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아픔 외면하면 '보이콧' 당한다…찰스 보이콧처럼

흉년에도 냉혹하게 소작료 징수한 농장 관리인

농민들 비폭력 '왕따' 대응에 결국 손들고 도망

결국 자신의 성을 창피한 세계 공용어로 남겨

구치소 갇혀도 반성없는 '윤건희' 깊이 새기길

2025-09-08     김성수 시민기자

역사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어떤 이는 평생 선행을 쌓고도 후세에 잊혀지지만, 어떤 이는 단 한 번의 악행으로 영원히 기억된다. 찰스 커닝햄 보이콧(Charles Cunningham Boycott, 1832~1897)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찰스 커닝햄 보이콧의 캐리커처. (위키피디아)

아일랜드로 건너간 영국 신사

보이콧은 영국 본토에서 태어나 군대 생활을 마친 후 1850년대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지나 다름없었고, 땅은 대부분 영국 귀족들의 소유였다. 보이콧은 메이요 주에 있는 언 백작(Earl of Erne, 1815~1914) 소유의 농장 관리인이 되었다.

그는 전형적인 영국 신사였다. 콧수염을 기르고, 말을 타고, 사냥을 즐기며, 무엇보다 아일랜드 농민들을 '열등한 존재'로 여겼다. 마치 자신이 문명을 전파하러 온 선교사라도 되는 양.

 

영국 노퍽의 버그 세인트 피터에 있는 세인트 메리 교회는 찰스 보이콧이 묻힌 곳으로, 그의 아버지 윌리엄 보이콧이 신부로 있었다. (위키피디아)

감자 흉작과 농민들의 절망

1879년 또다시 감자 흉작이 찾아왔다. 아일랜드 대기근(1845~1852) 때만큼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농민들에게는 생존의 위기였다. 소작료를 낼 여력이 없는 농민들이 속출했다.

보이콧은 냉혹했다. "계약은 계약이다. 돈을 못 내면 쫓겨나는 게 당연하다." 마치 은행 대출 담당자처럼 차갑게 굴었다. 그는 소작료 인하 요구를 단칼에 거절하고, 체납 농가들을 무자비하게 내쫓기 시작했다.

 

아킬 섬에 있는 찰스 보이콧의 옛 집. 보이콧 시대 이후 현대화 및 보수 공사를 거쳤다. (위키피디아)

찰스 스튜어트 파넬의 등장

이때 등장한 인물이 찰스 스튜어트 파넬(Charles Stewart Parnell, 1846~1891)이다.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거물로, 영국 의회에서도 활동했던 정치인이다. 그는 아일랜드 토지동맹을 이끌며 농민들의 권익보호에 나섰다.

파넬의 전략은 기가 막혔다. "폭력은 안 된다. 대신 그들을 완전히 무시하자. 마치 그들이 투명인간인 것처럼." 오늘날로 치면 '관종'을 무시하는 방법과 똑같았다.

 

찰스 스튜어트 파넬. (위키피디아)

1880년 9월, 역사적 굴욕의 시작

운명의 1880년 9월이 왔다. 보이콧은 여전히 강경 노선을 고수했다. 소작료 인하? 절대 안 된다. 체납? 무조건 퇴거다. 그의 고집은 영국 관료 특유의 '원칙주의'였다.

그러자 파넬과 토지동맹이 움직였다. 지역 농민들에게 지시가 내려졌다. "보이콧과 일절 관계를 끊어라. 말도 걸지 말고, 물건도 팔지 말고, 일도 해주지 말아라."

 

1889년 3월 16일 '퀸즐랜드 피가로 앤 펀치(The Queensland Figaro and Punch)' 표지에는 아일랜드계 호주인들이 파넬의 자치권 투쟁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위키피디아)

보이콧의 처참한 일상

그 결과는 처참했다. 하루아침에 보이콧은 완전 왕따가 되었다. 우편배달부들은 그에게 편지를 배달하지 않았다. 상점 주인들은 그에게 물건을 팔지 않았다. 보이콧의 정원사도, 하인도, 요리사도 모두 그만 두었다. 심지어 이발사까지 그의 머리 깎기를 거부했다.

보이콧 부인은 직접 장을 보러 가야 했지만, 아무도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보이콧 부부가 직접 빨래를 하고, 요리를 하고, 마구간을 치우는 신세가 되었다. 마치 현대판 '무인도 생존기'였다. 돈을 아무리 줘도 보이콧을 위해 일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영국 군대가 보이콧의 농작물을 구하기 위해 자원병을 호위하고 있다. (The Irish Story)

언론의 관심과 영국 정부의 개입

영국 언론들이 이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아일랜드 폭도들이 선량한 영국 신사를 괴롭힌다'는 식으로 보도했지만, 사실은 완전히 달랐다. 폭력은 전혀 없었다. 그저 '없는 사람 취급'을 했을 뿐이다.

영국 정부는 당황했다. 직접 군대를 보내자니 과잉 대응이고, 그냥 놔두자니 체면이 서지 않았다. 결국 얼스터(Ulster) 지방에서 자원병 50명을 모집해 보이콧의 농장 수확을 도왔다.

이 작전의 비용이 무려 1만 파운드였다. 당시 수확물 가치는 350파운드에 불과했다. 영국 정부가 1만 파운드를 들여 350파운드어치 감자를 캔 셈이었다. 효율성으로 따지면 최악의 사업이었다.

 

보이콧과 부인이 작물을 직접 수확하고 있다. (영국군의 호위와 함께). (The Irish Story)

보이콧의 굴복과 도피

결국 보이콧은 항복했다. 1880년 12월 그는 짐을 싸서 영국 본토로 도망쳤다. 떠나면서도 마치 윤석열과 김건희처럼 "나는 전혀 잘못한 게 없다"며 우겼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의 이름 '보이콧(Boycott)'은 이미 영어 단어가 되어 있었다. 'to boycott'는 '집단 거부하다', '왕따시키다'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프랑스어로는 '보이코타주(boycottage)', 독일어로는 '보이콧(Boykott)'이 되었다.

 

영화포스터, '캡틴 보이콧' (The Irish Story)

아이러니한 유산

보이콧은 1897년 영국 본토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것은 농장 관리기법도, 탁월한 경영철학도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성씨가 '집단거부'를 뜻하는 세계 공용어가 된 것뿐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보이콧'이라는 말을 쓴다. 불매운동을 할 때, 집단 따돌림을 당할 때, 외교적 단절을 표현할 때도 쓴다. 찰스 보이콧은 꿈에도 모를 일이다.

 

영국 자원병들이 영국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보이콧의 농작물을 수확하는 그림.(The Irish Story)

현대적 교훈

보이콧 사건은 여러 교훈을 준다. 첫째, 권력은 결국 민중의 협조 없이는 무의미하다. 아무리 법적 권한이 있어도, 사람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윤석열의 지난 해 12.3 비상계엄이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다.

둘째, 비폭력 저항의 힘이다. 파넬과 아일랜드 농민들은 폭력없이도 영국 지주를 굴복시켰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가 나중에 사용한 '시민불복종' 전술의 원형이다.

셋째, 언어의 힘이다. 한 개인의 이름이 보편적 개념이 되어 영원히 기억되다니, 이보다 강력한 복수가 또 있을까?

 

보이콧. (The Irish Story)

역사의 교훈

찰스 보이콧은 아마도 자신이 역사에 이런 식으로 기록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는 단지 '원칙을 지키는 성실한 관리인'이라고 생각했을 테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오만한 식민지 관료'로 기록했다.

오늘도 세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보이콧하자!"고 외친다. 그때마다 찰스 보이콧의 영혼이 화들짝 놀라지 않을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 난리냐"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진짜 잘못은 농민들의 절망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윤석열과 김건희처럼, 상대방의 처지를 한 번도 이해해 보려 하지 않은 일이다. 그 결과 그의 이름은 '거부당하는 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런 것이다.

윤석열과 김건희가 지금 교도소 안에서 머리숙여 반성하면서 이 역사의 교훈을 마음 깊이 새겨봤으면 좋겠다.

영화 '보이콧'의 한 장면.(The Irish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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