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순직' 군인 38009명…그들이 편히 잠 들려면

밤기차로 올라와 새벽에 찾아온 이등병의 엄마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절대 자살할 리 없어요"

세상에 이보다 더 확실한 정황증거가 어디 있나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 다시 띄워야 한다

2024-09-21     고상만 진상규명
고상만 인권운동가(전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 사무국장)

2018년 9월 14일 출범했던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가 만 5년 간의 법적 활동기간을 마치고 업무를 종료한 것은 2023년 9월 13일이었다. 어느덧 1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시작할 땐 언제 끝날까 싶었는데, 모든 것이 그렇듯 흐르는 시간을 이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처음 1년 간은 조사총괄과장으로, 그리고 이후 약 4년은 사무국장으로 근무했다. 그 5년 동안 위원회가 진정을 받아 조사 완료한 군인의 죽음은 총 1860건이었다. 그리고 이제 1년 만에 다시 그 위원회를 돌아보니 여러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위원회가 남긴 공적은 무엇일까. 그리고 남긴 과제는 어떤 것일까.

‘군 의문사’ 단어 탄생시킨 판문점 벙커 군 장교 총기 사망사건

내가 군인의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98년 천주교 인권위(이하 ‘인권위’) 활동가로 일하면서 만난 사건 때문이었다. 그해 2월 24일, 판문점 241GP 3번 벙커 안에서 육군 중위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이 날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날이 되었다. 또한 사건이 발생한 벙커의 특별한 위치로 인해 사건은 일사천리로 ‘왜곡’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여야 정권교체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참석차 각 나라의 정상들이 축하 사절단으로 속속 방한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휴전선 인근에서 육군 장교가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그러니 국방부는 이 사건이 다음날 있을 대통령 취임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이후 벌어진 사건 처리 과정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사망사고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수사는 생략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국방부는 사건 현장에 군 수사관이 도착하기도 전에 ‘자신에게 지급된 총기로 스스로 자살했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현장에 수사관이 도착하지도 않은 시간인데 이미 ‘자살로 처리’된 것이다. 그러니 이후 수사 방향은 자살을 뒷받침하는 내용만 억지로 끌어 모을 뿐이었다. 어느 유족이 억울하지 않을까.

사건 발생 석 달여가 지나가던 그해 5월 어느 날, 사망한 장교의 아버지가 인권위를 찾아와 그 억울함을 호소했다. 나는 유족이 가져온 자료와 국회에서 획득한 수사기록 등을 검토한 결과, 국방부의 발표와 달리 ‘스스로 자살할 수 없다’는 확신에 도달했다. 이에 인권위는 기자회견을 비롯하여 법의학적 공개 토론회 등을 개최하며 거듭 사인 의혹을 제기했다. 결국 이러한 의혹이 확산되자 김대중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에게 “군의문사 규명을 위해 조사위원회를 구성하도록” 지시한다. 우리 사회에서 ‘군 의문사’라는 단어가 처음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위원회의 민간 자문위원을 맡았다.

 

국방부 앞에서 군 의문사 희생자 유가족들이 진상규명촉구시위를 벌이고 있다 1999.3.25. 연합뉴스

‘병영에서 자살했다’는 자식의 한을 10년도 넘게 간직해 온 엄마

언론을 통해 인권위 활동이 알려지자 명동 사무실로 찾아오는 분들이 생겨났다. “나도 군대 보낸 아들을 잃었다”는 이른바 ‘이등병의 엄마’들이었다. 그때 대략 100여 명의 엄마들을 만났던 것 같다. 그중에 특히 잊을 수 없는 어느 모녀의 사연이 있다.

1999년 1월 어느 날 이른 아침, 명동 가톨릭회관 4층 인권위 사무실 문 앞에 60대 할머니와 이제 돌을 갓 지낸 사내아이를 들쳐 업은 새댁 같은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연을 물어보니 그들은 모녀 사이로 부산에서 밤 기차를 타고 새벽녘 서울역에 도착하여 인권위를 찾아왔다고 했다. 그리고는 추운 1월의 새벽녘 한기를 견디며 우리가 출근하기를 내내 복도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그들의 사연은 참으로 가슴 아팠다. 할머니는 남편을 병으로 먼저 보내고 어린 아들과 딸을 키웠다고 했다. 시장에서 좌판을 하며 갖은 고생을 했다고 했다. 그 분의 손을 보니 얼마나 혹독하게 고생했는지 넉넉히 짐작이 갔다. 그렇게 두 자녀를 키우며 가르쳤다고 했다. 커가면서 엄마의 고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들이 있어 늘 든든했고 마음으로 의지했다고 그 분은 회고했다.

그런데 끔찍한 불행은 아들이 간 군대에서 벌어졌다. 부대에서 전해 온 아들의 죽음. 여느 때처럼 군은 ‘불우한 가정환경을 비관한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딱 그뿐이었다. 그리곤 ‘조속히 화장한 후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뿐이었다고 한다. 갑자기 찾아간 강원도 산골짜기 어느 부대에서, 의지할 사람도 없이 비몽사몽 같은 시간 끝에 허망하게 아들을 화장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1980년대 중반에 있었던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살기 위해 일은 했지만 희망이 없으니 공허했다. 대한민국에서 아들을 잃은 고통은, 남편의 죽음보다 더한 슬픔이었다고 한다. 그런 아들이 죽고도 “내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있는” 자신을 마주할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다는 이 분의 심정을 누가 알까. 다행히 시간은 흘러 어느덧 곁에 있던 딸도 짝을 찾아 결혼했고 얼마 전엔 외손주 아들을 얻는 기쁜 일도 있었다. 그때였다. 어느 날 TV에서 판문점에서 의문사한 군인의 죽음에 관한 뉴스를 마주쳤다. 그리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국방부가 조사 기구를 만들었다는 소식.

“이 불쌍한 엄마 두고 자살했을 리 없다”가 유일한 증거

그때부터 엄마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내내 눈물만 흘렸다. 곁에서 딸이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딸이 하게 된 약속.

“엄마. 제가 내일 서울에 있는 천주교 인권위로 모시고 갈 테니 제발 식사 하시고 잠 좀 주무세요. 오빠 죽음의 진실을 제가 밝혀 드릴 테니 그만 좀 하시고…”

그렇게 해서 찾아오게 되었다는 모녀의 사연 앞에 나는 먹먹해지는 슬픔을 가눌 수가 없었다. 탁자 위에 각티슈를 연신 뽑아 그 어머니에게 드리고 나도 눈물을 닦으며 사연을 들었다. 안타까운 마음이었지만 머리는 복잡했다. 어디서부터 이 일을 풀어야 할까. 그랬다. 그 시점에 인권위에는 이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이등병의 엄마’들이 연일 찾아왔다.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된 한 줄기 희망을 찾아 ‘내 자식의 억울한 죽음도 밝혀 달라’며 엄마들이 물어물어 찾아 온 것이다.

하지만 그 분들의 눈물 앞에서 나는 너무나 괴로웠다. 과연 우리가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하는 막막함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판문점 육군 중위 사망사건에 대해 국방부 결론을 탄핵할 수 있었던 것은 ‘증거가 풍부했기 때문’이다. 망인의 아버지가 ‘육군 중장’ 출신이었고, 망인 역시 육사 출신 장교라서 여러 정보를 상대적으로 쉽게 입수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자료를 토대로 국방부의 거짓말을 밝혀낼 수 있었고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등병의 엄마’들은 그렇지 못했다. 억울한 아들의 죽음만 기억할 뿐, 그것이 왜 사실이 아닌지에 대한 증거는 거의 확보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군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고 심지어 망인의 유품조차 제대로 챙겨준 것이 없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어떤 유족은 아들이 사망한 후 군에서 받은 것이 ‘아무것도 안 쓴 반 찢어진 편지지 한 장’과 생전 썼다는 ‘칫솔 한 자루’가 전부였다는 분도 있었다.

이 어머니도 다르지 않았다. 아들의 사망이 자살이 아닌 증거는 “이 불쌍한 엄마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그런 아들이 이 엄마를 두고 그렇게 죽을 리가 절대 없어요”라는 단 하나 이유였다.

이 말을 참 많이 들었다. 그리고 이것만큼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것도 이제는 진심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26년 전 그때는, 이 주장만큼 난감한 일이 없었다. 도대체 이 사건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어렵기만 했다. 더구나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밤새워 달려와 새벽부터 기다린 이 분에게 무슨 답을 해야 할까. 너무나 답답할 뿐이었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하던 고 김덕환 상병의 영결식이 18일 오전 경기도 양주시 국군병원 장례식장에서 3년만에 치러지고 있다. 2008. 4. 18. 연합뉴스

딸 시댁이 알까봐 끝내 아들 죽음에 대한 진정 포기한 엄마

그때였다. 정말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 이번엔 엄마를 모시고 같이 온 딸의 말이었다.

“저, 그런데요. 혹시 한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만약 저희가 오빠 사건을 진정하면 우리도 방송에 나가게 되나요?”

순간 무슨 뜻인지 싶어 어리둥절했다. 엄마는 오빠의 죽음에 대해 말하며 저렇게 울고 있는데 이 철없는 딸은 방송에 나가고 싶어 저런 말을 하나? 살짝 화가 나는 것을 억누르고 “그럴 수도 있지만, 다 그렇게는 안 되겠지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나요?”라며 조금은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렇게 해서 듣게 된 그 딸의 속사정은 ‘엄마도 몰랐던’ 또 다른 고통이었다. 얼이 빠져 지내는 엄마를 두고 볼 수 없어 무작정 약속을 하고 서울로 올라오기 전날 밤, 딸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이 말을 어떻게 남편에게 해야 할지 두려웠다는 것이다. 결혼하면서 사실은 ‘오빠가 있었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남편과 시댁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두려웠다고 한다.

특히 아들이 태어나면서 더욱 그랬다. 남들은 아들을 낳았다며 축하해 줬지만 그것이 내내 두려웠다고 했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 크게 아프거나 또는 훗날 군대에 가서 ‘오빠처럼 잘못되면’ 어떻게 될까. 만약 그런 상황이 오면 남편이나 시댁 식구가 ‘군에서 자살한 친정 피붙이가 있어 이런 흉한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할까 봐 내내 두려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기로 한 전날 밤, 딸은 무수히 많은 생각을 했다. 진정을 내면 뉴스에서 본 ‘판문점 그 사건’처럼 카메라 앞에서 말을 해야 하나. 그럼 남편과 시댁 식구가 그 뉴스를 보게 될 텐데 어쩌나. 그러니 지금이라도 남편에게 미리 말을 해야 할까? 하지만 차마 겁이 나서 끝내 말을 꺼내지 못한 채 결국 밤 기차를 타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말을 하며 딸은 흐느껴 울었다.

“오빠하고 엄마를 생각하면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또 제 처지를 생각하면 그것이 두렵고 무서워 차마 못하겠고… 어찌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엄마. 미안해요.”

딸은 흐느끼다 끝내 사무실 밖으로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그 따님의 말을 듣고 있던 내 심정도 그런데, 하물며 엄마의 마음은 또 어떠했을까. 엄마는 아무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엄마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남긴 한 마디.

“제 아들… 진정을… 그냥 포기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 출범시킨 연극 ‘이등병의 엄마’

나는 긴 복도를 걸어가며 흐느끼던 그들 모녀의 뒷모습을 마음 속에서 한시도 지울 수 없었다. 그 어머니는 그 후 어떻게 살아갔을까. 도대체 왜 자식을 잃은 부모가 죄인이 되어 살아야 하나. 그런 억울한 마음이 들어 고통스럽고 분했다. 왜 강제로 데러간 국가가 책임을 지지 않고, 오직 피해자가 그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지 나는 그것을 반드시 고치고 싶었다.

그래서 2017년 5월, 연극 ‘이등병의 엄마’를 제작했다. 연극에서 나는 “군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의 피눈물에 대해 국가가 책임지고 진실규명과 명예를 회복시켜 줘야 한다”고 외쳤다. 이를 위해 가해자(국방부) 입장이 아닌 피해자(유족) 입장에서 조사하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제3의 조사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나의 외침에 호응해 무려 2800여 명의 후원자가 제작비 지원으로 함께 해 줬다.

덕분에 연극 ‘이등병의 엄마’는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10일에 걸쳐 총 18회 공연을 했는데, 이틀 만에 모든 표가 다 팔렸다.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반응이 정말 뜨거웠다. 표를 구할 수 없어 입장하지 못한 관객이 더 많았다. 어떤 여성 관객은 제작 및 원작자인 나에게 두툼한 휴지 2통을 내보이며 “이 정도면 공연 보는데 괜찮을까요? 먼저 보신 분들이 넉넉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글을 많이 남겨서 준비했거든요”라고 하여 웃었던 기억도 난다. 특히 2017년 대선 직후에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직접 공연장을 찾아 더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연극 제작비를 충당하고 남은 모든 공연 수익금은 출연한 배우와 유족 단체에 반씩 나눠 기부했다.

연극의 성공 덕분에 국회에서 특별법이 제정되어 2018년 9월 14일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할 수 있었다. 위원회는 지난해 9월 13일까지 만 5년 동안 총 1860건의 진정을 받아 조사했으니 일자로 환산하면 거의 하루에 한 건씩 조사를 완료한 것이다. 성과가 적다고 할 수는 없다.

완벽한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 향해 다시 뛰겠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군 조직 이래 지금까지 ‘군 입대 후 사망했으나 아무런 예우가 없는’ 3만 8009명(2020년 5월 국방부 공식 발표 기준)의 숫자에 견줘보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위원회가 끝나던 날, 그래서 나는 말했다.

“아직도 조사해야 할 군사망사고 피해자 3만 8천여 명을 남겨둔 채 위원회는 오늘 법적 활동기간 종료로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 분들과 유족 분들에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날 위원회 종료 행사에 참석했던 한 어머니의 절규는, 그래서 잊을 수 없는 또 다른 아픔으로 남게 되었다. 그 어머니의 아들 사례는, 여전히 우리 법의 사각지대에 남아있는 ‘전역 후 사망사건’이었다.

“그럼 이제 우리 아들의 죽음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어머니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나는 끝내 아무런 답을 주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런 엄마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법 연장이 거부된 것은 대통령실과 국민의힘 국방위원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완벽한 형태의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가 다시 출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군인의 죽음은 온전한 국가 책임임을 분명히 할 수 있는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 그것이 나의 목표다. 그 날을 향해 다시, 나의 캠페인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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