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룡의 한국어사전 "백지화: '없던 일로' 아닌 중단"

"대통령 공약도 장관이 백지화할 수 있어"

백지화 자료 요구에 "마음 속 자료 제출할까?"

법근거도 행정절차도 없는 정치적 단독 결정

"근거 없는 의혹 중단하면 오늘이라도 추진"

2023-07-27     김성진 기자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26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현안 질의에서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답변한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업 백지화 관련 내용은 '백지화 선언'이 법적 근거와 행정 절차도 없는 정치적 단독 결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며, 국민을 기만한 행위임이 여실히 드러났다.

원 장관은 백지화 관련 자료 요청에 "제 마음 속을 끄집어 보낼까"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대통령의 공약 사항인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업을 일개 장관이 백지화할 수 있냐는 질문에도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국민과 대통령 위에 있는 국토부 장관이었다.

원희룡의 말장난…"백지화 실질은 중단"?

15년간 추진했던 서울-양평 고속도로 건설 사업 종점이 정권 교체 뒤 갑자기 김건희 씨 일가 땅 500m 인근으로 바뀌는 등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원 장관은 지난 6일 난데없이 고속도로 사업 자체를 '백지화'하고 그 책임을 민주당에 떠넘겼다.

'백지화(白紙化)'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어떠한 일을 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리다'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정치·행정 영역에서도 백지화라는 용어는 사전 정의와 같은 의미로 통용된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26일 국회에서 열린 국토교통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2023.7.26. 연합뉴스

그러나 원 장관과 국토부의 백지화 의미는 국민이 이해한 의미와는 전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국토부 관계자는 최근 백지화를 "충격 요법"이라고 발언해 물의를 일으켰고, 원 장관은 백지화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민주당이 거짓 선동을 멈추면 사업 추진을 검토하겠다"며 슬그머니 사업 재추진 쪽으로 발을 뺐다.

국토부는 지난 24일 낸 보도참고자료에서 '백지화 선언'에 대해 "근거없는 의혹 제기로 사업추진이 어렵기 때문에 사업을 중단한 것으로 사업 자체가 취소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백지화 선언을 했는데 백지화는 아니'라는 의미다.

원 장관의 '백지화'가 얼마나 즉흥적인 발언이었는지에 대해선, 이날 김민기 국회 국토교통위원장(더불어민주당)의 질문에서도 드러났다. 원 장관은 대놓고 백지화가 '중단', 즉 잠시 멈춘 것이라는 의미라고 말을 바꿨다.

김민기 위원장(이하 김민기) 장관님께서 서울-양평 고속도로 백지화를 선언하셨는데 백지화를 선언하면 백지가 되는 겁니까?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하 원희룡) 그 부분은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김민기 잠깐만요. 짧게 하세요. 짧게 한 번 설명해 보실래요?

원희룡 예, 당시 7월 6일 주민 설명회가…

김민기 아니, 그런 것 말고, 고속도로가 행정 절차에서 본타(타당성 조사)까지 들어가 있었는데, 장관의 권능으로 그것을 백지화라고 하면 백지화가 되는 거냐 이거예요.

원희룡 그 실질은 중단입니다.

김민기 중단요?

원희룡 네

김민기 그러면 백지화가 아니네요?

원희룡 백지화라는 것이 그동안 진행된 게 아직 예산 투입이라든지 공사라든지 이런 게 전혀 진행된 게 없지 않습니까? 의사결정도 된 게 없습니다. 그러면 중단이 되면 이게 무기한 끌다 보면 무산이 될 수도 있겠죠.

김민기 장관님, 백지화라고 국민들은 다 알고 있고요. 양평 주민들께서는 이것 때문에 큰 우려를 갖고 있고요. 그러면 지금 백지화가 아니라 중단이었다라고 제가 이해를 해도 되겠습니까?

원희룡 제가 그때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만약에 거짓선동이 임기 내내 계속된다면 다음 정부에서 해라. 거짓 선동이 중단되면 즉시 추진한다.

김민기 두 번째 질문은 백지화된 것을 장관의 권능으로 다시 시작하자, 그러면 다시 되는 거냐 이렇게 물으려고 했는데, 그럼 백지화가 아니고 잠깐 중단되었던 거다라고 저는 이해하겠습니다.

원희룡 위원장님, 또 그렇게 단정 지으면서 가십니까?

김민기 아니 지금, 백지화(=중단)라고 그랬잖아요! 지금 여태까지 행정 행위가 있었지 않습니까!

 

김민기 국회 국토교통위원장(더불어민주당)이 26일 국토교통위원회에서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2023.7.25. 국회방송 갈무리

백지화 자료 요구하자 "마음 속 자료 제출할까요?"

원 장관의 백지화 선언의 의미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법적 근거나 행정 절차적 정당성을 갖추지 않았다는 점도 민주당 김병욱 의원의 자료 제출 요구 과정에서 드러났다.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하 김병욱) 원희룡 장관님이 백지화 선언을 발표했지 않습니까? 백지화 선언을 용산과 협의 없이 당신이 본인이 직접 결정해서 발표를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백지화 선언 이후에 어떠한 행정 처리 절차를 거쳐서 서울-양평 고속도로가 그동안 행해진 갖은 행정 처리를 무효화할 수 있는지, 그 내용을 달라고 자료 제출 요구를 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원희룡 장관님의 백지화 선언을 뒷받침할 행정 처리 절차를 미리 가르쳐달라는 거죠. 그런데 지금 국토부의 답변은 '검토 중에 있으며 답변이 불가하다, 양해 바란다' 이렇게 답변이 왔습니다.

원희룡 무슨 자료를 요청하시는 건지. 자료 제출 요구 발언이지 않습니까, 지금?

김병욱 백지화 선언 이후에 서울-양평 고속도로를 백지화하기 위한 행정 절차를 말씀해달라는 거예요.

원희룡 제 마음속에 있는 내용을 자료로 제출해 달라?

김병욱 (발언 시간 지나 마이크 꺼짐) … 법에 나와 있는 행정 절차가 뭐냐! 그걸 모르고 백지화 선언을 했으면!…

원희룡 아니, 자료라는 게 국토부에서 생산된 문서나 물건이라야 자료가 될 거 아닙니까? 제 마음 속을 끄집어 보낼까요?

김병욱 (발언 시간 지나 마이크 꺼짐) 마음 속이 아니죠! 그건 분명히 없는거죠!

원희룡 자료가 없습니다!

 

26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서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의원(오른쪽)의 질의에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왼쪽)이 답변을 하고 있다. 2023.7.27. 국회방송 갈무리

"대통령 공약도 장관이 백지화 할 수 있다"?

원 장관의 발언은 백지화 결정과 관련해 논의한 내용도, 문건도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 장관 본인이 정치적으로 결단했기 때문에 문서가 있을 수 없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15년 국책사업이 장관 '마음'을 근거로 '백지화'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하지만 원 장관은 백지화가 장관의 단독 결정 사항이라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통령 공약 사항이었던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업도 장관이 백지화 선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대통령실의 개입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실은 지난 9일 서울-양평 고속도로 백지화와 관련,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국토부에서 해야할 문제"라고 했지만, 해명이 필요해 보인다.

김병욱 원희룡 장관님, 7월 6일 서울-양평 고속도로 백지화 선언 잘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말씀하세요.

원희룡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김병욱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러면 잘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네요?

원희룡 차악이죠.

김병욱 그러면 좀 신중했어야죠.

원희룡 최악을 막기 위한 차악이었습니다.

김병욱 그런데 그 최악을 막기 위한 차악을 선택하는 데 단 하루밖에 안 걸렸습니까?

원희룡 고민은 7월 초부터. 특히 강득구 의원과 그 전 민주당 양평군수가 명백한 거짓말을 하고 그것을 가지고 여러 위원들이 함께 기자회견을 하는 보고. 아, 이제는 프레임으로 가는구나. 그래서 며칠 더 답변을 해 봤습니다만, 똑같이 이걸 답변하면 저거를 제기하고 그렇게 하면서 몰고 가니, 되풀이된다라는 것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김병욱 그러면 7월 초부터 7월 6일이면 약 일주일이지 않습니까? 일주일 사이에 용산하고 (백지화) 협의는 없었습니까? 진짜로? 꽤 긴 시간인데. 솔직히 말씀하세요.

원희룡 용산(대통령실)하고는 국토비서관실과 우리 실무자들이 실제 현황들에 대해서는 논의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계속 해명하고 자료를 내는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서로 보고도 하고 공유를 하고 있었죠. 그런데 이렇게 해서 될 문제가 아니구나라고 제가 깊은 고려에 빠진 겁니다.

김병욱 용산하고는 합의가 안 됐지만, 이런 논점(백지화)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 그거는 용산하고 협의를 했다는 거네요?

원희룡 그렇습니다.

김병욱 그런데 이 서울-양평 고속도로가 윤석열 대통령 공약이지 않습니까?

원희룡 그렇습니다.

김병욱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인데 일개 장관이 백지화 선언을 할 수 있습니까?

원희룡 고속도로의 추진 그리고 그에 대한 정책 결정은 국토교통부 장관의 책임과 권한이고요. 지금, 특혜 프레임이 …

김병욱 대통령 공약을 무력화하는 발언을 일개 장관이 할 수 있냐고요.

원희룡 할 수 있습니다.

김병욱 진짜로요?

 

26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서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의원(오른쪽)이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왼쪽)에게 질의를 하고 있다. 2023.7.27. 국회방송 갈무리

원희룡 백지화 국가재정법, 도로법 위반 소지

이 같은 원 장관의 발언을 종합하면 백지화는 △대통령실과 논의는 했지만, △본인이 일주일 정도 고민해서 단독으로 결단을 내린 것이고, △법적 근거나 행정 절차를 서류로 남긴 것은 없다로 요약된다. 이렇게 백지화가 가능할까?

답은 '불가능'이다. 국가재정법 제50조에 따르면 완성에 2년 이상 소요되는 사업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대규모 사업을 변경하고자 할 때에는, 주무 중앙관서의 장이 그 사업규모와 총사업비, 사업기간을 미리 기획재정부 장관과 협의해야 한다.

그러나 원 장관의 발언대로면 서울-양평 고속도로의 백지화 선언에 앞서 기재부 장관과 별도의 협의를 거친 적이 없다. 원 장관 스스로 결정한 사안이므로 국가재정법 위반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도로법 위반 소지도 있다. 도로법 제5~7조는 '국가도로망 종합계획'을 변경하거나 '고속도로 건설계획'을 변경하는 경우, 도로정책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치도록 정하고 있다.

서울-양평 고속도로는 각각 '제2차 국가도로망종합계획(2021-2030)'과 '제2차 고속도로 건설계획(2021-2025)'에 반영된 사업으로서 위 조항의 적용을 받는 사업이다. 노선 백지화를 하려면 심의를 거쳐야 하는데 심의도 거치지 않았다.

그러나 원 장관은 이날 줄곧 민주당이 김건희 씨 특혜 프레임을 내세워 백지화할 수밖에 없었다는 취지로 말했다. 의혹 제기도 '괴담' 취급을 했다.

그는 "이런 수법을 한두 번 당했냐"며 "소고기, 천안함, 사드, 성주 참외, 전자파"라고 언급했다. 또 "제가 말한 백지화는 문재인 대통령이 했던 원전 백지화보다는 조건부"라며 논점에 맞지도 않는 말을 꺼내 빈축을 샀다.

이와 함께 원 장관은 민주당이 의혹 제기를 멈추면 고속도로를 재추진할 수 있다고 했다. 서울과 수도권, 강원권, 충청권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국책 사업을 볼모로 잡고 자기 정치를 하고 있음을 드러내면서도 당당한 태도였다.

원 장관은 이날 국토위에서 "거짓 선동만 해소되면 바로 (재추진으로) 갈 수 있다" "근거없는 의혹 확산을 제기를 중단하면 오늘이라도 정상 추진한다" 등의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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