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행령 아니면 거부권…윤석열의 상습적 국회 무력화

양곡관리법 끝내 거부…예사로 입법부 무시 행태

문재인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 단 한 차례도 없어

윤 대통령, 아무 대안 없이 "포퓰리즘 법안" 공격

'노란봉투법' '쌍특검법' 등에도 똑같이 대응할 듯

종전엔 위법·위헌적 '시행령 통치' 꼼수 적극 활용

거부권 '양대 무기'…여소야대 현실에도 협치 괴멸

2023-04-04     김호경 에디터
윤석열 대통령이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입장하고 있다. 2023.4.4. 연합뉴스

한 손엔 시행령, 다른 손엔 거부권이라는 쌍칼을 들고 국회를 무력화하는 대통령.

국회의 장관 해임 건의에 대해 잇따라 거부권을 행사했던 윤석열 대통령이 이번엔 법률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꺼내들었다. '시행령 통치'라는 위법·위헌적 수법을 애용해온 윤 대통령이 거부권에까지 맛을 들여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모양새다. 입법부 무시를 예사로 아는 이런 방식은 앞으로 계속 반복돼 극한 대치 정국이 윤석열 정권 내내 이어질 전망이다.

윤 대통령은 4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초과 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 매입하도록 하는 내용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법률안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했다. 양곡법 개정안이 지난달 23일 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지 12일 만이다. 법률안 거부권 행사는 윤 대통령 취임 이후 처음이자, 2016년 5월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상임위의 상시 청문회를 가능케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거부한 이후로는 약 7년 만이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를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반면 윤 대통령은 이미 박진 외교부 장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 건의에 대해 각각 거부권을 행사한 바 있다. 국회의 장관 해임건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건 2016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거부한 게 헌정사상 첫 사례였고, 지난해 10월 윤 대통령이 박진 장관 해임건의안을 거부함으로써 두 번째 전례를 만든 것이었다.

윤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정부는 이번 법안의 부작용에 대해 국회에 지속적으로 설명해 왔지만 제대로 된 토론 없이 국회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농가 소득을 높이려는 농정 목표에도 반하고 농업인과 농촌 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법안"이라고 말했다.

이어 "시장의 쌀 소비량과 관계없이 남는 쌀을 정부가 막대한 혈세를 들여 모두 사들여야 한다는, 남는 쌀 강제 매수법"이라며 "농식품부를 비롯한 관계 부처는 쌀 수급을 안정시키고 농가 소득 향상과 농업 발전에 관한 방안을 조속히 만들어주길 당부한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쌀 수급과 가격을 '어떻게' 안정시키고 농업 생산성과 농가 소득을 높일 것인지 방법론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아무 대안 없이 '포퓰리즘 법안'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야권을 상대로 정치 공세에만 열을 올린 격이다.

 

4일 경기도 용인시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 저온저장고에서 관계자가 보관 중인 쌀을 살펴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초과 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 매입하도록 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법률안 거부권(재의요구권)을 이날 행사했다. 2023.4.4. 연합뉴스

양곡법 개정안은 쌀값 안정을 위해 수요 대비 초과 생산량이 3~5%이거나 쌀값이 전년 대비 5~8% 하락할 때 정부가 초과 생산량을 전량 매입(시장 격리)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지난달 23일 국회 본회의에서 재석 의원 266인 중 찬성 169표, 반대 90표, 기권 7표의 압도적 찬성표로 통과됐다. 이 법안은 민주당이 김진표 국회의장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정부 매입 요건을 초과 생산량 3%에서 3~5%로, 평년 가격 대비 5% 이상 하락에서 5~8% 이상 하락으로 강화해 수정 발의한 것이었다. 수정안은 또 쌀 재배 면적 증가 시 의무 매입하지 않을 수 있는 예외조항을 둬 정부의 매입 조건과 재량권을 확대했다.

법안 통과 직후 민주당은 물론 류호정 정의당 원내대변인도 브리핑에서 "쌀값 폭락과 천정부지로 오른 농자재비·인건비 탓에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손해가 커지는 굴레를 비로소 끊게 됐다"고 즉각 환영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이 법안이 본회의에 직회부 된 것은 법안 심사를 게을리하며 입법을 막아 온 국민의힘이 자초한 결과"라며 "국회의장의 중재 노력과 야당의 양보에도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은 아무런 대안 없이 반대만 했다"고 정부‧여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등은 통과된 양곡관리법 수정안이 당초 안보다 훨씬 후퇴했다는 점에서 큰 실망을 표시했지만 한덕수 총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윤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공식 건의했다. 이에 전농은 지난달 30일 성명을 내고 "누더기가 될 대로 되어버린 개정안으로 생색을 내는 민주당도 꼴불견이지만, 거기에도 의무수매 조항이 있다고 거부해야 한다는 국무총리의 무책임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라며 "쌀의 가치를 무시하는 국무총리는 쌀을 먹을 자격이 없다"고 집중 성토했다.

전농은 "최근 폭발하고 있는 식량 위기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기후 위기로 인해 이상기후가 발생하며 식량 생산량은 널뛰듯 변하고 있다. 사료 포함 식량자급률(곡물자급률)이 20%에 불과한 한국이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며 "쌀이 과잉생산되면 국가가 수매하고 비축하여 식량 위기를 대비해야 한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이 생산하게끔 독려해도 모자랄 지경"이라고 강조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도 성명서를 내고 "정부는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 추진을 철회하라"면서 "정부의 포퓰리즘 운운과 달리 개정안의 내용은 쌀 수급 균형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일 뿐"이라고 항의했다. 정부의 재정 소요 우려가 과장됐다는 점도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럼에도 끝내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함에 따라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국회로 다시 넘어가 재표결에 부쳐질 예정이다. 법안을 다시 의결하려면 재적의원 과반 출석에 3분의 2 이상 찬성이라는 훨씬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데, 재적의원(299명) 중 국민의힘 의원(115명)이 3분의 1을 넘기 때문에 재의결은 사실상 불가능한다.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 신정훈 쌀값정상화 TF 팀장 및 의원들이 4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열린 '쌀값정상화법' 대통령 거부권 행사 규탄 기자회견에서 관련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3.4.4. 연합뉴스

민주당은 그래도 일단 재투표를 추진하겠다는 방침이다. 결국 부결돼 폐기 수순으로 가더라도 '민생법안'을 상대로 한 대통령과 집권당의 무도한 '힘자랑'을 부각시켜 비판 여론을 더 끌어올릴 수 있다는 판단인 것으로 읽힌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국회 농해수위 소속 의원들을 중심으로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법안을 발의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박홍근 원내대표와 농해수위 위원들, 전국농어민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의 뜻을 무시한 윤석열 대통령을 강력히 규탄한다"면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허위 보고와 '쌀값 정상화법'의 거부를 건의해 농민들을 배신한 정황근 농식품부 장관은 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밝혔다. 이들은 "우리는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것에 굴하지 않고, '쌀값 정상화법'을 지지한 66.5%의 국민만 바라보며 농민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다짐했다.

정의당 이정미 대표도 보도자료를 내고 "양곡관리법은 폭락하는 국산 곡물가 속, 농민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호장치"라며 "해외수입을 통해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거나 기만"이라고 짚었다. 또 "오늘 양곡관리법을 시작으로 여러 법안들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선언이 예상되고 있다"면서 "대통령의 연이은 '거부권 정치'는 곧 입법부의 권한을 심각히 침해하고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점을 엄중히 경고한다"고 했다.

이정미 대표도 정곡을 찔렀듯이 윤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 행사는 앞으로 상습화할 가능성이 높다. 노동자들 파업에 대한 사 측의 무분별한 손해배상을 제한하고 '사용자' 개념과 '노동쟁의' 대상을 확장해 합법 파업의 범위를 넓히려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일명 노란봉투법),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위해 이사회 구성과 사장 선임 절차를 바꾸는 내용의 방송법 개정안,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의사의 면허를 박탈하는 의료법 개정안, 간호사와 간호조무사의 업무를 명확히 하고 근무환경 및 처우 개선에 대한 국가 책무를 담은 간호법 제정안 등이 야권의 민생 및 개혁 입법 과제로서 국회 본회의에 직회부 됐거나 줄줄이 대기 중이다.

김도읍 의원이 위원장인 법사위에서의 의결을 건너뛰는 이들 법안에 대해 국민의힘은 극렬 반대하면서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기대를 걸고 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여소야대 상황에서 이런 무리한 법을 막을 방법은 재의요구권밖에 없다"며 거부권 행사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김기현 대표도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대통령이 헌법에 보장된 재의요구권을 행사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이 벼르고 있고 정의당도 상당 부분 동조하는 이른바 김건희 특검과 대장동 특검의 '쌍특검' 법안이 패스트트랙을 타고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는 경우 윤 대통령이 즉각 거부권을 꺼내들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2023.4.4. 연합뉴스

윤 대통령은 입법부를 상대로 시행령과 거부권을 양대 무기로 활용하는 모습이다. 취임 이래 단 한 번도 야권 지도부를 정식으로 만나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모색해 본 일이 없는 윤 대통령은 여소야대 현실을 우회하기 위해 종전까지는 '시행령 통치'라는 꼼수를 적극 활용해왔다. 현행 법률에 어긋나는데도 검찰 수사권을 도로 확대하고(검수원복),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 신설, 행정안전부 경찰국 신설 등을 밀어붙인 행위 등이 모두 국회 입법을 통하지 않고 국무회의 의결만으로 하위 시행령을 바꿔 진행한 일이었다. 야권에서는 이를 '시행령 쿠데타'라고까지 일컫는다.

시행령과 거부권을 주무기로 삼는 통치에 야권이 강력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국은 얼어붙고 여야 대치는 장기화하며 극한까지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윤 대통령은 협치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야당을 타도 또는 제거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시각을 보여왔다. 비(非)정치를 일상화하다 못해 반(反)정치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는 윤 대통령으로 인해 다른 많은 분야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정치 역시 파탄과 괴멸 상태로 치닫고 있다.

관련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