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한 역사 반복은 학살과 전쟁 책임을 묻지 않아서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6천여명 학살 100주년

씨알재단 함인숙 목사, 김원호 이사장 인터뷰

희생자들 묻혔던 도쿄 아라카와 강변 추모제

조선인 희생자들의 혼이 담긴 ‘넋전’ 행사

국제사법재판소에 대학살 진상규명 제소계획

“핵오염수 투기 대응도 역사 바로알기부터”

2023-08-19     한승동 에디터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 일대를 덮친 관동 대지진.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 32초, 일본 도쿄와 인근지역을 뒤흔든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10만 5천명이 사망(행방불명 포함)했다. 그 수가 14만명이 넘는다는 설도 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이 겪은 최대규모의 재난이었다. 그날부터 약 닷새 동안 그 지역에 있던 조선인들 6661명(<독립신문> 게재)이 지진 때문이 아니라, “조선인들이 방화하고 우물에 독을 풀어 폭동을 일으켰다”는 따위의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와 이를 치안유지에 이용한 일본 군경과 자경단원 등 민간인들의 야만적 폭력으로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올해는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조선인들이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려 방화”

100년 전 그때 지진이 일어나자 일본 내무성 경보국, 경시청은 조선인들이 방화하고 난폭하게 날뛰고 있다는 취지의 통달(통지)를 내려 보냈다. 경보국이 각 지방에 타전한 경보는 이랬다.

“도쿄 부근의 지진을 이용해 조선인들이 각지에 방화하고 불온한 목적을 실행하려 하고 있다. 지금 도쿄 시내에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려 방화하는 자가 있다. 이미 도쿄부에서는 일부 계엄령을 내렸으니 각지에서 충분히 주도면밀하게 시찰을 하고 조선인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엄밀한 단속을 할 것”

경시청도 “불령선인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방화하고, 또 미수에 그친 사건도 없지 않다”는 통지를 내렸다. 지진이 일어난 지 1개월이 지난 10월 20일 일본정부는 “조선인에 의한 폭동”에 대한 보도를 일부 해금하면서 동시에 폭동이 일부 사실이었다는 사법성 발표를 내 놨다. 하지만 그 발표는 피의자의 대부분이 성명불상으로 기소된 것이어서 신빙성이 결여됐고 일본인 자경단에 의한 학살과 당국의 유언비어 가담 책임을 은폐하거나 조선인 소행으로 돌리기 위헤 정부가 날조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위키피디아에서 인용. 이하 같음)

경찰서가 보호하던 조선인 17명 자경단이 살해

9월 4일 사이타마 현의 혼죠마치에서 주민들 손에 조선인이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같은 날 구마가야마치, 5일에는 메누마마치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9월 5일부터 6일까지 군마현 후지오카마치에서는 후지오카 경찰서에서 보호받고 있던 자갈공급회사의 조선인 피고용자들 17명이 경찰서에 난입한 자경단과 군중에 두들겨 맞고 살해당한 사실을 당시의 사망통지서와 검시조사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요시노 사쿠조의 조사에서는 2613명,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사장 김승학의 조사로는 6661명의 조선인들이 학살당했다. 조선인 희생자 수는 많게는 대한민국 외무부장관이 1959년에 공표한 문서 속의 “수십만의 한국인이 대량학살당했다”는 기술에서부터 적게는 일본 내무성 경보국 조사(1933년)의 조선인 사망자 231명, 중경상자 43명, 그리고 입건된 피해자수를 합산한 233명에 이르기까지 편차가 크다.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년을 맞아 ‘재단법인 씨알’(이사장 김원호, 75)이 재일대한기독교회와 오는 9월 3일 도쿄 아라카와 강 둔치에서 ‘관동대학살 100주기 추모제’를 연다. ‘1923 한일추모사업단’ 대표를 맡고 있는 함인숙(73) 목사가 이 추모제의 핵심인 ‘넋전’행사를 진행한다.

“참혹한 역사가 되풀이되는 이유는 학살과 전쟁의 책임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류사회에서 제노사이드를 영원히 추방하자는 의미에서 씨알 재단이 대한민국 시민들과 함께 관동대학살 100주기를 기억하는 행사를 준비하고자 한다.”(추모제 홍보 팸플릿)

<민들레>는 <더탐사>와 함께 17일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함인숙 목사와 김원호 이사장을 차례로 만나 100주기 행사의 준비상황과 그 의미에 대해 들었다.

한승동 <민들레> 에디터가 인터뷰하고 이 기사를 썼다. <더탐사>의 정선호 감독이 촬영과 녹음을 맡았다. 허경혜 작가가 녹음파일을 문자 텍스트로 다시 정리했다.

 

함인숙 목사

 

함인숙 목사. 뒷쪽의 종이를 재료로 만든 사람형상이 '넋전'이다.

넋전 6661명 하나하나 줄에 매달아 추도

한승동 에디터: 일제 강점기인 1923년 9월 초 일본 도쿄 일대를 덮친 관동 대지진으로 그 곳에 있던 수많은 조선인 동포들이 지진 때문이 아니라 지진으로 인한 혼란과 파괴를 조선인들 탓으로 돌린 일본인들의 야만적인 선동과 폭력에 희생당한 지 100년이 됐습니다. 열흘 남짓 뒤면 그날인데요, 목사님과 씨알재단에서 100년을 맞아 무참하게 희생당한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특별한 행사를 준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행사인가요.

함인숙 목사: 100주년을 맞아 도쿄 아라카와 강변 둔치에서 여기에 보시다시피 ‘넋전’이 걸려 있잖아요. 그때 집계된 조선인 희생자가 6661명이에요. 그래서 그 한 분 한 분을 기리는 의미에서 6661명의 넋전을 하나 하나 만들어 모두 줄에 달아서 아라카와 강변에 걸어 놓고, 공주의 상여소리 하는 분들을 초청해 함께 하는 우리 한국식의 추도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이 종이 형상 하나 하나가 희생자 한 분 한 분이로군요.

= 그렇지요. 우리가 2016년 추모행사 때 처음으로 광화문에서 넋전을 만들어 걸었어요. 그때는 하나 하나 모두 손으로 오려서 걸었는데, 이번에는 기계의 도움으로 한 번에 넋전 형상을 찍어 만들기는 했지만, 눈과 코 등을 다시 다듬고 줄에 꿰는 작업은 일일이 다 손으로 했습니다.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대하는 그런 느낌으로 정성들여 수작업을 했습니다.

- 6661명의 넋전 작업, 하루 이틀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네요.

= 아라카와 강변에 설치하기 위해 이 낚싯줄을 다 꿰어 가야 하고, 그것을 희생자 한 분 한 분을 실제로 대하는 마음으로 한 긴 작업이었어요.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일곱 사람이 3박 4일 동안 작업했어요. 모두 그냥 정신없이 밥 먹는 시간 빼놓고는 그 일만 하면서 바깥 출입도 않고 계속했어요. 새벽부터 일어나서 밤 늦게까지 하는데 하나도 피곤하지도 않고. 힘들긴 했는데, 다음 날 일어날 때도 거뜬하게 일어나고, 그래서 다 마무리했을 때 우리는 이 넋전들이 우리에게 에너지를 많이 줬다고 서로 얘기했습니다.

-해마다 이런 행사를 해 오셨습니까?

=아니요. 2016년에 하고 이번에 또 하는 건데, 100주년이라 큰 행사죠.

 

넋전들을 배경삼아 앉은 함인숙 목사.

왜 아라카와 강변인가

- 도쿄 아라카와 강변에서 하는 것도 처음이군요. 그런데 왜 아라카와 강변입니까? 도쿄 어디에 있는 강인지요?

= 스미다 구에 있어요. 거기가 어떤 장소냐 하면, 그때 유언비어 속에 조선사람들이 학살당할 때, 일본 군경이 총을 쏴대고 또 일본인 민간 자경단들이 칼과 농기구 같은 것들로 무참히 학살을 했잖아요. 그 조선인 희생자들을 모아서 파묻은 곳이에요.

굉장히 큰 구덩이를 파서 묻었는데, 나중에 그곳 마을 사람들이 자기 마을에서 그런 참사가 있었다는 걸 알고 한번 가서 파 보자고 했는데, 어느새 그런 소문을 듣고 (관에서) 그 전날 그 걸 다 파헤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버렸다고 해요.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유골들을 보지 못했어요.

그런 비운의 역사가 있는 장소인데, 우리가 광주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그때 정말 억울하게 죽은 시민들을 기억하는데 광주 망월동이라는 장소를 빼 버리면 안 되잖아요. 제대로 기억을 할 수 없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아라카와 강변도 그런 기억의 장소로 보존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려고 해요.

- 지금 아라카와 강변에는 일본 자체 내에서 마련했거나, 민단 또는 재일동포들이 중심이 돼서 세운 기념물이나 추모비 같은 게 있습니까?

= 없어요. 그 아라카와 강변 근처에, 한 5분 걸리는 거리에 ‘봉선화’라는 단체가 있어요. 그 봉선화 단체는 2014년에 우리 씨알재단에서 일본관동 씨알 순례를 할 때 함께 했어요. 100년 전에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이곳 저곳 여러 지역을 돌며 우리가 접은 종이학을 만나는 사람마다 주면서 “평화를 전합니다”라는 인사를 했어요. 그렇게 아라카와 강변까지 순례를 했어요.

- 아라카와 강변은 희생자들을 모아 매장한 곳이고, 순례하셨다는 곳들은 학살당한 장소인 셈인데, 그런 곳들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까?

= 그럼요. 알 수 있죠. 그 봉선화 단체가 우리의 봉선화와 무궁화를 심어 놓고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어요.

- 봉선화 단체는 한일 민간 단체입니까? 아니면 재일동포 또는 일본인들 모임인가요?

= 일본인 시민단체로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희생당한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단체예요. 아라카와 강변 그 마을에 사는 여교사가 그 비극적인 사건을 알게 된 뒤 자기 제자들을 모아서 단체를 만들었어요.

- 그 분들 중에는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생존자는 이미 돌아가셨겠지만, 증언자들이 있었나요??

= 증언자들이 있죠. 매스컴에서 뉴스로도 많이 보도했죠.

- 6661명이라는 희생자 수는 확인된 것인가요? 일본 정부나 지자체는 그걸 조사하거나 공식적으로 밝힌 적이 한번도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

= 조사해서 밝혔어요.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조선인 피살자들, 도쿄와 지바, 군마, 가나가와, 사이타마, 도치기, 이바라키 등의 희생자들을 조사해서 6661명으로 집계해 실었어요.

- 일본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건 300명도 안 되는 걸로 돼 있습니다만, 그건 오히려 의도적으로 축소한 것이고, <독립신문> 쪽 보도가 신빙성이 높다고 보시는군요.

= 그렇죠.

- 100년을 맞아 특별히 준비한 이번 행사에 한국에서는 몇 분이나 가시나요?

= 80명 정도 돼요. 여러 단체에서 참가하거나 개별적으로 초청한 분들도 있는데, 공주에서 14명이 가요. 이번 폭우로 인한 재난 때문에 예정보다는 공주지역 참가자들이 줄었어요. 원래 40명쯤 가려고 했는데.

- 다른 단체나 조직에서도 100주년 추모행사를 할 텐데, 전부 다 합동으로 하나요, 아니면 씨알재단 행사는 따로 하나요?

= 9월 2일에 여러 단체가 하는 행사가 있고, 아라카와 강변 행사는 3일에 씨알재단만 따로 해요.

- 봉선화 단체도 함께 하나요?

= 아뇨. 우리만 해요. 그쪽에선 장소만 허용할 뿐 도와 줄 수는 없다고 했어요. 모든 것은 우리가 다 준비해서 합니다.

- 현지에는 일본인 단체도 있고, 관심 가진 재일동포들도 있을 텐데요?

= 초대는 했어요. 반응은 있었으나 얼마나 올지는 모르지요.

- 언제부터 이 일을 하시게 됐습니까?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 추모제 홍보 팸플릿.

씨알 재단의 역사 희생자들 추모순례하며 이번 행사 구상

= 나는 6.25전쟁 난 해, 그러니가 1950년 12월에 태어났고, 2000년, 아니 1998년쯤부터 이 일을 시작했어요.

- 신학공부를 하시고 목사님이 되셨는데,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문제에 관여하게 된 특별한 계기 같은 게 있었는지요.

= 씨알재단을 알게 되면서지요. 씨알재단을 알게 된 것은 내가 한국사람으로서 한국인의 긍지를 어디에서 찾을까 생각했을 때, 전에는 흔히 외국의 유명한 사람들을 존경한다거나 하는 얘기들을 했는데 나 자신에게 씨알이 생겼다고 할까요, 그게 생긴 뒤부터는 한국인을 내가 존중하고 끌어안고 사랑해야 되겠다는 의식이 생겼어요.

그래서 내가 존경할 분을 찾아 나섰는데, 그 분이 유영모 선생님이었어요.

그리고 신학교 강의 중에 교수 한 분이 씨알재단을 소개해서 알게 됐고, 씨알재단에도 학식만이 아니라 삶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서 씨알공동체를 만들어 운영위원장도 맡았습니다.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문제에 관여를 하게 된 것은 우리 씨알 순례길을 하면서부터지요. 씨알은 공동체 삶을 꾸리면서 우리 주변의 인물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을 해 왔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씨알 순례를 해요. 그러다가 외국 순례도 해 보자고 했고, 그 첫 번째 순례가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현장 순례였어요.

그게 2014년이었어요. 2015년에는 ‘70년 만의 귀향’(일본으로 강제노역 나갔다 희생당한 분들의 유골 봉환)이라는 행사가 있었잖아요. 그때 내가 그 행사에 참여하고선 우리가 이렇게 순례하고 했던 이 분들(관동 대지진 조신인 희생자들)이 한 번도 이 사회에서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분들 추모행사도 해 보자고 해서 2016년에 위원회를 꾸려서 광화문 행사를 했죠.

그 행사를 하고 나서 100주년에는 도쿄에 가서 하자, 그리고 거기에 평화의 탑을 세우고 평화의 종을 울리게 하자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이제 우리가 정성들여 이분들을 추모하고 넋을 달래는 행사를 하게 돼 정말 감사해요.

- 이번 행사가 다시 한 번 깨달음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관동 대지진 100년이 됐는데, 그리고 아무 죄도 없는 조선인 수천명이 학살당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났는데 일본이 아직 한 번도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조사하거나 발표한 적도 없고 사과한 적도 없고 사건 자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요. 목사님이 보시기에 무엇이 문제라고 보십니까?

= 이는 일본과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그것은 굉장히 협소한 시각이고, 사람이 사람을 중하게 여기고 생명을 존중하고 서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되는데, 그러한 의식이 없어진 것이 가장 애석한 일이고 정말 통탄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노사이드(인종말살)가 세계 곳곳에서 자행됐는데, 그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가 지구인으로서 더불어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의 탑을 세워서 진실이 진실로 남을 수 있는, 진실을 진실로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일본정부가 책임을 지고 진상을 규명해서 한일 두 나라가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서 평화를 이룰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핵오염수 해양 투기, 숨기지 말고 모든 것 다 드러내야

- 100년이 지난 지금 한일 간에는 후쿠시마 핵오염수 해양 투기가 중대한 현안이 돼 있습니다.

이 문제는 또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일본정부는 이 문제도 주변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 방식대로 밀고 나가려 하고 있는데, 어찌 보면 일본 보수우익 지배세력은 근대에 한반도를 침략하고 지배한 이래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바꾼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 넷플릭스에서 ‘더 데이즈’라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다룬 드라마를 방영했는데, 봤어요. 거기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정말 생생하게 볼 수 있었어요.

그런 것처럼 현실에 일어났던 일들, 그런 것들을 그대로 세계에 거짓 없이 드러내는 거지요. 드라마가 모든 것을 다 드러냈는지는 모르겠으나, 있는 그대로 다 밝혀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네들의 이익을 위해 어떤 것은 숨기고 어떤 것은 공개한다는 식으로 해선 안 됩니다. 그냥 우리가 잘못했으면 잘못했다 하고, 전 세계에 이를 알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함께 의논해서 같이 살아나갈 지구를 살리는 운동으로 만들어 가야지요.

- 후쿠시마 핵오염수 해양 투기와 관련해 일본이 뭔가 숨기는 것 같고, 있는 그대로 밝히고 세계 사람들의 협조를 구하는 자세가 아니라는 비판을 국내외적으로 받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 같다”

= 일본의 대다수 국민들은 숨긴다기보다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 같아요. 일본에 자주 가는 편인데, 사람들한테 그 문제에 관해 물어보면 몰라요. 너무 무관심해요. 무관심하고 무덤덤하다고 할까요. 전혀 인식을 안 하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그런 반응을 볼 때마다 이게 뭐지? 싶어요. 일본에 갈 때 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면, 일본사람들 정말로 몰라요.

- 자기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지난 세기에 일본이 주변 국가들이나 동남아시아, 태평양 여러 나라들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히고 많은 사람을 죽게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자각이 없다는 것은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일반 시민이나 대중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도 되지만, 그건 일본 일반 민중이라고 할까 일반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 아닙니까?

= 그럼요. 왜 모를까요. 그것은 천왕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해요.

- 과거의 잘못에 대한 자각이 없고 반성이 없으면 상황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또 똑같은 잘못을 또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 아닙니까? 요즘 우리나라 사정도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 그러니까 일본을 반대한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태를 바로 알아야 되고 그래야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있는데, 우리도 잘 못하는 것 같아요.

넋전을 창시자는 민속학자 심우성

- 넋전에 대해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만,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 재료는 종이지만 우리가 사람의 형상으로 만들었을 때는 사람으로 보는 거지요.

넋은 혼 또는 영혼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손으로 만질 때는 다들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고 해요.

- 이 디자인이라고 할까, 모양은 누가 생각해냈나요?

= 우리집 딸 아이가 디자이너인데, 며칠 고민 끝에 만들었어요.

- 이런 형상의 넋전을 국제적으로 선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요?

= 그렇죠. 2016년에 광화문 행사 때 처음 넋전을 내걸었습니다. 원래 넋전이라는 것은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님이 창안하신 말입니다.

- 6661개 넋전이면 적은 숫자가 아닌데, 이를 일본까지 가져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겠습니다.

= 200kg이 넘어요. 어저께 배로 싣고 가도록 부쳤어요. 현해탄을 건너가고 있을 텐데, 그 넋전 하나의 무게를 느낄 때마다 생각을 해요. 아라카와 강변에 쌓여 있던 죄없는 조선인 희생자들의 시신을. 이 얇은 종이 한 장을 드는데도 이렇게 무거운가 하고. 들 때마다 조금씩 실감을 해요.

- 그냥 한 장의 종이가 아니라 진짜 넋이다?

= 그들의 혼이 담긴 종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라카와 강변에서 우리가 그것을 줄에 매달 때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함께 100년의 춤을 추고 더는 원한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그 에너지를 뿜어내는 그런 아라카와 강변 행사가 되기를 바래요.

- 마지막 준비를 하시려면 미리 가셔야겠네요.

= 내일(18일) 도쿄로 가요. 거기서 상여를 메고 갈 나무 등 여러가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아요. 봉선화 꽃도 준비하고 제사 준비도 해야 합니다.

 

김원호 씨알재단 이사장

 

김원호 씨알 재단 이사장.

국제사법재판소에 관동 대학살 진상규명 제소 계획

한승동 에디터: ‘재단법인 씨알’이 창립된 지 꽤 긴 세월이 지난 것 같은데요.

김원호 이사장: 2007년 9월이니까, 16년이 됐지요.

- 이번 도쿄 아라카와 강변 추모행사는 함인숙 목사님과 함께 현장에 가셔서 진행하시는 거지요?

= 예. 2016년 광화문 행사 때도 함께 했습니다.

- 그러면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재단 차원에서 2016년 이래 관심을 가지고 관련 행사들을 계속해 오신 건가요?

= 정기적으로 기일이 올 때마다 행사를 한 것은 아닙니다.

100년 전 현장에 있었던 함석헌 글보고 처음 알게 돼

- 그러면 2016년 행사 이후 100주년 행사를 염두에 두고 준비를 해 오신 건가요?

=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지난해부터 100주년 행사계획이 제기됐지요. 올해가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지 100년인데, 씨알 재단 인물이라면 유영모 선생과 함석헌 선생을 떠올릴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함석헌 선생이 100년 전 그때 당시 도쿄 고등사범을 다니시다 그 재난을 직접 겪었어요. 1970년 4월에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고 그해 9월에 ‘내가 겪은 관동 대지진’에 대해 쓰셨는데,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 지진과 조선인 학살 참극에 대해 알게 됐죠.

- 씨알 재단이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년에 남다른 관심을 가질만한 이유가 있군요. 그런데 그때 처음 그 사건을 알게 됐다고 하셨으니, 어떻게 보면 그런 엄청난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광복) 이후에도 쉬쉬하며 숨긴, 또는 숨겨져 온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 몰랐죠. 그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어요. 나중에 보니까 우리 쪽 그러니까 대한민국 쪽에는 민단이 있었으나 추도식 같은 것도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총련계 쪽에서는 그런 행사를 계속했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계속해 오고 있는 걸로 압니다. 안타까움이라고 할까 아쉬움이 있는데, 어쨌든 우리 쪽의 대처가 전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거지요. 그런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고 사과를 받아내고 하는 일들은 (1965년) 한일 협정 체결 당시에 다 거론되고 매듭지어졌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당장의 필요에 쫓겨 그냥 화급하게 협정을 맺고 그런 문제들은 다 덮어버렸으니 일이 지금까지도 계속 이 모양이 된 거지요. 해결되지 않고 잠복해 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지면 다시 그게 불거져 나와 문제삼고 하는 식이었지요.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문제는 정말이지 사회적으로 언급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 말씀하신 대로 1965년 한일협정이나 한일 국교 정상화라고 하는 게 사실은 과거사를 다 정리하고 잘된 것 잘못된 것 다 드러내고 제대로 청산한 뒤 새로운 출발을 했어야 되는데 오히려 과거사를 숨긴 채 돈 몇 푼 받고 끝내 버린 면이 있습니다.

= 당시 우리 정부가 빨리 협정 맺고 청구권을 근거로 빨리 돈을 받아내 나라 경제부터 일으키자는 쪽으로만 너무 서둘렀고 다른 부문은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 이해가 가는 면도 있지만, 말씀하신 대로 국가와 민족의 정통성이라고 할까 역사적 정당성 같은 것을 중시한 것 같진 않습니다.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도 국가 차원에서 문제삼은 적이 없고, 며칠 전 8.15 광복절 대통령 경축사를 보더라도 정부 차원에서 이 문제에 벌다른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 이런 문제에는 생각이 없는 거지요. 그런 일은 오히려 자신들에게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 과거사 청산 못한 게 만악의 근원

- 함 목사님께도 여쭸습니다만, 이번에 관동 대지진 조선인학살 100년을 맞아 아라카와 강변에서 특별한 행사를 준비하신 계기 같은 게 있었다면.

= 가령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난 그해 우리 조선, 한반도에서 벌어진 일들을 생각해 보면, 그때 동학교도들이 일본군의 야만적인 무력진압으로 100만명 넘게 살상당했습니다. 이건 일본의 역사학자 나카츠카 아키라 선생이 하신 말씀인데, 그때도 결국 조선을 병탄하고 난 뒤에 생길 수 있는 문제점(화근)을 미리 제거해 버리자는 일본 제국의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반항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고 보고 미리 제거한 것이지요. 그런 역사가 관동 대지진 때도 되풀이 되지 않았나 하는 겁니다. 그네들 입장에서는 일본의 국력을 키우고 세계로 진출하는 기반을 다지는데 이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었을까요. 그 4년 전에 3.1운동도 일어났겠다, 일본 지배세력에게는 대지진 재난을 활용하면 일본 민중들을 선동해서 자신들의 구상을 추진하고 사회 안정을 꾀하는데에도 유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불온세력을 미리 제압해서 후환을 없애는 기회로 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그때는 설사 그런 계산 아래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결국 그 20여년 뒤 패전한 일본이 지금 스스로 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의 선도적인 모범국임을 자처하는 마당에 그런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야 마땅할 텐데요. 그런 면에서는 일본이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 하는 의심을 사기도 합니다.

= 지금 일본 정치인들의 역사관을 보건대, 그렇게 할 리가 없죠. 약육강식의 세력 확장만이 유일한 선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피지배 민족을 억압하는 것이 당연하거나 불가피했겠지요.

- 일본 지배세력의 그런 역사관을 제대로 문제삼으며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우리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 해방 뒤 우리가 그런 일본의 잔재를 청산하는 문제에서 이미 꺾여버린 역사를 갖고 있잖아요. 결국 청산됐어야 할 사람들이 살아남아 또 다시 지배계층으로 올라섰고,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과거를 미화하고 과거청산 주장을 불온시하면서, 말라빠진 과거에 매몰돼 미래를 망치려 하느냐 , 그 따위 것 다 치워버리고 앞으로 나아가자고 호령하겠지요. 그런 역사가 계속되고 있는 거지요.

- 그거야말로 일본 보수우익 지배세력이 가장 바라는 것이겠지요. 우리 정부가 거기에 자발적으로 동조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김원호 이사장. "결국 청산됐어야 할 사람들이 살아남아 또 다시 지배계층으로 올라섰고,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과거를 미화하고 과거청산 주장을 불온시하면서, 말라빠진 과거에 매몰돼 미래를 망치려 하느냐 , 그 따위 것 다 치워버리고 앞으로 나아가자고 호령하겠지요. 그런 역사가 계속되고 있는 거지요."  

국제사법재판소에 진상규명 위해 제소 계획

- 씨알 재단이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 아직 준비가 다 끝난 건 아닙니다만, 그렇게 해서라도 이 문제에 대한 진상조사 및 사과를 받아내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대로 된 한일관계 재정립을 위해 굉장히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문제를 그런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본격적인 시도는 이제까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구상을 갖고 계신지요.

= 우리 씨알 같은 조그마한 단체에서 독자적으로 추진하기에는 역부족이죠. 일단 국민 여론에 호소해서 호응을 얻어낸 뒤 그것을 토대로 국회 또는 정부에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과정을 밟아 가면서 더욱 여론의 지지를 받게 되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라고 정부와 국회를 한층 더 압박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다른 문제지만 청일전쟁 뒤 일본이 한국에 대해 저지른 범죄행위들(동학농민군 학살 등)도 완전히 가려져 있어요. 그 뒤 정부가 없어져 버렸으니 더욱 그랬겠지요. 그런 문제도 그런 식으로 거론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건 명백히 반인간적 제노사이드였으니까요.

- 앞서 말씀하신대로 나카츠카 선생이던가 와다 하루키 교수던가,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동학농민을 대규모로 학살한 것이 아마 근대 제노사이드의 첫 사례일 것이라고 얘기한 것이 생각납니다.

= 학살 규모도 엄청나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것도 제대로 모르잖아요.

- 국회 쪽에도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자료를 정리해 전달했다고 들었습니다.

= 국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으니까, 이번 기회에 이것을 알리고 이 문제를 제대로 논의하게 해 보자는 생각으로 의원 300명에게 보냈습니다.

우리 국회의사당 앞과 일본 국회의사당 앞에서 여러 단체들이 모여서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선언문을 낭독하는 그런 행사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국 여론에 호소하는 길밖에는 없으니까요.

- 씨알 재단이 조그마한 단체라고 말씀하셨지만, 이렇게 주도적으로 꾸준히 이런 문제들을 파고드는 단체도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씨알 재단이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문제와 관련해 이번 추모행사 말고 다른 계획도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세상 바로잡으려면 교육과 헌법 다시 만들어야

= 두 가지 사업 구상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교육사업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참여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삐뚤어진 현실을 바로 고쳐내기 위한 교육사업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 씨알들이 제 정신을 갖고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을지, 제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일러주는 교육 프로젝트를 짜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참여 사업이라는 건 함석헌 선생이 말씀하셨듯이, 지금 우리 사회가 흘러가는 모습을 보면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헌법이 제대로 만들어진 적이 없었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구상입니다. 헌법 제정의 역사가 애초에 제헌절 때부터 뒤틀려 버렸다, 그것도 이승만 대통령이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4.19도 일어나고 했습니다만, 그것이 또다시 뒤집어지고 엎어지면서 공화국들 헌법이 개헌과 쿠데타 속에 계속 왔다 갔다 하잖아요.

그런 식으로 헌법이 권력자들 입맛에 맞게 만들어졌을 뿐 주권 재민의 진정한 민주주의 헌법은 만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제대로 된 헌법을 좀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유튜브도 하고 책도 만들어 여론에 호소하려 하고 있지요.

- 8.15 경축사도 그렇지만, 요즘 3.1운동이나 상하이 임시정부 정통성을 부정하고 1948년 정부 수립을 건국절이라며 우리 근현대사 정통성을 부정하는 생각들도 퍼지고 있습니다.

= 친일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연원이 되고 거기에 한민족이 내전을 통해서 서로 깊은 증오를 쌓은 것이 겹쳐졌기 때문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죠.

- 이번 아라카와 강변 행사에 적지 않은 비용이 들 텐데 시민들로부터 후원 같은 것 받고 있나요?

= 아직은 후원을 받지 않고 해 나가고 있습니다. 내가 변리사거든요. 변리사업을 하면서 모아둔 돈 가지고 재단을 설립해 꾸려가고 있어요. 사업이 더 활성화돼서 많은 국민들이 참여하고 경제적인 지원도 해줄 수 있게 된다면 점점 더 힘을 받을 수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활동도 훨씬 더 활발해질 겁니다.

- 지금도 변리사 일을 하고 계신가요?

민주화시대 잘 먹고 잘 살았던 것에 대한 부채감 갚아야

= 아니요. 변리사는 직업은 그냥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직업인데, 파트너십제로 사무실을 바꾸고 70살에 은퇴했지요. 지금은 은퇴한 지 5년이 지났습니다.

- 그러면 재단 사업은 일종의 사회적 환원이 되겠네요.

= 내가 남들이 민주화를 위해서 감옥 가고 고문받고 하던 시절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냥 잘 살았잖아요. 속에 있던 아픈 그것을 갚자는 마음으로 은퇴 뒤에 더욱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보답해 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 이번 행사를 준비하면서 일본에 대해 하시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 일본이 대처하는 방식은 100년 전의 관동 대지진 때도 그랬지만 10여 년 전에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 참사 때도 어쩐지 투명하지 않아 보여요. 그것은 결국 일본 민중이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일본의 우익이 저렇게 막가파식으로 나갈 수 있는 것도 국민들이 잠자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주권재민이면 내가 주인인데, 각자 내가 책임을 지는 사람이 돼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후쿠시마 핵오염수 대응도 역사 바로알기부터

- 후쿠시마 핵오염수 해양 투기를 막을 방법이 없을까요.

= 후쿠시마 핵오염수 해양 투기는 미국이 허용했으니 그렇게 밀고 가는 것이겠지요. 지금 한미일 3국 공조체제로 미국이 앞장서면 그냥 무조건 따라가고 있으니까.

우리는 그래도 그냥 쫓아만 갈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장, 우리한테 해가 되면 해가 된다고 주장을 해야 되는데, 참 걱정입니다.

결국 문제는 역사 바로 알기, 역사 바로 세우기 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굴절된 상태로 가면 또 다시 잘못을 되풀이하게 된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제대로 알아야 하고, 또 제대로 참여를 해야 한다. 바로 거기서 진정한 평화가 일어나고 진정한 생명 존중이 생겨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행사를 계기로 한일 간에도 양식이 있는 단체들이 상호 교류를 통해 역사를 바로잡아가는 일에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씨알 재단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결코 반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일이 아니면 극일인가요?

= 극일이라는 것도 반일보다는 좀 낫지만, 상대를 의식하면서 그것을 넘어서겠다는 것이니까, 적당한 용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서로의 생존권을 인정해 주고 그 바탕 위에서 상호 신뢰를 쌓아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 생각을 바꿔야죠.

상대를 이기겠다, 꺾겠다는 생각,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낳는 요소들은 없어져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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