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가 문제"라는 미국에 박정희 "베트남 가겠다" 대응

[베트남 참전 60돌]⑮ 한미 관계의 방향 전환

아이젠하워부터 내려온 한국에 대한 좌절감

4.19를 통해 민주주의 회복을 기대했던 미국

5.16을 한국에 대한 정책 변화의 기회로 활용

1억 5000만 달러 개발 차관은 '제한된' 선물

베트남 참전 외에는 돌파구 없다고 본 박정희

2025-07-30     이길주 시민기자

 

1965월 5월 존슨은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사진 중앙)를 환대했다. 그는 19일 뉴욕시에 도착 맨해튼 남부에서 자동차 퍼레이드를 했다. 박정희가 받은 환대 이면에는 한국에 대한 원조는 줄이면서 베트남 참전을 유도한다는 미국의 전략이 있었다. (Public Domain)

'존슨 선물 1억5천만 불'

1965년 5월 17일, 18일에 있었던 박정희와 존슨의 회담 결과를 알린 한 신문의 큰 제목이다. 한데 그 다음에 오는 두 개 제목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뚫어야 할 '미 원조법''그리고 '열쇠 쥔 AID 본부'이다. AID는 미국 국제개발처(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이다. 선물 사용 열쇠를 다른 사람이 갖고 있고, 그 사람을 설득해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과연 그게 온전한 선물일까? 부모들이 어린아이에게 교육의 목적으로는 이렇게 할 수도 있다. 용돈을 주지만, 사용은 허락을 맡도록 하듯이.

다른 한 신문의 분석도 이 상황을 지적한다. 팡파르와 퍼레이드, 만찬에 가려진 박정희 방문 결실의 핵심인 1억 5000만 달러 경제 협력의 진면목을 전하는 분석 기사다. 인용 가치가 높다. 

존슨은 '당장' 그리고 '거저 출 것'이 없었다. 적어도 경제 원조의 측면에서만 보면 존슨은 박 대통령에게 당장 손에 잡을 수 있는 '현물'로 선물해 준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선물' 없는 방미로 박 대통령을 실망시킬 수도 없고 (아니 여러 정치 군사정세는) 오히려 의식적으로 고무하여야 한다. 이런 경우 사실은 통상적인 것을 선물로 '포장'하는 방법이 남아있을 뿐이다. (중략) 이러한 사실들은 통상적으로 예상되는 1억 5천만 불의 차관 약속을 박 대통령의 방미에 따르는 어떠한 선물을 만들기 위하여 집약했다는데 불과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아일보 1965년 5월 20일 3면)

이 신문은 사설에서 한국과 미국 사이에 "강화된 우호관의 배경에는 한국군의 월남 파병과 한일회담의 촉진이라는 이대지주(二大支柱)가 있다"면서 "박 대통령의 방미 성과는 그것을 크게 평하거나 작게 평가하거나 전기한 이대지주와의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평가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동아일보 1965년 5월 10일 자 2면)

종합하면 미국은 한국에 선물답지 않은 선물을 준다고 생색을 내면서, 근저당을 설정한 모습이었다. 미국의 치밀하고 조심스러운 태도에 박정희는 한국군과 미군은 하나라며 베트남 전쟁 참전 카드를 내놓았다. 주권 국가의 군 통수권자가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이 나왔다.

"박정희는 잘 훈련되고 기강 잡힌 60만 한국군은 미군의 한 부분을 형성하며, 공산주의와 싸울 준비가 되었는데, 미국의 지원에 의지한다고 말했다."
"President Park said that the Republic of Korea had 600,000 men in its armed forces. These men were well-trained and well-disciplined. He wanted President Johnson to realize that these forces really formed part of U.S. forces ready to fight against Communism. In a fight they would be with the United States; but at the same time they were dependent on U.S. assistance."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해서는 한국군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뉘앙스인데 미국으로서는 박정희를 융숭하게 대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비극으로 끝나는 정통성이 약한 베트남 전쟁에 왜 한국은 참전을 당연시했나? 미국으로부터 어떤 메시지가 박정희를 움직였나? 1965년 5월 박정희와 존슨의 거래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미 관계의 근원을 찾아가야 한다. 특히 1960년 4.19 민주혁명에서부터 시작된 미국의 대한 원조 정책의 근본적 변화를 분석해야 한다.

미국에게 한국은 어떤 존재였나? 지키고 먹여야 하는 나라였다.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은 한국이 아이젠하워의 표현대로 '아시아 대륙에 돌출된 작은 나라 (a little jut on the continent of Asia)'가 아님을 실감했다. 내전으로 지칠대로 지쳤던 중국의 공산 세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고작 1년이 지났는데 한국전쟁에 뛰어들었다. 그 정도로 전략적 가치가 있는 한반도는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패권 지역의 심장을 겨냥한 칼끝 같았다. 칼끝을 돌리면 한반도는 대륙 공산 세력의 심장을 겨눈다.

물을 필요도 없었던 미국의 한국에 대한 원조가 60년대 들어서는 더 이상 '묻지마! 정책'이 아니었다. 이승만 독재가 질문을 유발했다. 한국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이 질문의 답을 구하는데 'Love You As A Friend'란 표현이 도움이 된다. 직역하면 '친구로서 사랑한다'는 고백이다.

교제 중인 두 사람이 다음 단계로 관계를 이어가기 전에 둘의 감정이 어디까지인가 확인해야 한다. 그때 답이 '친구로서 깊이 사랑한다'라면 고민해야 한다. 서로가 손은 잡지만, 아직 손가락에 반지는 끼워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선택해야 한다. 토라져 헤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한 발을 내딛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찾아내 서로 노력해 극복할 수 있다. 특히, 도저히 헤어질 수 없는 관계라면 이 길을 택해야 한다.

1965년 5월 17, 18일 박정희는 워싱턴에서 존슨에게 물었다. 한국은 미국에 무엇인가? 미국은 사랑하지만, 결혼으로 가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했다. 무엇이 부족한가? 더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미국에 매달리고 의지하는 타성을 벗어야 관계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미국이 원하는 주체적 나라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미국은 승리의 길을 찾지 못하고 1945년 이후 20년 동안 반공, 냉전의 명분으로 베트남에 돈과 무기를 쏟아부었다. 이제는 전투 병력마저 보내야 하는 전쟁. 이 전장에서 '혈맹'이 되는 것보다 한미 간에 더 확실한 교제, 밀착 관계는 없었다. 박정희와 존슨은 친구에서 파트너가 되기로 마음을 합치고 힘을 모았다.

 

중세 시절 '혈맹(Blood Oath)'의 예식을 묘사한 벽화. 칼로 상처를 내 흐르는 피를 한데 모아 서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장면이다. 동구 유럽 출신 Bertalan Székely의 19세기 중반 작품. 미국과 한국은 베트남 비극에서 '혈맹'이 되었다. (Public Domain)

나라 사이를 규정하는 가장 명확한 관계는 혈맹이다. 같이 흘린 핏자국은 확실하다. 한국의 베트남 참전이 한미 관계의 역학을 뚜렷하게 해 주었다. 이제는 시혜-수혜의 역학이 아니라, 상호 보완 작용이 두 나라의 관계를 움직였다. 이를 위해 한국은 미국과 함께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그 희생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고 앞으로 한국과 미국은 서로를 바라보며 손뼉을 칠 것이다. 의존국이 혈맹이 되고, 다음에는 미국의 외교 군사 정책상의 모범생이 되는 과정은 1965년 5월 백악관에서 시작됐지만, 그 기원은 1960년 4.19 민주혁명이다. 그때 미국은 한국을 향해 더 이상 이대로 교제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졌기 때문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에 참석한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 극동아시아 사령관 (왼쪽)과 이승만 초대 대통령 (오른쪽). 4.19 민주혁명으로 끝난 이승만의 12년 독재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 정책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Public Domain)

한국은 냉전이란 가정의 장남이다. 냉전 시작과 함께 분단됐다. 독일도 전후 동서로 갈렸지만, 1950년 6월 한국이 독일보다 더 냉전의 총아로 올라섰다. 독일은 수백만이 죽는 뜨거운 전쟁을 하지 않았다. 냉전의 가부장인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 많이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종전이 아니라 휴전으로 총성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1953년 7월 26일 미국인들에게 휴전 합의를 알리는 방송을 하면서 아이젠하워가 한 말이 있다. "미국은 단 하나의 전장에서 휴전을 쟁취했을 뿐, 세계 평화를 이룬 것은 아니다. 지금 경계를 늦추거나 우리의 노력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we have won an armistice on a single battleground--not peace in the world. We may not now relax our guard nor cease our quest)." 그의 말대로 한국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오래 전 시골에서 하듯 땅 팔고, 소 팔아 장자 한국을 뒷바라지했다. 물론 그가 성공해 동생들을 건사하고, 집안의 명예를 지킬 것을 기대했다. 한국이 식민지 역사를 뒤로하고, 전쟁의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나, 아시아에서 미국의 나라 만들기 노력의 성공 사례로 빛을 발하는 트로피가 되길 바랐다. 그 트로피를 다른 나라에 보이면서 한국을 모델로 제시하고, "이래서 미국 말을 따라야 해" 하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

하지만 그 꿈의 실현 가능성이 자꾸 줄어 들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하 존칭 생략) 때문이다. 이승만이 미국의 허리춤을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안보 위기의식을 극대화했고, 아시아에서 냉전의 판을 키우려 했다. 승공 통일을 위해 군대를 더 늘려야 한다는 이승만의 주장은 미국을 긴장케 했다. "감군을 제안한 미국에 통일이 될 때까지 감군은 없다.(no force reductions were possible until unification was achieved.)" 이승만의 답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북한을 공격한다는 꿈을 키웠다(nurtured dreams of attack against the North)"고 했다. 미국은 원치 않았지만, 한국전쟁을 통해 철저히 학습했다. 냉전과 관련해서 한반도에서 최선은 현상 유지였다. 휴전선 철책을 부수거나 넘어가는 순간 한반도의 분쟁은 국제전이 된다는 것을 체험했다. 

1958년 9월 응오딘지엠이 한국을 다녀갔고, 이승만은 답방 형식으로 11월 사이공을 방문했다. 그는 귀국해서 "나의 자유 베트남 방문이 양국 상호 친선에 끝나지 말고 우리 양국의 중대한 당면 업적 달성과 나아가서는 자유 아세아의 창건과 융성한 번영을 가져오기를 바라며 모든 세계 자유우방은 이것을 진심으로 지지 협력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남베트남과 남한을 한데 묶어 국제 사회의 도움을 요구한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늘 중국을 의식했다. 이승만의 행보가 미국의 대중(對中) 전선 형성으로 보일 것을 우려했다. 냉전의 판이 커져야 한국의 중요성이 올라간다는 전략 사고를 이승만은 갖고 있었고, 미국에는 부담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경제 정책은 미궁 속에서 헤맸다. 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했다. 한 이승만 시대 연구자에 따르면 그의 경제 정책은 '3불(不)1감(減)'으로 정리할 수 있다. 현실성, 의지, 능력이 없는 3불, 그리고 미국의 지원이 줄어드는 1감.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았다. 미국이 협조할 리 없었다.

 

4.19 민주 혁명 이후 철거되는 이승만 동상. 미국은 4.19를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시작점이 되길 바랐다. (나무위키)

권력과 통치의 무력감을 이승만은 독재로 극복하려 했다.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위기 돌파 모델이다. 바이마르 독일의 무력감을 히틀러는 3반으로 극복했다. 반자유주의, 반공, 반유대. 이를 실현하는 도구가 철저한 일인 독재 체제였다. 

1960년 3.15 선거(제4대 대통령 선거와 제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아이젠하워 정부는 자유당의 독재가 자폭의 수준으로 치닫고 있음을 우려했다. 결론은 넷이다.

(1) 민주주의의 후퇴 (2) 국제적 위치의 추락 (3) 의회가 한국 지원 의지 감소 (4) 미국과의 관계 악화 등이었다.
"(1) a serious setback to the operation of democratic institutions and processes in the ROK...(2) a further deterioration in the international standing of the ROK...(3) a decrease in the support afforded the ROK by the Congress...(4) a compounding of the Department’s problems in dealing with the Rhee Government..."

약 한 달 후 미국의 원조로 지탱하던 독재 정권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4.19 민주 혁명으로 무너졌다. 미국의 가장 두려워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란 구호가 터져 나왔다. 4.19 민주혁명은 미국에 경종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던 답을 새롭게 떠올리게 한 충격이었다. 한국의 체질 개선은 미국의 원조 정책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돼야 했다. 

 

1960년 6월 20일 방한한 아이젠하워를 환영하기 위해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서울의 거리를 메웠다. 국보 1호 숭례문 지붕에까지 올라간 환영인파. 백악관 측은 한국 국민의 환영 열기가 상상을 초월했다며 감탄했다. ‘환영은 질서 있게’란 구호도 나왔다. (국사편찬위원회)

1960년 6월. 4.19 민주혁명 2개월 후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을 찾은 첫 미국 대통령은 측근들의 표현으로 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1952년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당선인으로 한국을 찾았었다.) 100만 명 이상이 그를 환영하기 위해 길가로 쏟아져 나왔으니 '지축 흔든 웰컴'이란 기사 제목이 과장은 아니다. 환영객들이 너무 몰려들어 나중에 아이젠하워의 승용차에 여러 부분이 파손되었다. 양쪽 미러는 사람들과 부딪쳐 거의 부서졌다고 백악관 공보 비서가 전할 정도였다. '환영은 질서 있게'란 구호가 등장할 만했다. 시인 조병화는 아이젠하워 방한을 기념해 시를 발표했다. "당신은 생존의 경계선을 찾아준 세기의 날개 -- 코리아의 사랑이옵니다." 라고. 

 

1960년 6월 20일 국회의사당 (서울 중구 태평로 현 서울시의회 자리)에서 연설하는 아이젠하워. 그는 4.19 민주 혁명을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새로운 시작점으로 보았다. (e영상역사관)

6월 20일 그의 국회의사당 연설은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이 공유했던 '원조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미국의 정책 사고 변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아이젠하워는 링컨이나 케네디 같은 명연설가도,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같은 위대한 비전을 펼쳤던 정치인은 아니다. 그렇다고 존슨처럼 어젠다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성품이 아니었다. 골프를 지나치게 자주 쳤다고 해서 국정에 별 관심이 없었다는 혹평도 있다. 하지만 그의 국회 연설은 감동적이다. 4.19 민주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이 사건이 열어 놓은 희망의 세계에 대해 말했다. 

4.19 민주혁명은 대한민국이 초심으로 다시 돌아가는 기회를 주었다고 그는 보았다. 이승만의 12년 독재로 망가진 초기 한국의 존재 이유를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인용해 설명했다. 아이젠하워는 "(한국은)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가치 위에 세워진 나라 (a nation founded on the principles of government by and for the people)"라고 했다. 그는 왠지 인민의 (of the people)은 뺐다.

그는 한국이 이런 나라이기에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이라 했다. 지금도 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남침의 그늘 속에서도 인간의 자유와 국민 복지 증진은 번성할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를 간략히 설명했다. "세계가 여러분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You are watched by the entire world)."

독재자가 사라진 한국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들이 있다. 1.언론자유, 2. 책임있는 민의의 표시 3. 교육의 기회 4. 진정으로 주권자를 대표하는 국회. 4.19 민주혁명은 한국의 국민이 자유로운 국민으로서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보여주었다고 했다. 한국 민족의 민주 역량을 드러낸 사건이란 뜻이다. 미국은 한국의 발전을 앞으로 더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겠다고 했다. 미국이 지속되는 한, 한국은 항상 미국의 우정을 믿을 수 있을 것이라며 아이젠하워는 연설을 끝냈다. 

명연설이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희망을 담았다. 승공 통일과 한국, 남베트남, 대만의 하나 되는 아시아 반공 전선을 외치며 국가 권력을 독점한 가부장적 통치자, 비대한 군대와 미국의 원조에 의존해 장기 집권을 이어가려던 독재자는 떠났다. 미국은 이제부터 제대로 기능하는 한국을 만들려면 원조 의존병부터 고쳐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순조롭지 않았다. 민주 혁명 1년 뒤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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