)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의 공동 기자회견 때 미국 기자가 클린턴에게 “르윈스키의 드레스에 묻은 액체는 대통령 것입니까”라고 물어 옆에 있던 DJ가 민망해 하기도 했다."
“무엇에 사과했냐는 질문이 ‘무례하다’는 대통령실”(한국일보), “당연한 질문이 ‘무례’하다니...왕정시대의 정무수석인가”(동아일보), “뭘 사과했냐는 기자에 ‘무례했다’는 용산, 왕조시대인가”(경향신문), “불편한 wlfansa에 ‘무례’라는 대통령실, 국민에 대한 무례다”(한겨레) 등 다른 여러 주류 언론들도 홍철호 수석의 발언을 질타하고 나섰다.
여러 주류 언론들이(심지어 일부 ‘친윤 언론들’조차) 발끈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주류 언론의 이런 격한 비판 반응에는 한가지 빠진 것이 있다. 그동안 윤석열 정권과 기득권 집단의 숱한 언론 탄압, 국민 무시를 주류 언론들이 방관해 온 것 아닌가, 그것이 이제 '무례한 기자' 운운으로 돌아온 것은 아닌가를 돌아보는 일이다.
윤석열 정권을 향해 주류 언론 기자들은 제대로 된 질문을 한 적이 있는가? 아니 국민을 대신해 질문 자체를 했는가? 어렵게 얻은 기자회견 자리에서 던진 수많은 질문은 핵심을 비껴난 질문이었고, 오히려 대통령 변명과 국정홍보의 기회를 만들어준 것은 아니었나? 대통령 신년간담회에서 KBS 앵커는 ‘작은 파우치’‘김건희 여사에 대한 정치적 모략’이라며 국정농단 의혹을 덮어주기 바쁘지 않았는가? 이 정권의 공영방송 장악과 비판언론 압수수색·고소고발에 관한 질문을 단 한번이라도 한 적 있는가? 대통령과 김건희 씨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기자들이 그저 대통령이 퍼주는 김치찌개를 애완견처럼 받아먹으며 파이팅을 외치고, 김건희 씨와 셀카찍기 놀이에 정신줄을 놓아버린 것은 아니었는가?
국민들은 언론에, 기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왔다. 그러나 언론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권력 앞에서 제대로 질문하지 못하는 고질병을 고치려 하지도 않는다. 올해만 세 번째 열린 윤석열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나온 수많은 질문 가운데 박석호 부산일보 기자의 질문이 거의 유일한 돌직구 였다.
이러니 이 정부를 포함한 기득권 집단 공직자와 정치인들이 언론에 ‘무례하다’는 말을 하고 주권자 국민을 개·돼지·닭처럼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무례하다고 하는 것인가? 권력 앞에서 기자에게 무례한 질문은 없다. 오만방자한 권력을 향해 언론은 더 무례해져야 한다. 그래야 주권자 국민이 존중받을 수 있다. 윤석열 정권에 무례한 기자들이 더 많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