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구석은 반도체뿐…아슬아슬한 경제 낙관론
정부 10월 경제 동향서 ‘경기둔화 완화론’
반도체 수출 감소 폭 둔화 흐름에 기대감
다른 품목 수출은 여전히 두 자릿수 감소
중동 정세·긴축 장기화…대외 변동성 확대
“반도체 등 제조업 생산·수출의 반등 조짐, 서비스업·고용 개선의 지속으로 경기둔화 흐름이 점차 완화되는 모습이다.” 기획재정부는 13일 발표한 ‘최근 경제 동향(그린북) 10월호’에서 현재 한국 경제를 이렇게 진단했다.
경기둔화가 완화되고 있다는 말은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여전히 경기가 좋지 않은데 그 정도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다. 한국 경제를 중환자에 비유하면 아직 병이 회복되지는 않았고 병이 깊어지는 속도가 조금씩 줄고 있는 상황을 ‘경기둔화 완화’라는 모호한 문구로 표현했다. 정부가 근거로 제시한 수치들도 이를 염두에 두고 봐야 한다.
정부가 그린북에서 가장 강조한 대목은 석 달째 경기둔화 흐름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8월 제조업 생산지수(계절조정 기준)는 한 달 전보다 5.6% 오르며 3개월 만에 상승했다. 반도체 생산지수가 13.4% 급등한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지난 3분기 수출은 1년 전보다 9.8% 줄었으나 분기 기준으로 감소 폭이 지난해 4분기 -10.0% 이후 가장 작았다.
이런 기조는 이달 들어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1일부터 10일까지 수출액(통관 기준 잠정치)은 115억870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7% 줄었다. 그러나 조업일수를 고려한 하루 평균 수출액은 9.2% 늘었다. 1~10일 기준으로 일 평균 수출액이 증가한 것은 지난해 9월 이후 13개월 만이다. 반도체 수출 감소율이 1년 전보다 5.4%로 줄었는데 이는 9월 1~10일의 –28.2%에 비하면 대폭 낮아진 것이다. 반도체 불황이 조금씩 풀리면서 수출 실적도 개선된 것이다.
정부는 이외에도 8월 서비스업 생산과 국내 카드 승인액, 중국인 관광객 증가 등 경기둔화 완화론을 뒷받침할 만한 지표를 제시하고 있다. 지난달 카드 국내 승인액은 1년 전보다 5.7% 늘어 전월보다 증가 폭이 커졌고 한국을 찾은 중국인 관광객 수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배 이상 늘었다.
그러나 최근 경제 지표들을 자세히 뜯어보면 반도체 수출 감소세가 다소 완화된 것 외에는 큰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중동 정세까지 불안해지며 국제유가 급등과 환율 변동 등 대외 불확실성은 더 커졌다.
정부가 긍정적 신호로 보고 있는 반도체 경기도 수요가 증가해서 좋아진 것이 아니라 주요 기업의 감산 효과라는 점에서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기대만큼 하락하지 않으면서 미국이 상당 기간 긴축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는 점도 섣부른 경제 낙관론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8월 수출은 1년 전보다 6.5% 줄었다. 지난해 9월 수출이 23개월 만에 감소한 뒤 12개월 연속 줄고 있다. 수출 감소 폭은 점차 줄고 있으나 자동차를 제외한 반도체와 석유화학, 철강 등 주력 품목의 수출 부진은 여전하다. 지난달에도 15개 주력 품목 중 9개의 수출이 감소했다. 기업들의 경기 인식을 보여주는 전 산업 업황 기업경기실사지수(BSI)도 60~70대를 맴돌고 있다. BSI가 100을 밑돌면 업황이 나쁘다고 답한 기업이 더 많다는 의미다.
메모리 반도체인 D램 가격은 지난달 6개월 만에 보합세로 전환했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PC용 D램 범용제품(DDR4 8Gb)의 9월 평균 고정거래가격은 전월과 같은 1.30달러를 기록했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반도체 업체들이 생산을 줄인 효과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낸드플래시 제품은 상대적으로 회복 속도가 느리다.
대외 불안 요인도 커지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정세 불안 등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확전되면 국제유가에 불이 붙을 것이다. 고유가와 고환율은 물가를 자극하고 이는 각국이 금리 인상 등 긴축의 고삐를 더 조여야 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미국의 지난달 CPI 상승률이 8월과 같은 3.7%를 기록한 것도 세계 경제에 부정적인 신호다. 변동성이 큰 에너지와 식료품을 제외한 근원 CPI가 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특히 주거비가 7.2% 급등했다. 물가가 안정되지 않으면 미국은 ‘더 높은 금리를 더 오래’ 유지할 확률이 높다. 미국의 긴축 정책은 달러 가치 상승으로 이어져 환율의 변동성을 부추긴다.
달러 가치가 높아지면 한국도 불가피하게 금리를 올려야 한다. 각국의 긴축 기조는 모처럼 살아나고 있는 반도체 경기에도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정부도 그린북에서 "중동 정세 불안에 따른 국제유가 변동성 확대와 주요국의 통화 긴축 장기화 등 대외 불확실성이 상존한다"고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