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적 폭염, 함백산 희귀 식물은 기후 위기 이겨낼까
고산지대에서 만난 야생화의 향연, ‘천상화원’
하늘나리, 기린초, 큰뱀무, 터리풀, 개시호 개화
만항재~함백산~두문동재…주목, 갈매나무 늠름
나도범의귀, 대성쓴풀, 복주머니란, 기생꽃 등
태백산 국립공원 지정 때 사찰림과 국유림 제외
빙하기 잔존 식물과 희귀 식물 보전에 빨간 불
자투리 보호구역은 ‘녹색 섬’, 유전자 다양성 훼손
보호구역 면적 확대가 기후 위기의 근본적 해법
7월 초순 유례없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끝에 14일부터 거의 일주일 동안 집중호우가 전국을 강타했다. 충청권과 영호남, 경기북부 등의 일부 지역에는 적지 않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기상청에 따르면 9월 말까지 어느 해보다 더 긴 불볕더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기후 위기라는 재앙은 시시각각 우리를 이렇게 옥죄어 오고 있지만, 거의 모든 단위의 사회가 ‘어떻게든 해결되겠지’라는 막연하고 무책임한 생각으로 기존의 삶의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사람과 동식물, 인간공동체와 자연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초여름 기록적 무더위의 끝자락이자 집중호우 직전인 12일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에 올랐다. 함백산은 태백산 국립공원의 일부이자 이 공원의 산군(山群)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해발 1573m)다. 이날 서울의 한낮 최고기온은 36도를 가리켰지만, 함백산 산행의 시작점인 정선군 고한읍 만항재의 최고기온은 그보다 5도 이상 낮았다. 정선군과 태백시를 잇는 만항재(1330m)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포장도로 고개다. 고산지대로 피서를 온 셈이다. 버스에서 내려 숲길 속으로 발길을 옮기니 살짝 한기까지 감돈다. 일행 가운데서 “피서도 하고, 꽃 구경도 하니 일석이조”라는 흥얼거림이 나왔다.
'한국의 재발견, 식물탐사대(대장: 이굴기 도서출판 궁리 대표)'와 함께 한 이번 산행의 목적은 역시 야생화 관찰이다. 오늘 걸을 만항재~함백산~중함백산~은대봉~두문동재 구간(총 8.6㎞)은 5월부터 9월까지 야생화의 천국, ‘천상화원’이라고 불린다. 탐방로 초입부터 기린초, 숙은노루오줌, 큰뱀무, 터리풀 등의 꽃이 나타났다.
꽃구경과 피서의 일석이조…산꿩의다리, 숙은노루오줌, 둥근이질풀 만개
조금 더 올라가니 나리 종류 중에서도 꽃잎이 유난히 붉고 가느다란 하늘나리가 우리를 반긴다. 고산지대에서 짙은 황적색 꽃을 하늘을 향해 피운다. 이 땅의 여름은 너무 덥다는 붉은 메시지를 하늘에 던지는 듯하다. 멸종위기종인 날개하늘나리도 태백산에 서식하지만, 이날 산행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다. 줄기에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생긴 날개가 나 있다. 꽃은 하늘나리보다 옅은 주황색 바탕에 자주색 반점이 있다. 설악산, 오대산, 지리산 등 해발 1400미터 이상 고지대에 드물게 분포하는 멸종위기 Ⅱ급 식물이다.
지금 시기에 꽃이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식물은 산꿩의다리와 숙은노루오줌, 둥근이질풀, 터리풀 등이다. 둥근이질풀은 보라색 동그란 5장의 꽃잎에 애기 실핏줄 같은 선들이 그어져 있다. 터리풀은 습도가 높은 산지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인데 뿌리에서 생긴 잎 모양이 단풍잎을 닮았고, 6~7월 줄기 끝에 희고 탐스러운 꽃을 피운다. 가까운 종으로 7~~8월 쯤 지리산 노고단 등에서 짙은 분홍색으로 꽃을 피우는 지리터리풀이 있다. 둘 다 한국 특산종이다.
미역줄나무는 번식력이 좋아서 너무 많은 데다 또한 탐방로 안쪽으로까지 가지를 뻗어 보행을 방해하곤 한다. 탐방객에게는 그렇게 좋지 않은 인상을 주는 덩굴성 나무지만 만발한 흰 꽃을 자세히, 혹은 확대해서 보면 무척 예쁘다. 큰 산에 자주 오르는 일행이 말했다. “백두대간 길인데도 탐방로를 절반 가까이 가릴 정도로 초목이 무성하다. 날이 너무 더워 등산객이 확연히 줄어든 것 같다.”
맑은 하늘, 함백산 정상에서 소백산과 월악산을 보다
출발점에서 3.1㎞, 1시간 반 정도 걸어서 함백산 정상에 닿았다. 맑은 날씨에 바람까지 불어 그다지 힘들지 않았고, 무엇보다 탁 트인 전망이 시원했다. 여름철치고는 가시거리가 상당히 멀리 나왔다. 일행 중 한 명이 서남쪽을 가리키며 소백산과 월악산으로 보이는 봉우리들을 가리켰다. 듣고 보니 완만하고 긴 소백산 연봉들 뒤로 제법 뾰족한 월악산 영봉의 눈에 익은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깝게는 태백산 국립공원 내 남쪽으로 장군봉, 태백산, 문수봉 등이 뻗어 있고, 북쪽으로는 은대봉, 금대봉, 대덕산, 매봉산이 보였다. 여기부터는 나무들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주목들이 태백산 군락지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심심치 않게 위용을 드러냈다. 일부는 고사한 채 살아 있는 개체도 있고, 굵은 고사목들도 보였다. 목재는 향기가 좋고 단단해 가구, 조각상, 바둑판 등으로 이용가치가 높다. 노린재나무, 딱총나무, 층층나무, 병꽃나무들은 아직은 푸르거나 더러는 붉어 가는 열매들을 달고 있다. 조록싸리도 탐방로 부근에 모여 있으면 그 꽃들이 너무 예쁘다.
함백산 정상에서 은대봉(1442m)까지 가는 탐방로 부근에서 갈매나무가 더러 눈에 띄었다. 시인 백석(1912~1996)이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고 읊었던 그 나무다. 갈매나무과의 낙엽활엽관목 또는 소교목으로 다 크면 키가 5m 가량 된다. 작은 키인데도 짙푸르고 무성한 잎으로 위엄을 갖춘 모습이다. 백석이 떠올린 갈매나무는 겨울의 눈 속에서 만나야 제격이긴 하지만, 여름에도 짙푸른 잎이 좋다. 작은 가지 끝은 가시로 변해 야성미가 넘친다.
함백산 정상에 이를 때까지 발견한 동자꽃은 대개 꽃봉오리만 맺혀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활짝 핀 동자꽃이 자주 눈에 띄었다. 동자꽃은 높은 산에 비교적 흔하지만, 같은 석죽과 동자꽃속의 제비동자꽃과 가는동자꽃은 멸종위기Ⅱ급 식물이다. 그밖에도 짚신나물, 노루오줌, 노랑물봉선, 물레나물, 개시호, 여로 등이 꽃을 피웠다. 멍덕딸기의 늦게까지 남아 있는 꽃도 보았다.
오전 7시 40분에 만항재를 출발한 일행은 오후 2시 남짓해서 두문동재에 도착했다. 여기부터 가던 방향으로, 즉 북쪽으로 금대봉~분주령~대덕산~검룡소 구간(9.4㎞)은 한국 4대 야생화 성지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 탐방로 구간의 오른쪽, 동남쪽 산림은 환경부의 생태·경관보호지역, 국립공원 내 자연보존지구이면서 금대봉~대덕산 특별보호구역으로 겹겹이 보호되고 있다. 나도범의귀, 대성쓴풀 등 70종 이상의 국가보호종 서식지이기 때문이다.
태백산 국립공원의 마루금은 백두대간의 허리에 해당하는 구역으로서 야생생물, 특히 북방계 식물의 종 다양성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지난 5월 17~18일에는 빙하기 잔존식물 보전을 위한 학술세미나가 태백산 오투리조트에서 열렸다. 한국식물분류학회 등이 주최한 이 행사에서 현진오 동북아생물다양성연구소 소장은 “태백산은 고유 식물의 보고로 태백개별꽃, 태백취와 태백제비꽂처럼 지명과 연관된 식물명이 눈에 띄며, 이는 지역 생태계의 독자성과 보존가치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태백산에는 그 밖에도 꼬인용담, 나도범의귀, 부전투구꽃 등 남한의 다른 곳에는 전혀 없는 것으로 알려진 식물 종이 여럿 살고 있다. 즉 기후변화가 급속히 진행되면 가장 먼저 멸종에 이르게 될 식물이 태백산국립공원에는 무척 많다는 말이다.
태백산국립공원은 게리맨더링에 의해 거꾸로 선 해마 모양
태백산국립공원은 2016년 국내에서 2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그 후 대구 팔공산이 국립공원으로 추가됐으므로 막내 신세는 면했다. 문제는 면적이 너무 좁다는 것이다. 국립공원공단은 이곳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려 할 때 당초 태백시, 정선군, 영월군, 봉화군에 걸쳐 약 400㎢를 대상으로 삼았다. 2015년 강원도의 국립공원 지정 건의안은 태백산(49.3㎢), 함백산(41.3㎢), 대덕산·금대봉 생태경관보호지역(9.1㎢) 등 99.7㎢를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고찰 정암사를 포함한 함백산 서쪽 사면이 대부분 제외된 70.1㎢만 태백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면적이 23개 국립공원 가운데 21번째에 해당한다. 월출산(56㎢)과 계룡산국립공원(65㎢)만 태백산보다 면적이 더 적다.
공단 측에 따르면 제외 지역 대부분이 국유림이지만 천년고찰 정암사를 거느린 조계종과 산림청이 공원 편입에 반대했다고 한다. 태백산국립공원은 결국 선거구 게리맨더링 결과처럼 해마가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모양으로 홀쭉하고 길게 뻗고 말았다. 서남쪽으로 이웃한 소백산국립공원의 면적이 322㎢인 것에 비하면 태백산국립공원은 너무 작게 자리 잡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날 우리 일행이 탐방한 만항재~두문동재 구간은 국립공원 경계가 대부분 동서로 1 ㎞ 안팎에 불과한 비좁은 회랑이다.
보호지역의 면적이 클수록 생물다양성이 증진되는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멸종위기종 서식지를 그 종이 사는 곳에만 한정해서 보호할 경우 외래종 침입, 인간의 간섭 등에 의해 생존 기반이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종 다양성뿐만 아니라 특히 유전자 다양성이 낮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서식지 주변에 넓은 완충지대가 필요하다. 국립공원공단의 '2025년 국립공원 기본통계'에 따르면, 22개 국립공원 중 생물종이 가장 많은 곳은 면적이 483㎢로 육상공원 중 가장 넓은 지리산으로 8874종이 서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4125종으로 서식 생물종이 가장 적은 북한산(면적 77㎢)과 더불어 공원면적이 적은 편인 태백산, 월출산, 내장산 등은 보유 생물종이 5000 종에 미치지 못했다.
보호구역, 넓은 면적을 지정해야 생물다양성 확보 가능
국립공원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도립공원, 지질공원, 습지보호구역, 생태·경관보호구역 등도 모두 면적이 너무 적다. 이들 대부분은 왜소한 ‘녹색 섬’으로 생물다양성을 확보하는데 적절한 규모가 아니다. 게다가 보호지역 안에서도 3km가 멀다 할 정도로 생태계가 도로에 의해 단절됨으로써 그나마 파편화 현상이 심각하다. 박선규 국립공원공단 보전부장은 “결국 (만항재 등의) 관통 도로 위쪽으로만 보호지역이 됐다”면서 “포장도로 개설 이후로 함백산과 태백산의 빙산의 일각에 대해서만 조사와 탐방이 이뤄지고 있을뿐”이라고 말했다.
현진오 소장은 “태백산국립공원이 면적 면에서는 미흡하지만, 뒤늦게라도 국립공원에 편입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현 소장은 그러나 “(산림청이) 국립공원 경계인 백두대간 마루금 서쪽 국유림의 해발 1500~1400m 정상까지 조림지를 유지하는 것은 큰 문제”라며 “잣나무와 일본잎갈나무 씨앗이 침입해 다양한 희귀식물의 생존과 번식에 지장을 준다”고 말했다.
보호구역의 단순한 갯수가 아니라 그 면적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작업은 물론 쉽지 않다. 방대한 사유지를 사들여야 하거나 주민들에게 규제에 따른 피해에 대해 막대한 보상을 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정부가 자연을 위해 뭉칫돈을 투자한다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국토 계획과 생물다양성 측면만 보더라도 환경영향평가제도가 자연과 생태계에 대한 수비라면 보호지역 확대는 무분별한 개발에 대한 선제공격이다.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라는 말도 있듯이 미래세대를 위해서는 보호지역 확대가 가장 근본적인 환경 정책이다.
기후변화의 재앙을 모면하기 위해서도 기존의 완화와 적응이라는 양대 대응을 아우르는 방안으로 보호지역 확대가 떠오르고 있다. 화석연료 대체를 넘어선 에너지사용의 감축 약속을 전 세계가 말로만 할 뿐 행동에 옮기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출구는 사람의 손길이 차단된 숲과 바다의 면적을 대폭 늘려 충분한 탄소 흡수원을 확보하는 것이다. 2021년 세상을 떠난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2016년 지구 지표면의 50%를 국립공원과 같은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자고 제안했다. 최근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기후 재앙을 보면 이 제안이 전혀 허풍이나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