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연대만이 혐오와 차별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다

[활동가를 만나다] '경계인의 몫소리 연구소' 박동찬

몫이 없는 이들의 목소리, 이주민의 인권 위해 시작

건대앞, 명동, 대림동 등 내란 이후 격화된 혐중집회

왜곡된 정보가 편견과 혐오를 거쳐 폭력적 집회로

일본 내 혐한, 정치권이 나서 혐오표현금지법 통과

각종 세금은 내국인 기준, 민생쿠폰 등 복지는 차별

2025-10-11     이득신 시민기자

조금은 이른 퇴근에 MBC 뉴스를 보고 있었던 9월 25일이었다. 늘 나오던 이런저런 정치뉴스 이후에 대림동 중국인 혐오집회가 방송되고 뒤이어 기자회견 형식의 맞불집회를 통해 혐오반대 시위가 벌어졌다는 소식이 흘러 나왔다. 기자회견을 주관한 시민단체를 찾아 인터뷰하고 싶다는 생각이 샘솟기 시작했다. 구로지역 시민운동을 하고 있는 지인 목사를 통해 <경계인의 몫소리 연구소>라는 단체를 설립 운영하면서 시민운동을 하고 있는 박동찬 소장의 주도하에 해당집회가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고 그를 만나기로 했다. 인터뷰는 대림동에 위치한 그의 시민단체 사무실에서 추석 명절 연휴 직전에 진행되었다.

 

집회에서 발언중인 경계인의 몫소리 연구소 박동찬 소장.

일제 강점기 시절 경북 의성 출신인 그의 고조부가 1920년 만주로 망명을 하게 되면서 그의 가계도는 중국으로 옮겨지게 되었으니 그는 중국동포 5세라고 할 수 있다. 심양에서 태어난 그는 중국에서 초·중·고를 졸업한 후 한국으로 건너와 연세대 국문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게 2015년이었으니 이후부터 크고 작은 활동가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박동찬 소장과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에 대한 느낌은 대단히 차분하고 매우 논리적인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어린 시절부터 능통한 한국어 실력에 시민단체의 경력이 더해진 그는 내가 만나본 그 어떤 활동가보다 탄탄한 논리적 구조로 인터뷰에 응했다.

단체의 이름이 만들어진 경위부터 궁금했다. "구성원의 ‘몫’을 갖지 못한 그림자 같은 사람들, 즉 ‘몫’이 없는 자들을 위한 ‘목소리’를 내보고 싶어서 지은 이름"이라고 박 소장은 말했다. 이주민의 존재를 알리고 선주민과 이주민과의 교집합 마련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중국에 대한 혐오는 12월 3일 내란 이후 본격화된다. 이전의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박근혜 정부 당시의 싸드 배치나 코로나19의 발원지 등 그나마 근거 있는 논리 위에 확산되었다면 이성에 기반하지 않고 근거 없는 중국 혐오가 윤석열의 내란을 기점으로 정점을 치닫기 시작한 것이다. 12·3 계엄령 선포의 계기 중 하나로 윤석열이 지목한, 부정선거에 중국이 개입했다는 이른바 음모론에 중국혐오를 끌어들인 것이다. 이에 질세라 극우 매체 스카이데일리는 90명의 중국인이 부정선거에 개입한 정황을 포착해 주한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가짜뉴스를 확산했다. 이 가짜뉴스는 사실 확인조차 없이 진영을 막론하고 삽시간에 유통되며 혐중 정서에 부채질을 한다.

특히, 윤석열의 파면선고 이후 극우세력들의 혐중 집회가 더욱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중국 때문에 윤석열이 파면되었다고 주장하는 그들은 4월 17일 건대 앞 차이나타운 먹자골목에서 중국 식당을 습격했다. 이들이 바로 '자유대학' 소속의 극우들이었다. 그들은 ‘북괴, 짱깨는 대한민국에서 꺼져라’라는 구호와 함께 입에 담지 못할 막말을 지껄이며 혐오집회를 주도했다. 이후 대구에서 화교학교를 다니는 어린이를 위협하던 혐오 세력들이 자리를 옮겨 다니며 중국인 거주지역 또는 중국 관광객 밀집지역 인근에서 집회를 시작했다. 이들은 명동으로 진출해서 관광객들을 위협하는 시위를 이어갔다. 이 모습을 목격한 이재명 대통령의 언급에 경찰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연대가 희망이라고 말하는 박동찬 소장.

과거엔 집회의 자유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물리적인 충돌에 대해서만 제한적인 공권력을 행사했던 경찰은 집회 이후의 행진과 확성기 사용 등의 제한 통고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상인과 상권보호가 이유였다. 그러자 이들은 대림동으로 자리를 옮겨 어린 학생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대림동의 중국혐오 집회는 7월 초에 시작되었다. "혐오의 사슬을 끊어내지 않으면 언젠가는 대림동으로 집회장소가 옮겨질 것"이라고 했던 박동찬 소장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극우라고 할 수 있는 중국혐오세력들의 대림동 집회는 9월부터 더욱 노골화되었다. 특히, 대림동은 5만에 가까운 중국계 이주민과 그 자녀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는 밀집지역이다. 그곳에서 혐오 발언은 물론이고 어린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집회를 시작하자 지역 학교장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교육청과 구청 그리고 관련 공공기관 등에 편지를 보내며 지역사회의 우려를 전했다. 이에 김민석 총리와 정근식 서울시 교육감이 우려의 메시지를 냈고 이는 나비효과처럼 퍼지면서 전국교장포럼이 규탄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당사자와 지역주민이 연대하기 시작했고 시민사회가 반응하면서 이주민 사회와 선주민들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된 것이다. 그렇게 9월 25일의 혐오반대 기자회견이 지역사회와 시민단체 회원 등 2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이루어졌다.

정부와 국회의 근본적인 대책이 절실한 상황이다. 명동은 상권침해라는 이유로, 대림동은 교육권 침해라는 이유로 집회를 제한한다면, 상권 침해와 교육권 침해가 없는 곳은 혐오집회를 열어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림동을 혐오사슬의 무덤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박 소장의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는 중이다.

한국민족의 DNA를 지니고 태어났지만 중국에서 박 소장은 소수민족일 뿐이었다. 다수민족과 주류민족으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99%의 한족에 비해 매우 차별적 위치에 처해 있는 중국동포로서 소수민족은 단어가 주는 마이너리티의 느낌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로서의 운명이 태어나는 순간 이미 정해진다고 볼 수 있다. 직장 내에서의 승진이나 고위공직자의 삶 등에서 매우 제한적인 인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에 바로 한국 유학을 결심했죠. 제가 평소에 흠모하던 윤동주 시인이 살았던 디아스포라의 삶도 한국행의 이유가 되기도 했고요."

윤동주의 문학세계를 흠모해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만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 윤동주를 "동아시아를 유영한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표현했다. 머조리티의 삶을 살 줄만 알았던 한국에서 그의 삶은 입국하는 순간부터 혐오와 차별이라는 문제에 부딪혔다. 한국 내에서의 차별은 더 심각하고 이해불가한 상황이 많았다. 단순한 차별이 아닌 편견과 혐오가 일상을 지배하는 세상과 마주한 것이다.

 

세미나에 참석하여 발언중인 박동찬 소장(사진 중앙).

정치적 목적의 선전선동이 가미된 혐중 정서는 과거 북한을 혐오한 반북정서와 반공정서가 그 연원이었다. 하지만 냉전시절의 반공 반북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자 극우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권이 진영결집을 위해 중국을 적으로 두고 혐중 구호를 확산시키는 격이 됐다. 일반인들에게도 처음부터 맥락 없는 혐오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왜곡된 정보가 주입되면서 오해가 시작된다. 그런 오해들이 쌓이면 편견으로 발전하고 겹겹이 쌓여진 편견들은 혐오에 이르게 된다. 차고 넘치는 혐오가 과포장을 거쳐 확산되면 집회의 성격으로 발전하면서 점차 혐오의 테러가 시작되는 것이다. 혐오라는 이름의 물리적 폭력은 이렇게 토렴되며 이는 혐오의 피라미드가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과거 유대인이나 장애인들이 이러한 혐오의 사슬에 묶여 집단 학살 같은 방식을 통해 이슬처럼 사라져 갔다. 이러한 일들이 과거에만 존재하는 역사 속 장면이라고 단정지어서는 곤란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혐오는 끊임없이 유통되고 있기 때문이다.

박동찬 소장은 한때 일본 극우들이 진행한 혐한 시위를 예를 들며 현재 제도권의 소극적 대응에 대해 질타하기도 했다. 일본 내 혐한 시위가 기승을 부리자 교포사회는 물론 일본 내 민간인들이 연대하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오사카, 도쿄, 가나가와 등지의 지자체가 앞장서서 혐한시위를 금지하는 혐오표현금지법안을 통과시킨 사례가 있는데, 이는 정치권이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였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포괄적차별금지법이 좌절되면서 정치인들은 사회적 합의라는 단어 뒤에 숨어버렸고 결국은 그 어떤 차별과 혐오도 단죄하지 못하는 현실이 계속되고 있다. 결국, 일본에서는 자취를 감춘 혐한 시위를 모방하여 오늘날 이 땅에서 혐중 시위로 발전한 것이다.

심지어 나경원 등 국힘당의 중진 정치인들은 국가정보자원관리원의 화재를 중국인 무비자입국 도입과 연결 지어 혐중을 이어가고 있다. 중국이 개입된 부정선거 증거를 삭제하기위해 이재명 정부가 일부러 화재사건을 일으켰으며, 이후 중국인들이 무제한적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얼토당토 않는 주장을 계속하는 상황이다. 갯벌에서 구조 중 운명을 달리한 이재석 경사의 사건에 애도를 표현한 이재명 대통령을 향해서는 ‘중국출신 대통령’이라는 비아냥이 계속되기도 했다.

이러한 편견과 차별과 혐오를 차단하고 이주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박동찬 소장은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 중이다. 이민정책을 비롯한 이주노동자 중대재해 매뉴얼 작성 등 연구사업과 각종 강의를 통한 이주민의 이해를 돕는 교육사업도 진행한다. 대림동 걷기 등의 확산사업을 하기도 하며 이주노동자의 인권에 대한 연대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에 임하고 있는 박동찬 소장과 참석자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오히려 정부가 앞장서서 차별정책을 추진하는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주노동자는 자동차세, 주민세, 종합소득세 등 내국인이 내야 할 각종 세금은 예외 없이 납부하지만 ‘민생소비쿠폰’도 지급받지 못하는 현실 등 각종 복지에는 여러 가지 차별적 요인이 너무 많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나에 대한 차별이 나쁜 것이라면, 세상의 모든 차별은 나쁘다”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선주민과 이주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이 절실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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