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슈퍼리치 ‘부자증세’ vs 한국 재벌 ‘상속세 꼼수’
다보스포럼서 초고액 자산가 부자증세 촉구
이와 반대로 윤석열 정부는 부자 감세 폭주
재벌 총수 상속·증여세 회피하려 편법 동원
“코리아 디스카운트 주범은 세금 아닌 재벌”
윤석열 정부는 법인세와 주식·부동산 관련 세금 감면에 이어 상속세까지 완화하려고 하는 등 부자 감세에 나서고 있다. 이와는 달리 지난 15일부터 19일까지 스위스 다보스에 열린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 포럼)에서는 전 세계 초고액 자산가(슈퍼 리치) 수백 명이 각국 정치 지도자들에게 '부자증세'를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다보스포럼은 전 세계 정치 지도자와 기업인 등 수천 명의 명사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행사다. 지난해 윤 대통령도 참석해 ‘행동하는 연대를 위하여’라는 주제로 특별연설을 했다.
슈퍼 리치가 공표한 공개서한의 제목은 ‘자랑스러운 지불(Proud to Pay)’이다. 부자로서 세금을 내는 게 자랑스럽다는 뜻이다. 디즈니 상속자인 애비게일 디즈니와 록펠러 가문의 발레리 록펠러, 할리우드 유명 배우인 사이먼 페그 등 17개국 250명 이상의 초고액 자산가들이 서명했다. 공개서한 요지는 이렇다. "우리는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은 위기의 임계점(티핑 포인트)에 이르렀고 경제와 사회, 생태적 안정에 대한 위험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지금은 행동이 필요한 때다.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각국 정치인을 향해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막대한 부에 언제 세금을 부과할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답이 없어 놀랐다."
이들은 작년에도 유사한 내용의 공개서한을 발표한 바 있다. 이때도 사회에서 가장 부유한 자신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라고 촉구했다. 그렇게 해도 그들이 속한 국가의 경제 성장에 전혀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강조했다. 그러면서 ”(부자증세는) 극단적이고 비생산적인 개인의 부를 우리 공동의 민주주의적 미래를 위한 투자로 돌릴 것이다. 억만장자들은 막대한 부를 휘두르며 정치적 권력과 영향력을 키우고 있고, 동시에 민주주의와 세계 경제를 훼손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끔찍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도 지난 15일 다보스 포럼 개막에 맞춰 ‘불평등 주식회사’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약 3년간 세계 5대 부자의 자산이 2배 이상 늘었다. 또 상위 1% 부자들이 전 세계 금융자산의 43%를 차지하고 상위 50대 상장기업 중 억만장자가 대주주나 최고경영자인 비중이 34%에 달했다. 옥스팜은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10년 안에 사상 최초의 수조 달러대 부자가 탄생할 것이고 빈곤은 또 다른 230년간 근절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부자 단체 ‘애국적 백만장자들’ 의뢰로 여론조사업체 서베이션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과도한 부의 집중이 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고 답했다. 또 1000만 달러(약 130억 원) 이상의 자산가를 대상으로 별도 부유세를 도입하는 것에 찬성했다.
슈퍼 리치들이 먼저 나서 세금을 더 내자고 한 캠페인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2011년 발생한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에서 비롯됐다. 이 시위는 금융위기를 일으킨 금융기관들의 부도덕에 대한 반발이 직접적 원인이었다. 하지만 의식 있는 자산가들은 시위를 보며 극심한 빈부격차가 초래할 자본주의 위기를 자각했다.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났던 이듬해인 2012년 다보스 포럼에서도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클라우스 슈바프 WEF 회장은 “현 자본주의 시스템은 세계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고 단언했다. 각국 지도자도 앞다퉈 대기업과 재력가의 탐욕과 부의 양극화를 정당화했던 ‘신자유주의’ 맹점을 비판했다.
그 이후 10년 이상 부자증세는 세계적인 흐름이 됐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주요국 지도자들도 부자증세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이제 부유한 기업과 자산가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면 경제가 망가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기업과 부자들이 돈을 벌면 중산층과 서민에게 부가 이전될 것이라는 ‘낙수효과’도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말았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들은 낙수효과는 없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이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의 부자 감세는 세계적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자 시대착오적인 정책이다. 한국 재벌기업 총수 일가가 상속·증여세를 절감하려고 각종 편법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여전히 경영권 승계와 사익편취 등을 위해 꼼수를 부리고 있다. 신종 증권과 새로운 보상체계 활용에서 일감 몰아주기와 쪼개기 인수합병(M&A)까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한다. 이런 한국 재벌기업 총수 일가의 행태를 다보스포럼의 슈퍼 리치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한국 재벌기업의 퇴행적 행태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유발하는 원인 중 하나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재벌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것이다. 경제개혁연대는 최근 대기업집단에 주식보상제도 정비와 이중상장 금지, 범죄 연루 임원 해임, 특수관계자 의결권 제한 등 기업지배구조 개선과제를 제시했다. 이를 통해 시장과 주주들의 신뢰를 회복할 것을 주문한 것인데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넘어서는 방안이기도 하다. 부자증세도 연장선 상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재벌기업이 정도 경영에 나설 수 있도록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것과 함께 자산가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낼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