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오염수 백화사전] ㉗엄마가 OOO 매일 쌌던 이유
사고 이후 일본인들은 어떤 고통 속에 살았나
"원전 사고로 세대간 불화…노인들 이주 거부"
평범했던 두 아이의 싱글맘 '운동가'로 변신도
후쿠시마 원전 핵물질 오염수에는 인체에 치명적일 수 있는 온갖 핵물질이 포함돼 있다. 어떤 물질은 생물학적 유전자 손상까지 가져온다. 백가지 화를 불러올 백화(百禍) 물질이 아닐 수 없다. 오염수 문제에 관한 한 ‘모르는 게 약’일 수 없다. 오염수와 관련된 정보와 지식을 하나하나 짚어본다. 알아야 대처할 힘이 나온다. [편집자주]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 원전폭발 사고 이후 피해 지역 일본인들은 어떤 고통 속에서 살았을까. 그린피스는 원전사고 3년 뒤인 2014년 3월 사고 초기의 모습을 담은 사진 174점, 영상 39점을 공개한 바 있다. 이 자료들은 오늘도 방사능 관련 사고가 공동체와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린피스 자료를 통해 몇몇 사연을 소개한다.
아내 타츠코 오가와라와 남편 신은 26년간 유기농 농업에 열심인 부부였다. 원전사고 나흘 후인 3월 15일, 방사능 감지기의 경보가 울렸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 방사능이 걱정돼 구입한 가족용 방사능 감지기였다. “지금까지 나는 원자력 에너지에 반대했지만 그것에 대해 많은 일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해보기로 결심했다.” 아내의 말이다. 부부는 원전사고 2년 뒤인 2013년 미하루에 공정무역 가게를 열었다. 부부는 지역의 농부들로부터 유기농 쌀과 채소, 계란 등을 공급받아 팔았다. 가게 이름은 에스페란토어로 ‘희망’이란 뜻의 에스페리(Esperi)였다.
니시키타는 두 아이를 둔 싱글맘이었다. 원전사고 발생 4개월 후 후쿠시마를 떠나 요네자와라는 산간 마을로 향했다. 원전사고 이후 그의 삶은 달라졌다. 후쿠시마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키즈 보이스’라는 NGO를 출범시켰다. 곳곳을 돌며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했다. ‘방사능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후쿠시마 네트워크’에서 자원봉사 활동도 했다. 재난 피해자의 상담에도 열심이었다. 원전사고로 평범했던 한 어머니가 운동가로 변신했다.
원전사고 발생지 인근 마을에 태어난 사토 켄토는 사고 발생 열흘 뒤부터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일본 정부에 관련 정보를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원전사고로 세대간 불화가 생겼다고 여겼다. 대피를 해야 하는데 마을의 노인들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고가 난 직후 마을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떠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연로한 분들이 머물고 싶어 하셔서 갈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결국은 모두 고향을 떠나야 했다.
9대째 고향 시골마을에서 살던 이케디 사츠키는 아들들과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원전 사고가 나자 소개(疏開)돼 구호소에 갇혔다. 마을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몇몇 도시로 뿔뿔히 흩어졌다. 그들은 고향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망연자실했다.
미나코 수가노는 유치원 교사이자 세 아이의 엄마였다. 원전 사고로 후쿠시마 시내 중심부에서 북동쪽으로 19km 떨어진 곳으로 이사했다. 엄마는 아이들의 도시락을 매일 준비했다. 학교 급식에는 후쿠시마산 채소가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아이들에게 도시락을 매일 싸줍니다. 엄마로서 아이들을 보호하고 싶어요.”
후쿠시마현의 한 시골마을에 살던 하세가와 켄이치는 원전사고 전 젖소 50마리를 기르던 농부였다. 그러나 원전사고와 함께 외양간은 텅 비고 말았다. 농부는 후쿠시마 도심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임시 주택으로 거처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