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법 폐지]⑪ 안보 명목으로 국민 괴롭혀 온 잔혹사
이재명 정부하에서도 연발하는 국보법 사건들
지난 7월 29일, 30일 푹푹 찌는 무더위에 헉헉거리고 있을 때였다. 잇따라 들려온 소식이 그렇잖아도 치솟은 불쾌지수를 한껏 끌어올렸다
인터넷 매체 ‘사람일보’ 압수수색
박해전 사람일보 대표는 30일 미디어오늘에 “28일 오후 누군가 사람일보 사무실 문을 두드려 나가보니 경찰 20여 명이 있었다. 압수수색 영장을 제시하더라”라고 했다. 그는 “신체 수색도 영장에 적혀 있어 수중에 있던 휴대전화를 빼앗겼다”며 “‘용납하지 못하니 사무실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하고, 나 자신은 편집실 문을 닫고 자리를 떴다. 이후 경찰이 들어가 압수수색한 것 같다. 휴대전화는 지금까지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박 대표에 국보법 7조(찬양·고무 등)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영장엔 사람일보 사이트에 게재한 정치평론 글과 보도 기사가 이적표현물로 규정됐다. 박 대표는 해당 기사들에 대해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을 인용한 보도도 범죄사실에 포함됐다. 공영방송 한국방송공사(KBS)와 문화방송(MBC) 텔레비전, 연합뉴스와 일간 신문, 인터넷 언론사가 함께 보도한 내용이었다”고 했다.
영장엔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을 “북한의 선전·선동”이라 규정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사람일보의 2019년 3월 <우리 민족 자주통일 평화번영의 길로> 기사를 두고 “대한민국 정부를 미제 식민과 분단의 역사로 규정하며 정통성을 부정”했다며 “연방제 통일, 국가보안법 폐지에 동조하는 등 북한의 대남 선전 선동 및 주의 주장에 동조하는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영장은 이를 비롯한 사람일보 보도가 반국가단체 존재와 활동을 선전·동조하거나 이적표현물이라고 규정했다.(출처 : 미디어오늘)
권말선 시인 자택 앞에서 체포
인천경찰청이 29일 오전 8시께 권말선 시인을 자택 앞에서 체포했다. 경찰은 2024년 9월 권 시인이 쓴 여러 시를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규정하며 권 시인 자택을 압수수색 한 바 있다. 이후 경찰이 출석을 요구했으나 권 시인은 진술거부권 행사의 뜻을 밝히며 쓸모없고 소모적인 피의자 신문을 하지 말 것을 요구하자 이날 체포한 것이다.
경찰이 이적표현물로 지목한 시는 「한미, 동맹은 없다」, 「국가보안법, 네가 없는 아침」 등 20편이다. 권 시인은 촛불풍물단으로도 활동하며 매주 촛불대행진에 참석해 왔다. (출처 : 자주시보)
사람일보의 보도 기사는 1995년 8월 15일 한국기자협회,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등 언론현업 3단체가 공동으로 제정한 [평화통일과 남북 화해협력을 위한 보도·제작준칙], 그리고 2000년 6·15공동선언에 비춰 볼 때 하등 문제될 게 없다. 더욱이 사람일보에서 내보낸 기사는 남쪽 주류 언론매체에서도 보도한 것들이었다.
권말선 시인이 쓴 시도 그렇다. 한미동맹과 국가보안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그것이 북쪽 주장에 동조하는 것인가. 시인의 문학 활동이 법이 개입할 문제인가. 「한미, 동맹은 ‘있다’」고 하고 「국가보안법, 네가 ‘있는’ 아침」으로 쓰면 문제가 없다는 건지 헛웃음이 나온다.
이 두 건에 앞서 7월 초에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인터넷 매체 자주시보 기자들을 연행해갔다. 같은 달 23일에는 하연호 전북 민중행동 대표가 국가보안법 위반(북한 공작원과의 회합 및 연락 등) 혐의로 징역 2년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1심에서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었는데, 항소심 재판부가 1심보다 더 중형을 선고하고 즉각 구속해버렸다.
이재명 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7월 한 달 사이에 잇따랐던 일들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북(北)과 평화공존을 대북정책 기조로 표방한 이 정권에게 ‘국가보안법 세력’이 ‘나 아직 살아 있다’며 몸부림치는 것 같다.
국가보안법 걸어 ‘사법 살인’까지
국가보안법 제1조(목적) ①항은 “이 법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한다”이다.
일부에서 국가의 안전 확보 목적이 달성됐다고 강변할 수 있겠다. 하지만 국민의 생존 및 자유 확보는 전혀 아니다. 무고한 국민을 재판을 해서 죽이고, 사상·양심·표현·언론의 자유를 확보하기는커녕 억압하고 통제하고 빼앗아갔다.
진보당 당수 조봉암은 1959년 국가보안법 위반과 간첩 혐의 등으로 사형당했다. 52년 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심 재판부는 진보당이 국가변란 목적의 단체라고 볼 수 없으며, 조봉암의 간첩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시했다. 조봉암 사건은 당시 이승만 정부의 정치적 탄압 목적에 의한 '사법 살인'이었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북한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사형당했다. 47년 뒤인 2008년 1월 1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는 재심에서 조용수 사장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민족일보가 사회단체에 해당하지 않고, 조용수 사장이 정당 또는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가 아니므로 공소사실 자체가 인정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당시 민족일보가 보도한 기사들이 북한을 찬양했다고 볼 수 없으며, 신문사 대표이사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밝혔다. 당시 조 사장에게 적용된 혐의는 ‘북한에 동조하는 행위(특수범죄처벌법 위반)’이었다. 법 명칭은 달랐지만 사실상 국가보안법이었다.
인혁당 사건은 1차 인혁당 사건과 2차 인혁당 사건(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있다. 재심에서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 박정희 정권이 인민혁명당이라는 반정부 조직을 조작하여 혁신계 인사들을 구속·기소한 사건이다. 1차 인혁당 사건에서 적용된 혐의는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내란 예비 및 음모,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등이다. 당시는 증거 불충분에도 억지 기소가 이루어졌고, 피해자들은 불법 감금과 고문을 당했다. 2011년 피해자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했고, 2013년 서울고법이 무죄를 선고했으며 2015년 대법원이 이를 확정했다.
2차 인혁당 사건 혹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1974년 인혁당 재건을 위한 조직이 북한 지령을 받아 국가 전복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20여 명이 재판에 넘겨져 일부는 사형을 당했다. 2007~2008년 재심에서 증거 조작과 고문 등이 인정되며 이들도 무죄 판결을 받았고, 법원은 당시 수사 및 재판이 불법적이었다고 판단했다. 2차 인혁당 사건(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에 적용된 주요 혐의는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 및 음모, 내란 선동, 반공법 위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등이었다.
인혁당 사건에서 '사법살인'은 2차 인혁당 사건(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때 발생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8명이 채 하루도 안 된 9일 새벽에 사형이 집행되었고, 이 극단적이고 급작스러운 사형 집행 때문에 국제법학자협회 등에서 이를 '사법살인' 혹은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오경무 사건’도 있다. 1960년대 북한 간첩 혐의로 사형된 오경무 씨는 2023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2025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재심 재판부는 자백조서가 가혹행위로 불법 수집된 증거라고 봤고, 간첩 의도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국가보안법으로 사법 살인을 저지른 사례는 위에서 밝힌 것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는 않다. 재심 재판부는 ‘죽여서 미안하다. 선배들의 잘못을 대신해 사과한다’고 했다. 무고한 사람 죽여 놓고 나서 미안하다고 하면 되는 것인가…. 기가 막힌다. 살인까지 저지르는 판에 죽을 정도로 고문한 사례는 얼마나 많을 것인가. 가늠도 못하겠다.
국가보안법을 잘못 적용했으면 잘못 적용한 판사, 검사, 경찰관에게 책임을 물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 누구에게 책임을 물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당사자들이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자국민을 사법 살인하도록 만든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건재해 있다. 억장이 막힌다.
언론 옥죄는 국가보안법…‘특수자료취급지침’ 새끼 쳐
분단 국가 언론인의 시대적 소명은 통일을 위한 언론 활동을 펼치는 것이다. 북(北)을 취재 보도함으로써 북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고, 상호 이해를 통해 화해하고 신뢰도를 높이며, 궁극적으로 평화통일을 이루도록 하는 게 언론인의 사명일 터이다.
그러나 통일언론 활동은 대단히 어렵다. 국가보안법에서 새끼쳐 나온 ‘특수자료취급지침’이 통일언론 활동의 첫 단계라 할 대북(對北) 간접취재부터 통제하고 억압하는 정교한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특수자료취급지침’은 1970년에 제정됐으며, 주로 국가정보원이 관리하는 지침이다. 국가보안법상 제한 대상인 ‘특수자료’를 취급·관리하는 방법과 절차를 규정한 문서다. 특수자료는 간행물, 녹음테이프, 영상물, 전자출판물 등 모든 대중전달 매개체 중 북한 또는 반국가단체에서 제작·발행한 정치적·이념적 자료, 이념 찬양·선전 자료, 대한민국 정통성 부인·자유민주주의 체제 부정 자료 등을 포함한다.
특수자료를 취급하려면 해당 기관장은 감독부처 장에게 인가를 신청하며, 감독부처는 국가정보원장과 협의하여 인가 여부를 결정한다. 취급기관은 특수자료 보관실을 제한구역으로 설정하고 보안책임자를 임명해야 하며, 자료 대출이나 열람 시 신청자의 신분과 목적을 확인해야 한다. 일반인의 접근은 엄격히 제한되며, 인가 받은 기관 및 자격을 갖춘 자만 지정된 장소에서 열람하거나 일정 기간 내 대출이 가능하다. 특수자료취급지침 위반 시 경고, 시정명령, 인가취소 등의 행정제재가 가해질 수 있다. 국가보안법에 근거하여 반국가단체인 북한 체제를 찬양·고무하는 자료에 대한 통제를 목적으로 한다.
이 지침은 제정 후 여러 차례 개정되었으며, 북한 관련 자료의 공개와 활용을 규제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 특수자료취급지침은 국가정보원이 특수자료취급기관 인가·해제 권한을 가지며, 자료 관리 및 보안 조치를 총괄한다.
이 지침에 따라 남쪽 언론사는 북쪽 언론매체의 보도를 자유롭게 인용 보도할 수 없다. 북쪽 조선중앙통신, 로동신문, 중앙TV 등이 보도하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인용 보도가 가능한데 남쪽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북측 언론매체 인용보도를 위해서는 지침에서 정한 대로 절차를 밟아야 한다. 우선, 특수자료취급기관으로 인가받아야 한다. 통일부, 문체부, 국정원이 인가 여부를 결정한다. 인가를 받은 특수자료 취급기관장(언론사의 경우 회사 대표)이 보도 담당 기자에게 특수자료취급 인가증을 발급하고, 인가증을 발급받은 기자가 북 관련 기사를 쓸 수 있다. 특수자료를 일반자료로 전환 분류하는 권한은 특수자료취급기관장, 즉 언론사 사장이 갖고 있다(실제로는 기자가 알아서 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기사 제작 현장에서 이 원칙이 엄격히 지켜지지는 않고 있다. 그렇지만 북측 매체가 보도한 것을 남쪽 매체에서 자유롭게 보도할 수 없는 것만은 분명하다. 북 매체가 보도를 했다는 것은 북이 외부 세계에 그 기사를 뿌린 것이고, 외부에서는 다들 아는 공개정보(open source)가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그 기사가 일반자료로 분류되지 않으면 한국에서는 비공개된다. 즉 세상 모두가 아는 일을 한국민만 모르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언론사에서 로동신문을 구독할 수 없고 조선중앙TV를 시청할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실제로 북쪽 매체를 구독 또는 시청하지 않는, 또는 못하는 언론사가 상당히 많다. 이럴 경우에는 연합뉴스의 보도를 활용할 수 있다. 연합뉴스는 1999년 내외통신을 합병한 데 이어 2002년에는 조선중앙통신과 뉴스교류계약을 체결, 북쪽 매체의 보도를 계약사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대북 직접취재는 북 현지 취재를 말한다. 기자가 북쪽 현장에 가서 직접 확인하고 취재하는 것은 대북 취재보도의 기본 중 기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게 대단히 어렵다. 자칫하다간 국가보안법상 잠입 탈출, 회합 통신 등의 무시무시한 혐의를 뒤집어 쓸 수 있다. 국가보안법상 북은 반국가단체이며 국방백서에서는 주적으로 규정되곤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전에 정부 당국의 승인을 받아 취재를 한다는 건 언론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지만 ‘반국가단체’ 인사를 접촉하거나 반국가단체 점령 지역을 방문하는 등의 취재 활동은 사실상 정부 당국의 허가가 있어야 가능하고 뒤탈도 없다.
지난 1989년 한겨레신문은 창간 1주년을 맞아 리영희 논설고문(편집국장급)을 비롯한 취재단의 북 현지 취재를 추진했다가 좌절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정부 당국은 리영희 논설고문을 비롯한 한겨레 관계자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거나 조사하였으며, 안기부는 신문사 압수수색까지 벌였다.
당시 정부는 미국 시민권자를 보낸 외신사의 방북 취재는 문제 삼지 않은 반면, 국내 기자가 참여한 한겨레의 방북 시도는 엄정히 제재하는 이중잣대를 보였다.
언론은 입법 행정 사법부와 동등한 제4부로서의 독립적 위상을 갖는다. 적이든, 아군이든 누구든 만나고 어디든지 가서 취재하고 보도한다. 하지만, 한겨레 사례는 언론의 취재활동도 국가보안법의 흉포한 칼날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걸 보여줬다.
한겨레의 방북 취재는 좌절됐지만,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1990년대 말 일부 언론사의 방북이 이뤄졌다. 이어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 이후에는 남측 언론사 사장단이 방북하고, 6·15민족공동위 아래 남북 언론단체 간 교류가 성사됐다. 남북 언론단체 간 공식 교류가 이뤄진 것은 분단 이후 처음 있은 획기적 사건이었다.
말 그대로 간난신고 끝에 어렵사리 돌파구를 열었던 남북 언론교류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다시 예전 상태로 복귀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꼭 기록해두고 싶은 것은 북쪽이 아닌 남쪽 당국에서 최종적으로 언론교류를 끊었다는 사실이다. 이명박 정권 때 북쪽과 이메일을 이용한 기사교류 사업에 합의했으나 통일부에서는 사업 승인도 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 북측의 초청장 발송에도 불구하고 방북 승인을 거부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언론 교류를 끊은 쪽은 북쪽이라고 반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점이다. 교류 반대는 북쪽이라는 고정관념이 대단히 뿌리 깊다는 걸 새삼 느꼈다.
‘언론은 제4부이다’라는 말의 핵심은 언론의 독립성 보장이다. 국가보안법을 근거로 언론의 독립성 보장은커녕 무시하고 해치기까지 하는 행위는 언론의 독립, 언론 자유를 중요 가치로 여기는 자유민주사회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국가보안법이 그어놓은 선 안에서만 언론 활동을 펼칠 것을 강요하고, 그 선을 벗어나면 가차 없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심지어는 사법살인까지 저지르는 걸 지켜보고 있노라면 과연 우리가 21세기 문명시대에 살고 있는지 자탄이 절로 나온다.
국가보안법은 인권탄압법…존재 이유가 없다
국가보안법은 그 명칭대로라면 국가를 보호하고 국가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한 법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국민의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유린하고 심지어는 사법살인의 근거로 기능해 온 악법 중의 악법이다. 오죽하면 유엔, 미국에서도 우려를 표명하며 개정을 권고했겠는가.
국가보안법이 ‘국가를 보안했는가’에 대해 새삼 따져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이런 의문은 든다. 어떤 법을 제정해서 국가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만드는 게 과연 가능할까.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국가보안법 하나만 만들 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법을 더 만들면 될 것이다.
국가는 국민들이 자신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자발적으로 형성한 거대 공동체이다. 국가가 국민들의 행복을 증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인권을 탄압하고, 국민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면 국가로서 존립 이유가 없어진다. 법이 아니라 국민의 자발적인 애국심이 국가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혹자는 국가보안법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며, 법 운용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을 한 번만 들여다 보면, 이게 과연 法(법)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法을 파자하면 ‘물이 흘러가는’ 모양, 즉 순리(順理)를 뜻한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에서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는 ‘반국가단체’는 억지와 주관, 편향으로 가득찬 국가보안법적 용어이다. 반국가단체가 무엇인지 국가보안법 제2조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데다 애시당초 순(順)과는 어울릴 수 없는 반(反)이라는 말이 부자연스러움을 더한다.
게다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라는, 법적 용어라고 하기에는 곤란한 주관적, 감정적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정을 알면서’라고 판단하는 주체는 검사, 판사일 텐데, 검판사는 무엇을 근거로 ‘안다’고 판단하는가, 과연 그 판단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국가보안법 사건 재심에서 무죄로 판결된 사례가 한두 건이 아니기에 하는 말이다.
국가보안법은 대한민국 정부 출범 100여 일 쯤 후에 ‘임시특별법’으로 제정됐다. 여순사건에 혼뜨검이 난 일부 반공 맹신자들이 주도해 임시로 만든 법이다. 이것이 좌익 경력으로 죽다 살아난 박정희 쿠데타 일당이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는다’고 밝힘으로써 ‘반공’이 ‘국시’가 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어떤 주의에 대한 반대가 국시의 제1의’라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며, 국격(國格)에 어울리기나 한 것인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거의 동시에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지금까지 80년간 한국인들을 ‘반공 반북, 종미 종일’(反共反北, 從美從日)로 세뇌시켰다. 반공, 종미종일은 반북(反北) 한뿌리에서 뻗어나온 것이므로, 국가보안법과 함께 한 한국 현대사는 ‘반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은 경제력 10위권에 속한 경제 대국이자 군사력 6위의 군사 강국이다. 그런가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이자 출산율 꼴찌 국가이다.
한국인들의 행복도 지수는 여러 국제 조사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 2024년 기준으로 30개국 중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행복감을 보였다. 예를 들어, 2024년 Ipsos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 중 '전반적으로 행복하다’고 답한 비율은 48%로, 이는 2011년 71%에서 크게 하락한 수치이다.
또한, 2018년 유엔 세계행복지수에서 한국은 156개국 중 57위를 기록했으며, 평균 점수는 5.88점으로 최상위권 국가인 핀란드(7.63점), 노르웨이(7.59점), 덴마크(7.56점)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국제사회의 평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돈은 있지만 행복하지는 않은 한국인”이다. 왜 이런 평가가 나오게 됐는지는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겠지만, 국가보안법이 지배해 온 한국 현대사의 산물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 형제를 멸살시켜야 할 적으로 삼고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그 무슨 ‘마음 편한 세상’을 누릴 수 있을까. 게다가 국가보안법의 불고지죄 조항은 우리가 한 형제 동포가 아니라 서로 감시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군사력을 갖춰 놓고도 다른 나라에 군사주권을, 작전통제권을 떠넘기는 이상한 나라이다. 그걸로도 모자라 해마다 1조 수천억 원씩 ‘방위비 분담금’을 갖다 바친다. 광화문 앞에 들어앉은 미국 대사관 건물은 한국 정부에 임대료를 지불해야 하는데도 미국 쪽에서는 모르쇠로 버티고 있다. 응당 받아야 할 돈까지 떼이는데도 한국 정부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처럼 천민 자본주의가 판 치는 사회도 없을 것이다. 자유시장경제 논리를 앞세워 사회 구성원 간 무한 경쟁을 유발하고, 능력주의가 공정한 게임 룰인 양 호도한다. 한국의 대학입시제도는 경쟁주의와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천민 자본주의의 또 다른 형태이다. 수능시험일 당일 몇 시간에 4지선다형, 5지선다형 문제를 얼마나 잘 찍었는가에 따라 앞으로의 삶이 결정된다. 시험 점수는 개인의 능력에 따른 결과물이므로 개인이 책임질 문제이지 사회적 문제가 아니다.
천민 자본주의 등의 출현은 공산주의는 물론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자본주의 폐해를 막을 대안 담론을 철저히 격리 유폐시킨 당연한 결과이다.
국가보안법이 사상과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인간의 기본권을 억압함으로써 우리의 일상생활에서까지 상상하기 어려운 폐해가 발생하고 있다. 몰상식과 불합리, 이성보다는 감정이 우선하는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한국 사회는 거대 정신병동으로 변했다는 암울한 진단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2, 3년 전에 국가보안법이 단말마적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고 낙관적으로 전망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숨통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에 이르기 전 엄습하는 고통으로 발버둥을 치는 것 같기도 하다.
한 가지 함께 고민해봤으면 하는 게 있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국가보안법이 80년 가까이 쌓은 적폐도 자동적으로 청산되는가. 국가보안법 적폐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반북(反北) 정서, 대북(對北) 적대감이다. 법을 없앤다고 해서 수십년 간 켜켜이 쌓인 감정이 단시간에 깨끗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반북 정서, 적대감을 없애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헌법 3조 영토조항은 반북 정서, 대북 적대감의 근원이다. 헌법 3조를 그대로 둔 채 국가보안법만을 폐지할 경우, 국가보안법 뿌리는 살려 둔 채 줄기 가지만 없애는 꼴이 될 것이다. 헌법 3조가 살아 있는 한 현행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더라도 제2, 제3의 국가보안법 출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개헌 논의 때 헌법 3조 영토조항 폐지를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
아울러 제4조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 하의 평화통일 조항도 개정돼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하의 통일은 남쪽 원칙으로의 흡수통일을 의미하는데, 그런 흡수통일이 평화적으로 가능할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