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강국의 길 ① 왜 지금인가?
번영에 더해 ‘공동체 정신’ 뿌리 내린 ‘존엄한 국가’
콘텐츠 수출, 한류 확산 넘어 민주공화국 본질 찾기
지배 이데올로기 해체, 사유·창작 숨 쉬는 국가비전
메디치가 이끈 피렌체…시민이 이끌 대한민국의 길
『대한민국 보수는 왜 매국 우파가 되었나?』 의 이병권 작가가 새정부 출범에 즈음해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 ‘왜, 지금 문화강국인가’의 문제 제기와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담대한 기획, △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여정에 놓인 강점·약점·기회·위협(SWOT) 분석, △ 문화강국 길의 노정도 등 3편으로 나누어 게재한다. 한국메세나협회에서 10년간 사무처장을 지낸 경험을 토대로 웅숭깊은 제안을 내놓았다. <편집자 주>
복합 위기의 기로에 선 대한민국
2025년, 대한민국은 복합적인 위기의 교차점에 서 있습니다. 민주공화국의 헌정 질서는 파시즘의 강력한 도발에도 불구하고 광장의 시민들 덕에 가까스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헌신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서 구조적 붕괴의 경고음은 여전합니다. 후퇴의 벼랑 끝에서 겨우 균형을 유지하고 있음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에 지금, 시대 과제를 정면에서 응시하고 답해야 할 때입니다.
첫째, 내란세력의 단호한 척결을 통해 민주공화국의 기본 질서를 회복해야 합니다. 둘째, 무너진 국민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셋째, 파시즘의 도구로 전락한 법 제도와 권력 구조를 전면 재편해야 합니다. 넷째, 뉴라이트로 상징되는 왜곡된 역사관과 사대주의적 체념을 청산하고, 우리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분명히 세워야 합니다.
이러한 네 가지 과제 위에, 저는 하나의 긴 호흡을 더하려고 합니다. 바로 '문화강국의 길'입니다. 단순한 국가 이미지의 제고나 콘텐츠 수출의 신장을 뜻하지 않습니다. 문화는 산업이기 이전에 정신이며, 정신은 바로 스스로를 성찰하고 새롭게 구성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문화강국이란 그 집단적 사유와 실천의 힘이 고양된 사회를 의미합니다. 김구 선생이 꿈꾼 문화강국은, 경쟁이 아닌 공존의 문화를 향한 비전이었습니다. 군사적 강대함이나 경제적 우위를 넘어, 우리 안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품격을 세계와 함께 나누는 나라. 그 나라는 타국과의 쟁취가 아니라 세계와의 공감 위에 존재합니다. 저는 이 문화강국이야말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다시 시대정신을 회복하고, 전환의 문을 열어갈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단기간의 정책이나 산업적 성공으로 닿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문화강국은 깨어 있는 시민이 주체가 되어 공동체의 방향을 설계하고, 그 안에 공공의 사유와 윤리적 상상력이 뿌리내릴 때 비로소 현실로 다가옵니다. 문화는 곧 사회가 가진 질문의 깊이이며, 정체성의 지속가능한 형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회복하고, 무엇을 새롭게 창조해야 할까요?
저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15세기 피렌체로 눈을 돌려보려 합니다. 유럽의 근대를 연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국가에서,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를 중심으로 메디치 가문은 인문정신과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예술과 시민사회의 꽃을 피웠습니다. 단순한 후원을 넘어, 도시 전체의 문화적 지형과 정치적 질서를 새롭게 그리는 혁신적 시도였습니다.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와 미셸 푸코의 사유를 빌려 이 흐름을 비판적으로 되새기려 합니다. 권력과 문화가 어떻게 얽히는지, 지식이 어떻게 통치의 도구 또는 저항의 무기가 될 수 있는지, 함께 성찰하려 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문화강국은 지적 투명성과 시민적 윤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를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르네상스는 단지 과거의 부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인간상을 향한 사회 전체의 기획이자 실천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르네상스를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이 글은 바로 그 여정을 함께 탐색하는 기록입니다. 문화강국의 길, 우리 시대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입니다.
코시모의 '문화강국 기획'을 다시 읽는다
르네상스(Renaissance)는 ‘재생’ 또는 ‘부흥’을 의미하는 프랑스어로, 19세기 프랑스 역사학자 쥘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가 1855년 저서 『프랑스사(Histoire de France)』에서 중세 이후의 새로운 시대를 지칭하기 위해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이후 스위스 역사학자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1818–1897)가 1860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명(The Civilization of the Renaissance in Italy)』에서 ‘르네상스’를 고유명사화했죠. 그러나 부르크하르트를 비롯한 계몽주의 계열 역사학자들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유산을 지나치게 이상화하고 중세를 암흑기로 폄하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특히 근대철학과 과학 발전을 정당화하기 위해 근대를 ‘진보’로 보는 유럽 중심주의 역사관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시각은 결과적으로 유럽 문명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이후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해석의 위험성을 경계해야 하지만,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의 작은 도시 국가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이 이룩한 문화강국의 성취는 독특하고 탁월한 역사적 발전 사례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경제적 번영과 군사·외교적 독립을 기반으로 철학과 예술을 발전시키며 문화강국을 실현하고자 분투했습니다.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이 추구한 르네상스는 단순한 문화예술의 부흥이 아니었습니다. 중세의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 이성과 존엄을 회복하려는 정신혁명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철학’이 있었죠. 인간의 본질, 사회와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다시 살아났고, 고대 그리스의 사유의 전통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지적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메디치 가문, 피렌체 문화 공화국의 설계자
메디치 가문은 1434년부터 1737년까지 약 300년간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면서 르네상스의 중심이자, 문화·정치 세력으로 키웠습니다. 금융업으로 출발한 이 가문은 모직산업, 예술 후원, 정치 외교 등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며 유럽 최고 부호 중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교황 레오 10세(1475–1521), 교황 클레멘스 7세(1478–1534), 프랑스 왕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1519–1589), 마리 드 메디시스(1575–1642)를 배출하며 유럽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예술과 사상을 비롯해 오페라, 발레, 식기류, 여성 하이힐 등 다양한 문화 요소를 전파했습니다. 단순한 정치 권력을 넘어 문화 권력의 주체로서 기능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특히 가문의 초기 4대, 즉 죠반니, 코시모, 피에로, 로렌초 시기는 ‘메디치 황금기’로 불립니다. 이 시기 피렌체는 르네상스 문화와 예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는 가문을 유럽 최고의 명문으로 끌어올린 주인공입니다. 시민들의 신망을 바탕으로 공화정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도시국가 간 균형 외교로 이탈리아 전체의 외교적 안정을 확보했습니다. 또한 빈민 구제와 공공건축을 비롯한 사회 인프라를 확충해 피렌체를 문화국가로 성장시켰습니다. 비잔틴 제국 멸망 후 동방 지식인과 고전 고문서가 피렌체로 유입되는 것을 적극 추진해 르네상스 사상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코시모는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등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를 지원하고,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프라 안젤리코, 프라 필리포 리피 같은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장을 열어주었습니다. 문화예술을 도시경제의 중요한 축으로 발전시켜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중심이자 국제 예술 거래와 관광의 허브로 만든 것이죠.
코시모 사망 후, 피렌체 시민들은 그를 ‘국부(Pater Patriae)’라 칭하며 최고의 존경을 표했습니다. 그의 무덤이 있는 산 로렌초 성당(Basilica di San Lorenzo)에는 ‘국부’라는 단어만 새겨졌습니다.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는 『피렌체사(Storia Fiorentina)』에서 코시모를 “공화정을 붕괴하지 않으면서 권력을 장악한 자”로 평가하며,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킨 통치의 전범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1492년 로렌초 데 메디치 사망, 메디치 은행 파산,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8-1498)의 반동적 종교·정치 세력 등장 등의 악재로 피렌체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후 메디치 가문은 참주정과 왕정 체제를 거쳐 약 250년간 피렌체를 통치했습니다.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인 안나 마리아 루도비카 데 메디치(Anna Maria Luisa de' Medici, 1667–1743)는 사망 직전 메디치 가문의 전 재산과 예술품을 피렌체에 기증하며 “어떠한 작품도 도시 밖으로 반출하거나 판매해서는 안 된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피렌체가 세계 최고의 문화·관광 도시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유언이었습니다.
철학은 어떻게 권력을 만들고 또, 해체하는가
중세를 지배하던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은 철학이라기보다 신학을 위한 논리 도구에 가까웠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교리 체계에 접목시키려 했지만,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신의 존재를 논증하고 교리를 정당화하는 데 있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회는 어떻게 구성돼야 하는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을 던졌지만, 철저히 종교적 틀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 결과 철학은 독립적 사유가 아닌, 신학의 하위 범주로 전락했습니다. 코시모를 비롯한 르네상스 시기의 신풀라톤주의자들은 이러한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고대의 플라톤 철학을 재발견하며, 인간 중심의 세계관, 영혼의 존엄, 우주 질서에 대한 조화로운 이해를 추구했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신을 증명하는 철학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는 철학이었죠. 스콜라철학이 교리의 논리를 다듬었다면, 르네상스를 이끈 신플라톤주의 철학은 인간 정신의 가능성을 해방시켰습니다.
당시 사회는 봉건적 위계질서와 성직계급 권위가 절대적이었습니다. 스콜라철학은 이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근거한 ‘자연적 질서’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교회의 지배가 단순한 신앙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타당함을 구조화한 것입니다. 이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지적한 ‘지식은 권력이다’(『말과 사물』, 1966)라는 명제와 일치합니다. 스콜라철학은 지배 권력의 핵심 도구였으며, 지식 자체가 교회 권력의 중추였던 것입니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는 대표작『옥중수고』(1947)에서 이러한 철학적 지배가 단순한 강압이 아니라 ‘도덕적·지적 지도력’, 즉 헤게모니의 장치였다고 분석합니다. 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통해 시민과 지식인, 군주들까지 이데올로기적으로 포섭하여 하나의 ‘보편상식(common sense)’으로 내면화시켰습니다.
신플라톤주의, 르네상스의 문을 열다
중세 교회 권력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토대로 스콜라철학이라는 지적 체계를 구축하며, 자신들의 지배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했습니다. 이 체계는 인간과 사회, 우주 질서 전반에 대한 신의 절대권을 이성의 언어로 설명하고, 피지배자들에게까지 '자연적이고 불가피한 질서'로 각인시켰습니다. 스콜라철학은 단지 철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교황과 성직자, 봉건 영주들이 시민과 농민들을 길들이는 통치의 언어였고, 이데올로기였으며, 유럽 봉건질서 전체를 떠받친 '보이지 않는 권력의 기둥'이었습니다.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는 이 구조를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는 단순한 철학과 예술 후원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식은 권력'이라는 푸코의 명제를 이미 15세기에 실천한 정치가였습니다. 코시모는 신플라톤주의라는 새로운 철학, 즉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피렌체 시민의 삶 속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이를 통해 봉건질서와 교회 권위, 스콜라철학이라는 기성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자 했습니다.
신플라톤주의는 인간의 이성과 정신, 영혼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그것은 위계와 복종, 형벌의 논리가 아니라 조화와 상승, 내적 자유를 강조하는 사상이었습니다. 코시모는 이 철학을 예술과 결합해 신의 형상을 재현하던 중세 미술을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미술로 바꿨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신적 영혼을 지닌 창조적 존재로 그려졌고, 도시는 교회권력의 통제 공간이 아니라, 사유와 창작의 자유가 숨 쉬는 ‘문화 공화국’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코시모의 위대함은 단지 정치적 수완이나 재력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철학과 예술, 지식의 힘으로 시대의 구조를 재편한 인물입니다. 교회 중심의 질서에서 시민 중심의 질서로, 억압적 계급질서에서 창조적 문화질서로 이행하는 전환의 리더였습니다. 그는 통치자이자 교육자였고, 자본가이자 철학자였습니다.
그가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를 후원해 플라톤 아카데미를 세운 것은 단순한 학문 후원이 아니라, ‘지식의 전환’을 통한 ‘권력의 전환’이었습니다. 스콜라철학이 교회 권력의 헤게모니를 정당화하는 철학이었다면, 신플라톤주의는 시민사회의 비판정신과 예술적 자율성, 인간 중심의 가치를 복원하는 철학이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피렌체를 ‘문화강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권력의 정점에 있었지만 권력을 절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민과 함께 문화의 공화국을 만들었고, 철학자와 예술가에게 권위와 상상력의 공간을 제공했습니다. 피렌체의 ‘국부’로 불릴 자격이 있는 몇 안 되는 통치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기술과 경제의 고도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정신적 기반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극단적 혐오와 증오의 정치는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저열한 정치 언어는 대중의 사유를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철학 없는 정치’가 ‘정치 없는 철학’으로 치환되며, 인간 중심의 국가가 아니라 시스템 중심의 관리 사회로 퇴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시기일수록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국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문화는 왜 필요한가?’ ‘권력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 (1433–1499)는 이렇게 답합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인간을 고귀하게 하기 위함이다.”
대한민국, '문화강국의 꿈'을 꿀 준비가 돼 있는가
문화강국은 단순한 콘텐츠 수출이나 한류 확산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사회가 지닌 가치관, 철학, 역사, 예술, 언어, 사유 방식의 총합이며, 정치·경제·과학을 포함한 인간 활동 전반이 ‘인간다움’이라는 목적 아래 통합될 때 실현 가능한 이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 중심 국가, 철학 중심 사회, 그리고 민주공화국의 본질적 목표와 맞닿아 있습니다. 코시모가 피렌체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꿈은 단순한 도시의 번영이 아니었습니다. 철학과 예술, 공동체 정신을 기반으로 ‘존엄한 도시국가’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피렌체처럼 독립적인 도시국가는 아니지만, 세계 어느 국가보다도 빠르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독특한 경험을 지닌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 물질의 풍요를 넘어서 정신의 풍요로 나아갈 시간입니다. 깨시민이 주인인 국가, 철학이 존재하는 정치, 예술이 숨 쉬는 도시, 언어가 고결한 사회를 다시 꿈꾸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문화강국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전제는 국가의 문화정체성을 분명히 정립하고, 인간 중심의 철학과 민주공화국의 원칙 위에서 새로운 국가 비전을 설계하는 일입니다. 코시모가 남긴 문화강국의 꿈은 피렌체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의 시민들이 그것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