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표현의 자유 침해" 새벽 기습 철거에 비판 쇄도

‘2023 굿, 바이전 인 서울’ 50여 점 철거

미술계·시민사회·야당 "표현의 자유 말살"

국힘, 민주당 의원들에 항의성 협박 전화

방송인 김어준 “전시 공간 제공하겠다”

2023-01-10     이승호 에디터
고경일 작가 제공

국회 사무처가 윤석열 대통령 부부를 풍자한 그림 등 전시 예정 작품들을 9일 철거한 것에 대해 예술계와 미술계는 물론 야당과 시민사회까지 크게 반발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중대한 사건”이며 “풍자로 권력을 비판하겠다는 예술인의 의지를 강제로 꺾은 사건”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폭력”이라는 비판도 터져 나오고 있다.

애초 서울민족예술단체총연합과 굿바이전시조직위원회는 민주당과 무소속 등 12명의 의원들과 공동주관으로 9일부터 닷새간 ‘2023 굿, 바이전 인 서울’을 국회 의원회관 2층 로비에서 열 예정이었다. 전시할 작품들 중에는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정치권과 언론 등을 대상으로 풍자한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국회 사무처가 9일 새벽 2시쯤 기습적으로 50여 점의 작품을 철거하면서 전시회는 무산됐다.

사무처가 내세운 철거 근거는 ‘특정 개인 또는 단체를 비방하는 행사로 판단되는 경우 취소할 수 있다’는 사무처의 내규였다. 그러나 이 규정을 들이댄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풍자의 대상이 된 대통령과 부인, 정치인 그리고 언론사 등이 과연 ‘특정 개인 또는 단체’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사무처는 ‘문제 있는 작품’만 대상으로 철거한 것도 아니다. 명확한 기준 없이 모든 작품을 일괄적으로, 한꺼번에 철거했다.

 

고경일 작가 제공

‘새벽 기습 철거’의 배경을 두고도 여러 얘기가 나온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공동주관에 나선 민주당 의원들에게 '항의를 넘어 협박성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나 ‘사무처가 국민의힘과 공모한 것 아니냐’는 의심들이다. 

이번 폭력적 철거는 납득하기 어렵고 특히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유린했다는 비판이 각계에서 쏟아지고 있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하고 ‘세 쌍둥이(조중동)'라는 3편의 작품을 내놓기도 한 고경일 작가는 “세계적으로도 의회나 국회에서 미술품 전시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번처럼 작품을 철거하는 폭력은 세계 최초”라고 울분을 토했다. 외국에서는 설사 권력이 작품을 못 마땅해하는 경우에도 흰 천이나 가벽을 세워 전시를 방해하는 정도라는 것이다. 고 작가는 “이번 사태는 ‘아이 납치’와도 같은 ‘작품 납치’”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제 우리나라는 문화예술에 관한 한 문맹국 수준이 됐다”고 개탄했다.

고경일 작가의 '세 쌍둥이 (조중동)' 중 한 작품. 고경일 작가 제공 

박재동 화백은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며 “이명박근혜 정권 때 경험했던 만행이 또다시 반복되고 있다고 한탄했다. 박 화백은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사고 때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을 풍자한 ‘더러운 잠’ 이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걸 다 때려 부수고 그랬다”면서 이번 국회 사무처의 철거를 비판했다

전시회에 ‘기레기’라는 풍자 작품을 내놓은 김종도 화백(전 서울민미협 회장)도 “모든 예술 작품은 사회가 판단해야 마땅한데, 예술과는 전혀 상관 없는 국회 사무처가 자의적으로 정치적 판단을 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김 화백은 “특히 이번 철거 사태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말살한 것이며 위법적 월권 행위를 한 것이기 때문에 국회사무처장 등에게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화백은 “작품을 내놓은 화가들에게는 법적 보상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고경일 작가 제공

 ‘촛불행동’도 9일 ‘문화예술에 대한 폭거를 저지르는 작태,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논평을 통해 “비판과 풍자는 시민의 권리로서 이번 철거 조처는 헌법기관에 대한 심대한 위법 조치”라고 성토하고 “김진표 국회의장과 이광재 국회사무처장은 대국민 사과를 하고 책임지라”고 촉구했다.

정치권에서도 비판이 이어졌다.

민형배(무소속) · 최강욱(민주당) 의원 등은 같은 날 기자회견을 통해 “전시회 취지는 시민을 무시하고 주권자 위에 군림하려는 정치권력, 살아있는 권력 앞에 무력한 언론권력, 권력의 시녀를 자처하는 사법권력을 신랄하고 신명나게 풍자하는 것이었는데 국회사무처는 이를 무단철거라는 야만적 행위로 짓밟았다”며 “국회조차 표현의 자유를 용납하지 못하는 현실이 부끄럽다”고 했다. 김진표 국회의장에게는 “전시회의 정상적 진행을 약속하라”고 요구했다.

국회 사무처가 전시회를 무산시키자 방송인 김어준 씨가 “전시회를 열겠다”고 나섰다. 전시회 장소는 ‘딴지일보’가 있는 서울 서대문구의 한 빌딩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전시회 방식과 날짜 등 세부사항은 전시회 참여 화가 등 관계자들과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굿바이전시조직위원회와 서울민족예술단체총연합 관계자들이 9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작가들의 작품들이 심야에 기습적으로 철거된 것과 관련해 “국회와 사무처가 표현의 자유를 짓밟았다”고 규탄했다. 20223. 1. 9 연합뉴스

한편 지난 2017년 표창원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풍자한 전시를 주관해 정부와 여당이 반발했으나 사무처가 직접 나서 철거하지는 않았다.

지난해에는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고등부 카툰 부문 금상을 받은 ‘윤석열차’에 대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정치적인 주제를 노골적으로 다룬 작품”이라며 만화영상진흥원에 ‘엄중 경고’해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반발을 산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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