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 수사권 이관해도 '국정원 공작' 근절될지 의문”
2019년 국정원 사찰 피해자 최승제 씨 인터뷰
방첩사 살아있고 국정원 예산 얼마든지 전용가능
“방에 CCTV 설치, 나와 만난 사람 모두 감시 대상”
사찰 드러난 뒤 "나도 찍힐까" 활동가 위축·고립
"지금 검찰 공포정치도 다 그런 노림수"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프락치를 통해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국가정보원의 프락치 사찰 피해자 최승제 씨는 아직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2019년 프락치 김 모 씨가 양심선언을 한 이후 이 사건은 수면 위에 올라왔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프락치는 ‘특수한 사명을 띠고 어떤 조직체나 분야에 들어가서 본래의 신분을 속이고 몰래 활동하는 사람’으로 정의돼 있다.
<경향신문> 6월 2일 자 보도에 따르면 검찰은 국정원이 프락치를 통해 민간인 최 씨 등을 사찰한 것에 대해 불기소 처분했다. 이병기·이병호·서훈 전 국정원장과 국정원 수사관들을 불기소 처분한 것이다.
<민중의 소리> 보도에 따르면 지난 2020년에도 통일부 허가를 받고 북한 무역회사에 폐타이어를 수출하는 사업을 하던 A씨가 공안기관 협조자(이른바 프락치) B씨를 모해위증 혐의로 고소한 사건을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했다.
검찰이 잇따라 국가정보원 프락치에 관대한 결정을 내리는 와중에 2019년 당시 국정원 민간인 사찰의 피해자였던 최승제 씨를 지난 4일 경남 진주시 진주환경운동연합 사무실에서 만났다.
최 씨는 진주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뿐 아니라 지역재생연구소 소장, 주민자치법제화전국네트워크 공동대표, 진주주민연대 집행위원장, 지역플랜 협동조합 이사장 등 수많은 직함을 맡아 열성적으로 진주 지역에서 시민사회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KBS 진주 ‘정보 주는 라디오’에서 ‘최승제의 전지적 지역 시점’이라는 고정 코너에서 방송 활동도 하고 있다.
그런데 2019년까지만 해도 최 씨에게 직함이 하나 더 있었다. 프락치 김 씨가 활동했던 ‘통일경제포럼’의 운영위원장이 그것이었다. 개성공단 등 남북교류협력을 통해 한반도 경제의 돌파구를 열자는 취지의 박근혜 정부와 조선일보가 말했던 ‘통일대박론’과 언뜻 보기에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성격의 단체였다.
그런데 이 단체가 풍비박산 났다. 최 씨는 “통일경제포럼을 유지할 동력이 떨어졌다”면서 “공안 탄압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청년들에게 주저함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저희 세대는 학생운동을 하면서 사찰당하는 것과 같은 경험을 했지만, 통일경제포럼에 새로 합류한 청년들은 그렇지 않다”면서 “이미 활동하던 청년들이 위축되면서 다른 사람을 모집하는 것도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최 씨는 “국가정보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사건이 터지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주저하게 된다”면서 “사건이 커지면 나도 찍히지 않을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공포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갈라지게 된다”면서 “최근 경남권 간첩단 사건에서 보듯 활동에 주저하도록 하는 생각을 하도록 하는 것이 이들의 노림수”라고 했다.
국정원 사찰은 결국 핵심 활동 주체의 고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국정원은 프락치 김씨를 통해 최 씨를 사찰하면서 최 씨와 연결된 인물들도 사찰했다. 최 씨는 “나와 만나면 다 감시 대상이 됐다”면서 “나와 연결된 변호사도 포함됐다”고 말했다. 이어 “국정원에서 이런 작업을 하지 않으면 서로 같이 어울리고 함께 활동할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함께하지 못하게 된다”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하지만 결국 그런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최 씨는 또 “지금 검찰 공포 정치도 다 그런 것”이라면서 “저들은 조금 세게 나가면 사람들이 어떻게 갈라지게 되는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와중에 그것을 반대하며 더 강하게 싸우는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더욱 고립되게 된다. 최 씨는 “강하게 싸우려는 사람 옆에는 아무도 안 가려고 한다”면서 “두려움도 있지만 위축된 자신이 잘못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지만 이런 종류의 고립은 다 극복된다”면서 “두려움에 위축됐던 사람들도 혐의가 진짜가 아닌 것을 다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 씨는 공안 탄압과 고립 문제를 넘어서는 자신만의 영역에서의 활동을 지속하면서 국정원 이슈에 대응하면 된다고 했다. 그는 “지역 시민 단체면 시민 단체, 민주노총이면 민주노총에서 자신의 활동을 지속하면 된다”면서 “그러다가 국정원 이슈로 행동해야 할 때가 되면 결합해서 하면 된다”고 말했다.
최 씨 사찰 사건을 보면 없는 것도 만들어내는 ‘국정원 신공’을 잘 알 수 있다. 최 씨는 “서울대 출신(최 씨는 서울대 출신임) 중 학생운동을 그만두고 사회 생활하는 친구들을 만나 동문 모임을 하면 그게 회합이 된다”면서 “민혁당 사건 관련자나 그런 관계자는 오지도 않았는데 프락치에게 그런 진술서를 쓰도록 강요한다”고 말했다.
프락치 김 씨의 증언을 보면 이보다 더한 경우도 많다. 기자를 하는 친구가 군사 기지 인근에서 기사를 보내고 데스크에 보고했는데 이를 데스크에 군사 기밀을 빼내 보고했다고 하는 등 황당한 내용이다. 지시받고 암에 걸린 동료의 병문안을 갈 때, 자녀 돌잔치를 할 때 프락치가 만난 사람들의 대화를 녹취하기도 했다. 이미 3자에 전달하려고 마음먹고 행한 녹취라는 점에서 ‘당사자 간 대화 녹음’이라고 볼 수 없는 정황이다.
국정원감시네트워크가 2019년 9월 발표한 국가정보원 '프락치' 공작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프락치 김 씨는 국정원이 미리 작성해 온 메모에 따라 진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는 4쪽에서 "국정원은 ‘A대 B대 출신 ++++ 지하혁명조직’을 만들 목적으로 허위로 ‘조직’이 있는 것처럼 기재하라고 하였고, 그 사실을 '너와 나 둘이서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할 비밀'이라고 말하였음"이라고 밝혔다. 프락치 김 씨의 활동을 통해 실체가 없는 특정 대학 출신의 '지하혁명조직'을 만들어 낼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 씨는 통일경제포럼에서 활동할 당시 국정원에서 지급한 돈으로 임차한 방에 살았다. 서울에 가면 프락치 김 씨가 얻은 방에서 함께 생활했기 때문이다. 프락치 김 씨의 증언에 따르면 방에는 국정원에서 설치한 CCTV가 있었다. 최 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 씨는 “국정원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집단”이라면서 “CCTV를 설치했다는 증거도 안 했다는 증거도 없는데 실정법상 문제가 없다면서 항상 모호함으로 처리한다”고 말했다. 이어 “마음만 먹으면 하고 싶은 것을 다 한다”면서 “프락치 포섭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최 씨는 학생운동을 할 당시부터 국가 정보기관의 사찰을 상시로 느껴왔다. 최 씨는 “학생운동 시절의 경험을 생각해보면 주변에 정보기관은 당연히 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서 “통일 관련 단체 또는 통일 단체가 아니더라도 시민 단체를 만들면 상시로 사찰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경상대 대학원에서 대학원 학생회만 만들어도 경찰 정보과에서 보고 있었다”면서 “일반적인 다른 단체, 기관의 총무과 등에서도 동향 파악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 씨는 또 “국정원이 아니더라도 경찰, 검찰, 방첩사 등 다른 국가기관에서 사찰할 수 있다”면서 “국정원에 이런 사찰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이 상식적인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 씨는 최근 국정원의 움직임을 대공 수사권을 놓지 않으려 하는 밥그릇 싸움으로 봤다. 최 씨는 “지금 국정원은 대공 수사권을 놓지 않기 위해서 생존권 싸움을 하고 있다”면서 “사건을 만들어야 대공 수사권을 놓지 않을 명분이 쌓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실 국정원 대공 수사권 경찰 이관의 핵심은 자금 사용의 투명성 강화다. 정보기관이라는 타이틀 아래 숨어서 비밀 자금을 자의적으로 집행하는 관행이 모든 자금 집행을 공개해야 하는 경찰로 옮겨가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최 씨는 “프락치에게 정기적으로 활동비를 줬다는데, 이는 사실 매우 큰 금액이라는 의미”라면서 “예산 체계 등을 철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과연 대공 수사권을 이관한다고 불법 공작이 근절되느냐는 근본적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 씨의 걱정은 근거가 있다. 국정원이 대공 수사권을 경찰에 넘긴다고 해도 방첩사가 여전히 활동하고 있으며 국정원의 방첩, 해외 등 다른 기능을 위한 예산도 얼마든지 전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산이 베일에 싸여 있는 국정원 퇴직자 모임 ‘양지회’, 국정원 공제회 성격의 ‘양우회’ 등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대공 수사권 이관에 대비하기 위한 국정원의 대책은 면밀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놓칠 가능성이 있다. 코인, 블록체인 등 다른 익명화 수단을 통한 자금 세탁을 해놓았을 가능성, 고전적 방식의 차명 관리를 하고 있을 가능성 등 모든 경우의 수를 세밀하게 따져봐야 할 것이다.
실제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공안 경찰은 19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힘이 빠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지만 1989년 화려하게 부활했다. 프락치였다는 의혹을 받는 김순호 씨 등의 역할을 통해 조직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그 존재를 증명했다. 국정원이 설령 대공 수사권을 경찰에 이관한다고 해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민주시민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최 씨는 국정원의 불법적 활동을 제어하기 위한 민주당의 적극적 역할을 주문했다. 그는 “시민 사회 활동을 하는 개인이 여기에 대응하기 어렵다”면서 “민주당 등 힘을 가진 제도권 정당이 제 역할을 해야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