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연구가 '책임 발뺌론'을 이태원에 대입해보니 헉~
① 어차피 못 막을 것 / "예측할 수 없었다"
② 전임자 책임이다 / 문재인 정부에 책임전가
③ 자원이 없어서…/ "크라우드 매지니먼트 부족"
④ 우리 모두의 탓 / 오만데 끌어들여 책임 희석
⑤ 꼬리 자르기 / 말단 용산소방서장 입건
⑥ 몰랐다 / 딱 들어맞는 게 없음…유식한 정부?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지난 1년간 10·29 이태원참사에 대해 초지일관 변명만 해왔다. 반성과 사과는 없었다. 있었다 한들 ‘반성 코스프레’ ‘사과 제스처’ 뿐이었다.
미국의 재난 연구가로 유명한 리처드 스튜어트 올슨 교수(플로리다 국제대)가 지난 2000년 발표한 논문 <참사의 정치학>은 책임자들의 변명을 6가지로 분류한다. 올슨의 분류법을 이태원 참사에 적용해보면 기가 막힐 정도로 딱 맞아 떨어진다.
①“어차피 사람이 막을 수 없는 참사다” (Blame the Event)
‘누가 나서든 사람의 힘으로는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참사였다.’ ‘예측 불가능한 참사였다.’ 주로 참사 초기에 책임자들은 이런 변명을 한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인재가 아니라 천재지변이라는 식의 변명이다. 참사 자체에 책임을 넘기는 변명 전략이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참사 다음날인 10월 30일 한덕수 국무총리가 주재한 긴급 현안 브리핑 자리에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얘기가 있는데 통상과 달리 소방, 경찰 인력을 미리 배치하는 것으로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어차피 참사를 막을 수는 없었다’는 변명이었다. 이 장관의 면피성 발언에 여론이 들끓었다. 여론이 심상치 않자 이 장관은 다음날 마지못해 “국민께서 염려할 수도 있는 발언을 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마저 ‘공지문’을 통한 간단한 유감 표명이었다.
윤석열 정부나 서울시 등은 ‘신종 재난이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었다’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했다. ‘신종’이란 말을 붙이면 책임을 묻기 어렵다. 여지껏 듣도 보도 못한 초유의 재난이니 어쩌란 말이냐, 이런 변명이다.
사실 이태원 참사는 신종 재난도 아니다. 서울시 싱크탱크인 서울연구원이 이미 참사 2년 전 압사 사고를 신종 재난으로 규정, 안전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경고했던 것이다.
이런 변명은 지난 여름 오송 지하차도 참사로 14명이 사망했을 때도 나왔다. 그때 김영환 충북도지사는 참사 보고를 받고도 무려 3시간 30분이나 경과한 뒤 느지감치 현장에 도착했다. 김 지사의 늑장 행보에 비난이 쏟아졌다. 김 지사는 “거기에 갔다고 해서 상황이 바뀔 것은 없다”는 변명으로 비난을 자초했다.
②“전 정부 책임이다” (Blame the Previous Guys)
참사의 책임을 전임 정부나 전임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변명 전략이다. 그 변명에는 ‘내 탓이오’가 없고 오로지 ‘네 탓이오’만 있다.
예를 들면 정미경 국민의힘 전 최고위원은 지난해 11월 4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나와 “(전 정부 때) 112시스템 왜 안 고쳤나. 소방하고 경찰 왜 그 부분에 대해서 시스템 정비 안 하셨나. 이런 사고가 났다는 것 자체는 일단은 문재인 정권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전임에게 책임전가하는 전형적인 전략이었다.
윤석열 정부와 여당이 전 정부 탓을 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들은 오늘도 사사건건 ‘문재인 정부 탓’을 한다.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다.
③“자원이 없어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Blame The Context)
상황에 대처할만한 ‘뭔가’가 없거나 부족했다는 변명 전략이다. 역시 좋은 예가 있다.
“이태원 참사는 크라우드 매니지먼트(crowd management)라는 인파 사고의 관리 통제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1일 국무회의 자리에서 한 발언이다.
“참사 원인은 크라우드 매니지먼트 부족….” 한덕수 총리가 윤 대통령의 ‘지침’을 받아 같은 날 외신 브리핑에서 한 말이다. 한 총리는 이틀 뒤인 3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도 “이번 사고를 계기로 과학적 분석에 기반한 군중 관리 방안 등을 포함한 국가안전시스템 혁신방안을 마련해 나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대통령과 총리의 말을 받들어 경찰청은 즉시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정보통신기술(ICT) 등 첨단과학 기술을 활용한 ‘인파 관리 능력’ 강화에 나섰다.
그래봤자 대통령과 총리의 ‘인파 관리’ 운운은, 그게 없어서 참사를 막기 어려웠다는 변명에 불과했다.
당시에도 전문가들의 말은 전혀 달랐다. 예상 인파수를 예측하고, 적정 경찰 인력만 미리 배치했다면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골목에 줄이라도 쳐놓고 우측통행을 유도했다면, 잼(jam, 혼잡)이 걸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고 직후에도 경찰이 확성기와 비상 사이렌을 울려 상황을 알리고 인파가 일단 정지하도록 통제하는 가운데 수습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허억 가천대 국가안전관리대학원 교수가 언론에 밝힌 의견이다.
이런 반론은 경찰 내부에서도 나왔다.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은 지난해 11월 7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현안질의에서 이형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다중 운집 질서 유지에 고도의 전문 장비가 필요한가”라는 질의에 “그렇지 않다”고 답변했다.
민관기 전국경찰직장협의회 대표는 “인파 관리 고도화는 이번 참사와 전혀 관련이 없다”며 “현장에서 과학 기술이 부족해 인파 관리를 못 한 게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자원을 핑계대는 이같은 변명으로는 “인원과 장비가 부족했다” “매뉴얼이 없었다” 등을 들 수 있다.
④“우리 모두의 탓” (Blame Us All)
“우리 모두의 탓”이라는 변명도 있다. 행안부와 서울시, 경찰도 잘못했지만 ‘서양귀신 놀이에 빠진 젊은이들’ ‘무질서한 젊은이들’ ‘질서를 지키지 않은 각 개인들’ ‘자녀가 이태원에 가도 방치한 부모’ ‘안전 불감증의 시민’ ‘몰려든 인파’ 등등도 책임이 있다는 변명이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다행이지만 ‘마약을 한 젊은이들’도 도마에 오를 뻔했다.
심지어 ‘방송사 기자들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여당 의원도 있었다. 박성중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11월 4일 “KBS, MBC, YTN, 연합뉴스TV는 10월 29일 저녁까지 안전에 대한 보도 없이 핼러윈 축제 홍보 방송에 열을 올렸다”며 “방송사들이 안전이 관계 없다고 했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참여한 결과를 빚었는데, 사고 발생 후에는 언제 홍보성 방송을 했느냐는 듯이 전부 책임론을 거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KBS는 재난 방송사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을 경우 안전도 주의해야 한다는 방송도 했어야 하는데 ‘다 괜찮다’고 난리쳐 버리니까 젊은 여성들이 한번에 많이 몰렸다”고 강변했다.
책임을 오만데 분산시켜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는 말과 같다. 이런 변명을 받아들이면 정부도, 행안부도, 경찰도, 용산구청도 책임질 일이 없다.
비슷한 변명은 이태원 참사 당시 일부 언론의 ‘훈계’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조선일보는 좀 성급했다. 이 신문은 참사 사흘만인 지난해 11월 1일 <정쟁 자제하자더니… 野 “예고된 인재” 尹정부 공격>이라는 기사를 통해 “이태원 참사처럼 주최 측이 없는 경우 재난안전법도 안전 대책을 세워야 할 주체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보완이 필요한 부분인데, 이를 정부와 서울시 책임론의 근거로 삼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⑤“희생양 잡아 꼬리자르기” (Blame Them Up/Down There)
희생양을 찾아 방패로 삼는 것도 자주 사용하는 변명 전략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꼬리 자르기’다. 윗선이든 아랫선이든 한 사람 골라 참사의 책임자로 몰아가는 전략이다. 특히 한국에서 그 윗선은 최상위에 있는 윗선이 아니다. 적당하고 웬만한 직위에 있으면 된다.
최성범 용산소방서장은 참사가 발생하자 최태영 서울소방재난본부장이 도착하기 전까지 현장을 진두지휘했던 사람이다. 그때는 그가 컨트롤타워였다. 현장 기자 브리핑도, 윤석열 대통령과 오세훈 서울시장의 현장 방문 당시 상황 보고도 그의 몫이었다. 그는 참상을 브리핑하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경찰청 특별수사본부는 그런 최 소방서장을 지난해 11월 7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입건했다. 그를 지목해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여론이 빗발쳤다. 당시 한 매체의 관련 기사 제목은 <“손 덜덜 떨던 소방서장에 덮어씌우나”…과실치사 입건에 누리꾼 ‘부글’>이었다.(2022.11.08. 뉴스1) 최 소방서장은 현재 여전히 수사를 받고 있다.
➅“몰랐다”며 호소하기 (The Plea of Ignorance)
참사가 발생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주장하거나 호소하는 변명 전략이다. “알고도 그랬겠느냐, 몰라서 그렇게 됐다”고 무식과 무지를 내세운다.
이태원 참사의 경우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총리의 ‘크라우드 매니지먼트’ ‘과학적 분석에 기반한 군중 관리 방안’ 등 발언은 “우리가 그런 걸 몰라서 참사가 발생했다”는 전제를 둔 ‘무지 고백’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올슨 교수는 이 변명 전략을 “어차피 사람이 막을 수 없는 참사다”와 섞어 사용하면 ‘효과적’이라고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