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이웃 영국과 프랑스, 도버해협 끼고 천년의 애증
백성은 영어, 귀족은 프랑스어 쓰는 이중성
영국, 패배한 백년전쟁이 정체성 확립 계기
프랑스에 밀린 패션은 영국 신사복 만들어
프랑스혁명, 산업혁명 영향 주거니 받거니
입으로는 흉보면서 프랑스 관광 1등인 영국
영국과 프랑스 관계는 마치 옆집에 사는 앙숙 같다. 서로 못 살겠다고 하면서도 몰래 엿보고, 흉내 내고, 때로는 부러워하는 그런 사이 말이다. 겨우 33킬로미터에 불과한 도버해협/라망슈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두 나라의 천년 묵은 애증관계는 영국 역사와 사회 곳곳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1066년, 모든 것이 바뀐 그날
영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해를 꼽으라면 단연 1066년이다. 프랑스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 기욤(윌리엄)이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해럴드 왕을 물리치고 영국 왕좌에 앉은 바로 그 해다. 이때부터 영국은 '프랑스계 왕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이후 300년 동안 영국 왕들은 프랑스어를 쓰며 살았다. 백성들은 영어를 쓰는데 왕과 귀족들은 프랑스어로 떠드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마치 오늘날 어떤 나라의 상류층이 영어로만 대화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랄까.
이 시절 영국 법정에서는 '죄가 있다'를 뜻하는 프랑스어 '꿀파블(coulpable)'이 '길티(guilty)'로 변해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범죄자를 가두는 감옥도 프랑스어 '쟈올(gaol)'에서 나온 '제일(jail)'이다. 영국인들이 범죄와 형벌을 논할 때마다 프랑스어를 쓰고 있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영어 속에 숨은 프랑스의 혼
영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철자법이다. 왜 '나이트(knight)'에서 k와 gh가 묵음일까? 왜 '캐슬(castle)'에서 t가 들리지 않을까?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이 바로 프랑스어 영향이다.
영어 어휘의 거의 30%가 프랑스어에서 왔다. 특히 고급스럽고 격식 있는 단어들은 대부분 프랑스어 출신이다. 소는 '카우(cow)'지만 그 고기는 '비프(beef, 프랑스어 bœuf)'다. 돼지는 '피그(pig)'지만 요리하면 '포크(pork, 프랑스어 porc)'가 된다.
영국의 농민들은 살아있는 동물을 영어로 불렀지만,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부유한 프랑스계 귀족들은 프랑스어로 불렀다. 지금도 영국인들이 스테이크를 먹을 때마다 프랑스어를 쓰고 있다니, 이 얼마나 계급적인 언어인가.
백년전쟁, 사실은 116년 전쟁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이어진 이른바 '백년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관계의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영국 왕들이 프랑스 왕좌를 놓고 벌인 이 기나긴 다툼은 결국 영국의 패배로 끝났다.
하지만 이 전쟁은 영국에게 뜻밖의 선물을 안겨주었다. 바로 '영국인'이라는 정체성의 탄생이다. 그전까지 영국인들은 자신을 앵글로색슨족이나 노르만족으로 여겼는데, 프랑스와의 오랜 전쟁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프랑스인과 다르다'는 의식을 갖게 됐다.
특히 아쟁쿠르 전투(1415년)에서 영국이 거둔 대승은 영국인들의 자존심을 하늘 높이 끌어올렸다. 훗날 셰익스피어가 '헨리 5세'에서 이 전투를 그토록 극적으로 그려낸 이유다. 프랑스 기사들을 화살로 꿰뚫어 버린 영국 궁수들의 활약상은 지금도 영국인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
프랑스 요리에 대한 열등감과 동경
영국요리가 맛없다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역시 프랑스 때문이다. 프랑스 요리가 워낙 뛰어나다 보니 상대적으로 영국 요리가 초라해 보인다.
18세기부터 영국 상류층은 프랑스 요리사를 고용하는 것을 최고의 사치로 여겼다. 프랑스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먹어야 품격이 있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영국요리는 발전할 기회를 잃었다. 자국 요리를 천시하고 프랑스 요리만 숭배하다 보니 영국 고유의 요리 문화가 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은 '피시 앤 칩스'와 '커리'다. 앞은 벨기에에서 온 감자튀김과 결합한 것이고, 뒤는 인도 식민지에서 가져왔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요리 전통을 잃어버린 채 세계 각국의 음식을 먹고 있다. 요즘은 한류 때문에 한국 음식도 영국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예술과 문화, 프랑스를 향한 복잡한 감정
영국의 예술가들은 항상 프랑스를 의식해 왔다. 18세기 영국 화가들은 프랑스 궁정화풍을 따라 하려 애썼고, 19세기 영국 작가들은 프랑스 문학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인상주의 회화가 프랑스에서 꽃피자 영국 화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터너나 컨스터블 같은 영국 화가들이 이미 비슷한 화풍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프랑스 화가들이 더 혁신적이고 대담한 작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19세기 영국 소설가들은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영국 특유의 도덕적 엄격함 때문에 프랑스 소설의 솔직함과 대담함을 그대로 따라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영국소설은 프랑스 소설보다 더 우회적이고 암시적인 표현을 발달시켰다.
패션, 프랑스를 따라 하려다 실패한 역사
패션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17세기부터 파리는 세계 패션의 중심지였고, 영국 상류층은 프랑스 패션을 따라 하려 애썼다. 하지만 영국인들의 실용주의적 성격과 프랑스인들의 미적 감각은 잘 맞지 않았다. 프랑스인들이 우아하고 세련된 옷을 입을 때 영국인들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결국 영국인들은 자신들만의 패션을 만들어냈다. 바로 '영국 신사복'이다. 19세기에 완성된 영국 신사복은 화려함보다는 품격을, 장식보다는 실용성을 추구했다.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 남성복의 기본이 됐다. 영국 신사복은 프랑스 패션에 대한 반발에서 나왔다는 게 흥미롭다. 프랑스인들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옷차림을 보고 "우리는 저렇게 허영스럽지 않다"며 만들어낸 것이 오히려 세계적 성공을 거둔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영국에 미친 충격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영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바로 옆 나라에서 왕의 목을 자르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영국지배층은 공포에 떨었다. 이 때문에 영국은 더욱 보수적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 영국에 미치지 않도록 온갖 조치를 취했다. 언론을 통제하고, 집회를 금지하고, 프랑스와의 교류를 차단했다.
하지만 혁명의 이념 자체는 막을 수 없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가치는 영국 사회에도 서서히 스며들었다. 19세기 영국의 정치개혁은 모두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영국노동자들은 프랑스혁명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1848년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혁명의 물결은 영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비록 영국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정치적 개혁의 압력은 계속 커졌다.
산업혁명과 라이벌 의식
19세기 영국이 산업혁명을 주도하면서 잠시 프랑스를 앞섰다. 하지만 프랑스도 뒤따라 산업화를 추진했고, 두 나라는 경제적으로도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특히 식민지 확장에서 두 나라의 경쟁은 절정에 달했다. 아프리카에서 아시아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식민지를 더 많이 차지하려 애썼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파쇼다사건(1898년)은 두 나라가 전쟁 직전까지 갈 정도로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이 나타나면서 두 나라는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았다. 1904년 영-프 협상(Entente Cordiale)으로 천년 묵은 앙숙이 동맹국이 됐다.
유럽연합과 브렉시트
20세기 후반 유럽통합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또 다른 갈등을 빚었다. 프랑스는 유럽연합의 열렬한 지지자였지만, 영국은 항상 반신반의했다.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1960년대 영국의 유럽 공동체 가입을 두 번이나 거부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영국은 유럽대륙과 다르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영국은 1973년에야 유럽 공동체에 가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끝까지 유럽통합에 소극적이었다. 유로화 도입을 거부하고, 솅겐협정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마침내 2016년 브렉시트 투표에서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했다.
흥미롭게도 브렉시트 찬성파들이 내세운 주요 논리 중 하나가 '프랑스와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연합에서 벗어나야 한다'였다. 천년 묵은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브렉시트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참으로 복잡하다. 서로 싸우고 경쟁하면서도 서로에게서 배우고 영향을 받았다. 영국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것은 프랑스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언어, 요리, 예술, 패션, 정치 등 영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 프랑스의 영향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반발을 통해서, 때로는 경쟁을 통해서 프랑스는 영국을 만들어왔다.
도버해협을 사이에 둔 이 두 나라는 앞으로도 계속 서로를 의식하며 살아갈 것이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사랑해도 다시 한 번. 그것이 바로 영국과 프랑스의 숙명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영국인들이 프랑스를 가장 많이 찾는 관광객이라는 사실이다. 입으로는 프랑스를 욕하면서도 몸은 정직하게 프랑스로 향하는 영국인들. 이보다 더 정확한 두 나라 관계의 본질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