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통화 달러로 ‘네덜란드 쇠퇴병’에 걸린 미국
프랑스 역사인구학자 토드의 ‘트럼프 정치’ 진단
“트럼프의 보호주의 무역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
‘르상티망’(원한)에 사로잡힌 트럼프 정권 실세들
미국 핵무기 공유, 핵우산 통한 안보는 “난센스”
일본의 핵무장을 중국은 내심 바랄 것이다?
“트럼프와 그 측근들은 유럽의 엘리트보다 ‘현실’ 인식에서는 지적으로 한 걸음 더 앞서 있다. ‘보호주의로 자국의 제조업을 지켜야 한다’ ‘이민 유입은 통제해야 한다’ ‘인간에겐 두 가지 성(性)밖에 없다’ ‘사람들에겐 포퓰리스트 정당에 투표할 권리도 있다’ 등의 주장 자체는 상식에 토대를 둔 이성적인 판단이다.
하지만 그 주장의 이면에는 미국 유럽의 엘리트들에 대한 증오라는 강렬한 르상티망(원한)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J.D. 밴스 부통령의 자전 <힐빌리 엘레지-미국의 번영에서 소외된 백인들>에서는 ‘민중에 대한 애정’보다는 ‘엘리트에 대한 증오’가 더 강한 네거티브한(부정적인) 패션(열정)을 느낀다. (이스라엘의 가자 공격에 반대시위를 벌인 학생들이 다니는) 대학들에 대한 조성금(지원금) 삭감 등의 대학 규제와 교육부, USAID(미국 국제개발처) 해체 등의 정책은 그런 증오를 상징한다.”
‘르상티망’(원한)에 사로잡힌 트럼프 정권 실세들
프랑스 역사인구학⋅가족인류학자 에마뉘엘 토드가 일본의 우파 월간지 <문예춘추>(2025년 5월호)에 기고한 ‘구미(유럽 미국)의 분열과 일본의 선택’이라는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관세전쟁’으로 대표되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권의 난폭할 정도의 공격적 정책 뒤에 미국과 유럽의 기득권 엘리트들에 대한 트럼프 정권 실세들의 맹렬한 원한(르상티망)감정이 자리잡고 있다는 토드의 지적은 인상적이다. 이 구절에 이어 토드는, 그럼에도 트럼프의 보호주의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트럼프의 보호주의 무역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
왜 그런가? 그가 보기에 보호주의도 타국과의 협조 속에 현명하게 실시하지 않으면 성과를 얻을 수 없다. 보호주의적 조치로 이익을 얻을 수 있으려면, 근면하고 우수한 엔지니어와 노동자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부재한 가운데 피해자 의식(르상티망)으로 보복적 관세전쟁을 벌이면 인플레가 치솟고, 생활수준을 끌어내릴 뿐이다. 결국 타국으로부터의 수입품에 의존해 온 미국경제야말로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게 될 것이다.
여기에다 ‘탈달러화’를 추진해 온 브릭스(BRICS/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를 협박해 온 트럼프는 ‘기축통화인 달러’의 존재야말로 미국의 국내산업 부활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일갈한다. 이 대목이 더욱 날카로워 보인다.
기축통화 달러야말로 미국 ‘네덜란드병’의 원인
트럼프는 브릭스가 달러 이탈 정책을 추구하면 제재 강화로 그 몇 배의 불이익을 안겨 주겠다고 위협하면서 기축통화 달러 방어 의지를 분명히 했지만, 토드가 보기에 달러 기축통화야말로 미국 쇠망의 원인이다. 그는 한 나라의 풍부한 천연자원은 경제의 다른 분야 발전을 가로막는 힘이기도 하다며, 그것을 ‘네덜란드 병’이라고 한다면서 “미국은 이른바 ‘슈퍼 네덜란드 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다”고 얘기한다.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이란, 주로 자원 부국이 자원 개발과 수출로 일시적으로 경제 호황을 누리지만 물가와 통화 가치상승 등으로 국내 제조업이 쇠퇴해, 결국 경제 침체를 겪게 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경제학 용어 가운데 하나다. 1959년 네덜란드는 북해 유전 발견으로 석유를 수출하면서 한때 경제호황을 누렸으나 통화가치 상승과 물가 급등으로 국내 제조업 기반이 무너지면서 결국 1960~70년대에 극심한 경제침체를 겪었다.(‘위키백과’)
최근 중남미 국가들이 중국과의 교역 증대로 원자재 수출 비중이 늘어나면서 일시적인 호황을 맞았지만 수출국들의 제조업 비중은 점점 줄어들면서 약화되고 있다. 같은 차원에서 논할 수는 없지만,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는 아프리카 자원 부국들이 가난과 낙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일종의 네덜란드 병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토드는 미국에게 네덜란드 병을 일으키는 천연자원은 바로 기축통화 달러라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바로 기축통화 달러가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고학력자일수록 산업이나 제조업 분야 취업으로 연결되는 과학이나 엔지니어 계통이 아니라, 달러라는 부의 원천에 바로 접근하기 위해 금융이나 법률 분야를 택한다고 지적했다. 트럼프가 '관세전쟁'의 최종목표를 미국 제조업의 부활이라고 공언하고 있지만, 달러만 찍어내면 되는 달러 기축통화체제가 결국 제조업을 무너뜨리고 미국을 망치고 있다는 얘기다.
영국도 그랬고, 한국도 벌써 그런 증세
좀 살게 된 나라들이 대체로 그런 경향을 띠게 되며, 예전의 ‘대영제국’도 그런 과정을 거쳐 쇠퇴했다. 한국의 좀 산다는 집안 부모들이 자식들을 법대나 경영대, 의대에 보내기를 열망하고, 의대로 가더라도 힘드는 ‘전통’분야를 꺼리는 것도 그런 현상의 하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토드는 트럼프 정권이 ‘현실’ 인식은 제대로 하고 있을지 몰라도 ‘정책의 입안과 실행’ 차원에서 잘못돼 있다며, 트럼프와 부통령 밴스, 정부효율화부 수장 일론 머스크 등 정권의 실세들이 그런 문제들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르상티망 정치’를 하면서 미국의 내부 붕괴를 더욱 가속시키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기득권 엘리트들에 대한 원한 갚기식의 ‘르상티망 정치’는 정치적 반대파 죽이기식 ‘보복정치’로 바꿔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국가적 반목과 분열을 부른 윤석열 정부 3년 동안 한국인들이 지겹도록 목도해 온 것이 ‘르상티망 정치’였을까.
미국 핵무기 공유, 핵우산 통한 안보는 “넌센스”
토드가 그 글에서 거론한 또 한가지 흥미로운 주제는 핵무기와 핵우산에 관한 것이었는데, 토드는 예컨대 미국의 핵무기와 핵우산을 통한 안전보장이라는 것이 실효성 없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토드는 먼저 독일 잡지 <슈피겔>(3월 7일)에 실린 미국의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의 인터뷰 기사 일부을 인용한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지난 2월 말의 트럼프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충격적인 회담 결렬이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심각한 문제를 노정시킨 것이라며 이렇게 얘기한다.
“(나토 가맹국에 대한 공격은 나토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나토 헌장) 제5조는 미국이 나토 가맹국을 구하기 위해 군사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실은 명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냉전시대에는 바로 그렇게 생각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동서 대립의 최전선에 있으면서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았던 독일인들은 미국이 서독 방위를 위해 핵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자동적으로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뉘앙스로 제5조를 강조했다. 그러나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맥나마라 전 국방장관은 퇴임 뒤에, ‘독일 방위를 위해 핵무기를 사용하진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금 일본에서도 ‘핵 셰어링(공유)’을 일부에서 논의하고 있으나 그건 “난센스”라고 토드는 얘기한다. 이건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토드는 “‘핵우산’이란 개념도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사용하면 자국도 핵공격을 당할 위험이 있는 핵무기는, 기본원리상 타국을 위해서는 사용할 수 없는 무기라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자국의 핵을 사용해서 일본을 지켜주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면서, “핵은 ‘갖지 않든지’ ‘자신이 직접 갖든지’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고 토드는 단언했다. 동맹국의 핵우산이니 핵공유가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건 현실성이 없는 공허한 얘기라는 것이다.
일본의 핵무장을 중국은 내심 바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미어샤이머 교수는 그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독일에게 심각한 위협이 아니다”, “가까운 장래에도, 중기(中期)적으로도 독일이 핵을 보유할 필요는 없다”면서 한국과 일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일본도 한국(기사에는 한국국민의 70%가 핵무기 보유를 지지한다는 내용이 있다)도 북한과 중국이라는 두 개의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만일 내가 도쿄와 서울에 있다면 미국의 ‘핵우산’이 충분한 안전보장을 제공하고 있을지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할 것이다. 독일의 현상은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러시아의 핵무기가 독일에 주는 위협은 걱정할 정도가 아니지만 중국이나 북한의 핵무기가 한국과 일본에 가하는 위협은 심각하다는 얘기로 들린다. 이후 토드의 얘기는 중간규모 국가들의 방어적 핵무기 보유 긍정론으로 흐르면서 일본에 대해서도 재래식무기든 핵무기든 무장을 강화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황당하다고 여길 사람이 적지 않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지만, 그는 “일본의 핵무장은 중장기적으로 볼 때 중국과의 신뢰구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중국은 표면적으로는 분명히 거기에 반대하겠지만, 일본의 핵무장은 ‘일본의 대미 자립’을 의미하기 때문에” 내심 좋아할 것이라고 본다. 미국 및 유럽 기득권세력에 매우 비판적인 토드는 아마 한국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것이다.
토드는 일본에게 러시아와의 우호관계 구축을 권고한다. 안보면에서도 에너지면에서도,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의 국익을 위해서도 그렇고 중국견제를 위한 힘의 균형과 세계의 안정을 위해서도 러시아와 손잡는 게 유리하다고 얘기한다. 러시아 편향성이 있어 보이는 그의 말을 가려들어야겠지만, 러시아에 대한 전략적 접근과 관계 재구축은 한국 및 한반도의 미래전략에도 매우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토드는 일본에게 안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심각한 저출산 고령화라며, 모든 ‘선진국’들의 공통문제이자 문명사적 문제이기도 한 그 문제에도 정면대응해야 할 때라고 충고한다. 한국의 저출산 고령화 속도는 일본보다 더 빠르다.
토드의 주장에 동의하든 않든 그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세계에는 다수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흥미로운 ‘생각의 씨앗’일 수 있는 그런 주장에 귀를 막지 말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판단하느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