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총수 사익편취 길 넓혀준 공정위의 퇴행
“동일인 ‘예외 조항’ 마련해 총수에 특혜”
‘외국인’ 김범석 쿠팡 의장도 지정 못할 듯
사익편취 총수 '원칙적 고발' 지침 백지화
대기업 내부거래 공시 기준 금액도 상향
대기업을 감시하고 규제해야 할 공정거래위원회가 사실상 재벌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 길을 넓혀주는 법 개정에 앞장서고 있다. 대기업집단의 규제 적용 대상을 결정하는 기준점인 동일인 지정에 예외 조항을 마련해 사익편취를 한 총수가 빠져나갈 구멍을 두는가 하면 일감몰아주기 등에 관여한 총수 일가를 원칙적으로 고발하는 지침 개정을 추진했다가 재계가 반발하자 백지화했다.
29일에는 대기업 계열사의 내부거래 공시 기준금액을 내년 1월 1일부터 50억 원 이상에서 100억 원 이상으로 높이는 시행령 개정안을 발표했다. 공정거래법(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1조(목적)에 따르면 (대기업집단의) 시장지배적지위 남용을 감시하고 규제하는 것이 공정위의 존립 근거로 명시돼 있다. 이런 공정위가 설립 목적과 상반된 정책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27일 기업집단 지정 때 동일인을 판단하는 기준을 정한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 했다. ‘실질적인 지배력’이라는 막연하게 표현된 동일인 지정 기준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이 골자다. 이번 시행령 개정 논의는 지난 2021년 쿠팡이 자산 5조 원 이상의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서 동일인(총수)을 설립자이자 자연인인 김범석 의장 대신 쿠팡 법인으로 지정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당시 공정위는 국내 기업인과의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김 의장처럼 국적이 외국인일 때 동일인으로 지정할 수 있는지에 관한 규정이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공정위는 이번 개정을 통해 국적 차별 없이 적용되는 동일인 판단 기준을 마련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동일인 지정을 피할 수 있는 ‘예외 조항’을 둔 탓에 실질적으로 기업을 지배하는 총수까지 동인일 지정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공정위가 정한 예외 조항은 △동일인이 자연인이든 법인이든 기업집단 범위가 동일하고 △기업집단을 사실상 지배하는 자연인이 최상단회사를 제외한 국내 계열회사에 출자하지 않았으며 △해당 자연인의 친족이 국내 계열회사에 출자하거나 임원으로 재직하는 등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자연인 및 친족과 국내 계열사 간 채무 보증이나 자금 대차가 없을 경우이다.
이들 조건을 충족한다면 기업집단을 사실상 지배하는 자연인이 있더라도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더욱이 이런 예외 조항이라면 제도 개선 논의의 원인 제공자였던 김범석 의장은 동일인 지정을 피할 수 있다. 김 의장은 대기업인 쿠팡을 사실상 지배하는 자연인인데도 동일인 지정의 예외 조항을 모두 충족할 가능성이 높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이번 개정안이 동일인으로 지정되지 않은 자연인이 사실상 지배하는 (국내외) 기업과 다른 계열사 간에 사익편취를 위한 내부거래를 규제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며 “지주회사 주식만 국내 주식으로 가진 총수 일가가 다른 계열사로부터 지주회사로 일감몰아주기를 막을 수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경실련은 또 “해외 계열사나 총수 일가의 해외 개인회사를 통한 사익편취와 편법적 세습을 조장하는 내용 등도 담고 있다”며 “이번 개정안과 관련 지침은 공정위가 밝히고 있는 기대 효과와는 상반되는 전형적인 표리 부동의 사례”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외국인인 쿠팡 김 의장의 동일인 지정은 현행규정으로도 충분하다”며 “이번 개정이 재벌 대기업에 또 다른 특혜를 줄 우려가 있다”고 강조했다.
공정위가 ‘법 위반 정도가 중대한 법인의 사익편취 행위에 지시·관여한 특수관계인도 원칙적으로 같이 고발한다’는 내용의 지침 개정을 백지화한 것도 공정위답지 못한 결정이다. 대법원은 지난 3월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의 재판에서 일감몰아주기에 대한 총수의 직접적인 지시 증거가 없는 경우더라도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취지의 법 해석을 내놓았다. 공정위는 사법부 판결 취지에 맞춰 고발 지침 개정에 나섰고 지난 10월 총수의 직접적인 지시·관여 여부를 주로 따지는 ‘중대한 위반’이라는 문구를 없애는 내용의 개정안을 행정 예고했다.
이에 재계가 기업인에 대한 고발이 난무할 것이라며 반발하자 지침 개정의 핵심 내용을 빼고 그 대신 고발 여부를 결정할 때 고려해야 할 조항을 넣었다. 사실상 재계에 백기투항을 한 셈이다.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를 엄벌해야 할 공정위가 재계 눈치를 보며 기왕에 정한 지침까지 철회한 건 나쁜 선례로 남을 것이다.
경제개혁연대는 “당초 고발 지침 개정으로 사익편취 행위를 한 법인을 고발하면서 그에 관여한 총수 일가(특수관계인)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지시나 관여 등 증거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해 고발하지 못하는 모순을 바로잡을 것으로 기대했다”며 “하지만 재계 입장만 충실히 반영한 고발 지침 개정을 단행한 것은 심히 유감”이라고 논평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공정위가 대법원 판례의 취지대로 총수 일가를 고발하는지 지켜볼 것”이라고 밝혔다.
대기업 계열사의 내부거래 공시 기준금액을 상향한 시행령 개정도 재계 요구를 적극 수용한 행정 입법으로 볼 수 있다. 현행 공정거래법에서는 자산 5조 원 이상 공시대상기업집단(대규모기업집단) 소속 국내 회사는 특수관계인을 상대방으로 하거나 특수관계인을 위해 일정 규모 이상으로 자금·주식·부동산 등을 거래할 때 미리 이사회 의결을 거쳐 공시해야 한다. 이때 거래금액은 자본총계와 자본금 중 큰 금액의 5% 이상이거나 50억 원 이상인 거래가 규제 대상이었다. 그런데 공정위는 이 조항에서 ‘50억 원 이상’을 ‘100억 원 이상’으로 높였다. 공정위는 “거시경제 성장과 기업집단의 규모 확대 등 변화된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며 “대규모 내부거래에 대한 기업들의 공시 부담이 완화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