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표, 선거제 개편 '좁은 길'로 들어가라
전원위 이후 민주당의 딜레마와 탈출구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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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합의냐, 현행법이냐? 민주당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지금의 정치지형에선 거대양당을 효과적으로 압박할 제3정치세력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 민주당이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다. 6석 원내정당, 정의당은 무기력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민주당으로 당선된 1석 원내정당, 시대전환당과 기본소득당도 당 대표인 국회의원은 지명도가 생겼지만 정당으로서는 존재감을 갖지 못한다. 진보당이 2022년 지방의회 진출에 이어 전주 보궐선거를 통한 국회입성으로 기세를 올리고 있지만 대중적 확장력은 미지수다. 기후위기에도 불구하고 녹색당은 소수운동집단으로 머물면서 정치의제 선점과 정치스타 배출에 실패해서 존재감이 전혀 없다. 금태섭 전 의원이 신당창당 계획을 밝혔지만 중도층에 얼마나 어필할지는 지켜봐야한다. 요컨대, 선거제 개편에 관해 거대양당, 특히 민주당을 압박할 원내외 정치세력이 20대 국회 시절에 비해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시민사회가 나서지 않는 이상 바람직한 선거제 개편을 이끌어낼 정치적 역학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된다.
2020년 개정선거법은 단독과반수 의석을 어렵게 한다
현재로서는 민주당과 국힘당 모두 불비례성을 고치지 않고 계속 그 수혜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아주 강하다. 두 당은 다음 총선에서 죽기살기로 단독 과반수 의석을 노린다. 국힘당은 여당으로서 그래야만 안정적으로 윤석열 정권을 뒷받침하고 정권재창출을 꿈꿀 수 있다. 민주당은 지금의 169석으로도 윤석열 정권의 권력남용을 막지 못하는데 국회의 과반수 의석마저 못 가지면 무슨 수로 검찰정권을 견제할 수 있겠냐며 결의를 다진다. 거대양당이 단독 과반수 의석을 향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이상 비례성 강화 선거제 개편에 합의하긴 어렵다. 정당 득표율과 의석수의 비례성을 강화할 경우 지금처럼 풍향에 따라 약간의 지지율 차이로 큰 의석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해 단독 과반수가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민주당이 ‘도시 중선거구, 농촌 소선거구’ 복합안으로 도망가기는 쉽지 않다. 대선 끝머리에서 그토록 주창했던 다당제 전환에 걸림돌이 되는 양당제강화 개편안이라서 명분이 없다. 국힘당 반대를 무릅쓰고 현행법의 준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살려내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현행법으로 다음 총선을 치를 경우 민주당은 제1당이 되더라도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2020년 총선에서는 지역구 253개 중 163개(지역구 의석의 64.4%이자 총300석의 54.3%)에서 승리하고도 위성정당을 내세워 비례의석에서 17석을 더 얻었지만 연동형 선거법이 시행되면 지역구에서 다시 163석을 승리해도 정당 득표율이 54.3%를 넘지 못할 경우 비례의석에서는 한 석도 추가로 건지지 못한다. 지역구에서 150석을 승리해도 정당득표율 50%를 넘기지 않으면 마찬가지고, 지역구에서 140석을 승리해도 정당득표율 47%를 넘기지 않으면 같은 결과다. 이처럼 지역구에서 선전할수록 비례의석(47석)에서 1석도 갖지 못할 개연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지역구 의석의 55%(139석)를 얻고도, 즉, 선거에서 승리하고도, 정작 비례의석에서는 한 석도 못 갖고 과반수의석 확보에 실패할 수 있는 것이다.
2020년 개정선거법은 거대양당의 분당을 부채질한다
물론 여기에는 연동조정 비례의석 47석을 모두 제3당들이 가져간다는 전제가 숨어있는데 현실 정당 득표율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지금처럼 3% 하한요건을 고수하는 이상 3%이상 정당득표율을 기록한 제3당들의 정당득표율 합계가 15.7%를 넘지 않는 이상 제3당들이 47석을 모두 차지할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는 거대양당에서 분당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3% 넘는 정당 득표율을 기록할 제3정당이 정의당 하나밖에 없을 가능성이 높고 그마저도 불확실할 수 있다. 촛불시민들을 주축으로 삼는 제3 시민정당의 출현 가능성이 점쳐지는 배경이다. 더 현실적으로는 국힘당에서 이준석-유승민-안철수 계열이 분당하고 민주당에서 반이재명 계열이 분당할 때 3% 이상 정당득표율 합계가 15.7%를 넘겨서 연동형 비례의석이 모두 제3당들의 정당득표율 대비 부족의석 보전용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현행 선거법을 국힘당이 거부하고 민주당이 딜레마로 보는 이유다. 현행 연동형 비례대표제법은 전국의 소선거구에서 전패하거나 후보를 내지 못하는 군소정당이라도 정당 득표율을 3% 이상만 올리면 총 47석 한도 안에서 정당득표율의 50%만큼 비례의석을 차지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그렇기 때문에 거대양당에서 이른바 공천학살을 걱정하는 비주류들이 분당해서 독자정당을 시도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병립형 비례대표제 아래서는 정당득표율 3%를 받아도 1.41석을 가질 뿐이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 아래서는 100% 연동형에서는 9석, 50% 연동형에서는 4.5석을 갖는다. 정당득표율이 10%에 달하면 병립형에서는 4.7석을 가질 뿐이지만 100% 연동형에서는 30석, 50% 연동형에서는 15석이나 갖는다. 분당파들은 정당 득표율만으로도 15석 넘게 가질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민주당과 국힘당의 지도부는 이런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해서 현행 선거법을 그대로 안락사시킬 강렬한 공통 이해관계를 갖는다.
2020년 개정선거법, 민주당의 딜레마가 아니라 대의다
딜레마는 명분과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아서 발생한다. 앞으로도 민주당은 당론으로 선거제 개편입장을 정하지 않고 최후순간까지 여기저기 눈치를 보며 당리당략을 쫓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민들은 이런 기회주의적이고 무책임한 정치행태를 제일 싫어하고 질타한다. 민주당은 당연히 다당제 정치개혁 대의에 충실해야 한다. 불비례성의 수혜자가 되려 하기보다 불비례성의 교정자가 되어야 한다. 국회의장이 미련을 가진 ‘도농복합안’을 양당제 강화장치로 규정하고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국힘당이 요구할 2020년 이전의 선거제도 회귀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결국 민주당은 2020년 개정선거법을 놓고 국힘당과 줄다리기를 할 수밖에 없다. 이때 전국단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권역단위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꾸자는 국힘당의 요구도 단호하게 뿌리쳐야 한다. 권역단위 연동형 비례대표제에서는 제3당의 원내진입이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현행 선거법을 정치개혁 대의로 홍보했던 2020년과 달리 민주당이 이제 와서 내팽개치지도 담아내지도 못하는 딜레마로 여기는 이유는 그때와 달리 지금은 명분 있게 압박하는 힘 있는 외부 정치세력이 없는 반면 내부적으로는 분당을 막아야 할 현실적 필요성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2020년 개정선거법이 딜레마 취급을 받는 이유는 민주당의 당리당략 때문이지 국익이나 대의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속 보이는 당리당략을 선택하지 말고 대의를 선택해서 살길을 찾는 게 정도다. 이미 2020년 선거법 개정을 통해 향후 비례성을 강화해서 제3당들의 원내진입을 촉진하며 다당제 합의(consensus)정치로 나아가겠다고 국민들에게 엄숙히 약속했다. 그리고는 똑같이 위성정당을 만들어 위의 대국민 약속을 파기한 데 대해 지금에라도 국민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2020년 선거법 개정 당시의 다당제 전환 약속은 물론이고 2022년 대선 당시의 다당제 전환 약속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선언하고 구체적 행동과 실천으로 진정성을 입증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정성 있는 실천행동은 두 갈래로 진행되어야 한다. 하나는 국민이 강력하게 요구하는 세비 감액과 보좌진 감축, 국민소환제 입법, 이해충돌 사안이나 장기 교착사안에 대한 시민의회법 제정 등 의원특권 내려놓기를 신속하게 단행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불비례성이 만들어내는 초과의석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버리고 위성정당 금지조항을 신설해서 2020년 개정 선거법의 준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되살리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당이 해야 할 최소한의 일이라면 최대한은 2020년 개정선거법의 이중제약을 풀어 다당제 전환을 앞당기는 일이다.
의원특권 해소와 다당제 정치개혁, 시민의회에 맡겨보라
최소한이든 최대한이든 현실 정치인이 직접 나서서 의원특권 해소와 다당제 전환 등 본격적인 정치개혁을 진두지휘하는 건 대단히 큰 모험과 부담일 수 있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묘수가 있다. 시민의회를 구성해서 맡기는 방안이다. 의원특권을 어떻게 완화, 해소해야 하는지, 능욕을 당한 2020년 개정선거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 실정에 가장 맞는 바람직한 선거제가 어떤 것인지를, 당사자성이 강한 국회의원과 여야 정당의 협상 및 셀프 입법에 맡기지 않고 추첨으로 선발된 일반시민의 집단지성과 사회적 합의에 맡기겠다고 선언하고 그 권고안을 최대한 존중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다짐하면 된다.
이미 민들레 지면을 통해 여러 차례 소개했듯이 거대 양당과 현역의원들의 셀프 입법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당리당략과 재선욕망에서 자유로운 추첨 시민의회를 구성해서 맡기는 방안이 가장 유력한 대안이다. 셀프 입법 특권 해소를 내걸고 추첨 시민의회를 만들어내는 것은 시민 눈높이에서 바람직한 선거제개편과 후속 정치개혁을 이룰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도 근본적인 정치개혁이다. 의원특권 해소와 선거제 개편, 기타 정치개혁에 관한 한, 시민의회의 숙의와 권고에 맡기는 방안만큼 절차적 설득력과 실체적 개혁성을 겸비한 타개책은 없다.
거대 양당이 시민의회 방식에 귀를 내주지 않는 실질적 이유도 시민의회 방식의 개혁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행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2중 제약을 떼어버리고 온전한 독일식 혼합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나아가는 길도 시민의회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다양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집단학습과 숙의과정을 거친 시민의회는 당리당략과 재선 욕망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국민 눈높이에 맞는 의원특권 해소안과 다당제 정치개혁안을 높은 수준의 사회적 합의로 이끌어낼 게 틀림없다. 물론 시민의회가 현행 연동형 비례대표제 강화 안을 제출할지 예상치 못한 다른 대안을 낼지는 아무도 미리 속단하거나 장담하지 못한다.
나는 김진표 국회의장이 추첨 시민의회를 소집하거나 의원특권 해소에 앞장서는 용기를 보여줬더라면 좋았겠다고 피력한 바 있지만 실제로 이 일을 할 수 있고, 해야 할 정치 지도자는 민주당 이재명 대표다. 작은 당리당략에 연연할 때는 딜레마적 상황에서 갈피를 잡기 어렵지만 대의와 민심에 충실할 때는 딜레마적 상황에서 빠져나올 길이 보이는 법이다. 그 길은 의원특권 및 초과의석과 헤어질 결심을 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길이지만 일단 그 길을 통과하고 나면 정확하게 지지율만큼만 의석수가 정해지고 시나브로 정치신뢰가 회복되는 공명정대한 큰 길이 기다린다. 그 희망의 길 앞에서 언제까지 좌고우면하며 서성거릴 것인가. 좁은 길로 들어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