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방패막이용 전관 사외이사 더 늘었다

30대 그룹에 229명…1년 동안 14% 증가

검찰·국세청 등 힘 있는 부처 출신이 대다수

사외이사 10명 중 6명 이상 교수·전직 관료

전문성 떨어지다 보니 경영진의 거수기 전락

미국 기업은 사외이사의 전문성·다양성 중시

2025-01-09     장박원 에디터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 기업들은 이사회의 독립성과 함께 전문성과 다양성을 높이려고 힘 쓰고 있다. 반면 한국 대기업들은 사외이사 10명 중 6명 이상이 교수 아니면 전직 관료다. 미국 대기업은 사외이의 80~90%가 기업 경영인 출신이거나 엔지니어, 회계 전문가로 구성된다. 한국 기업도 이사회의 전문역량과 다양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지난해 30대 그룹 계열사에서 관료 출신 사외이사가 2023년에 비해 더 늘었다. 이런 퇴행은 재벌기업들이 거버넌스(지배구조 또는 의사결정시스템)를 개선하기보다는 총수 일가를 비롯한 경영진의 방패막이용으로 사외이사를 활용하는 관행 탓이 크다. 대기업 관료 출신 사외이사의 대다수가 검찰과 사법부, 국세청, 기획재정부, 공정거래위원회 등 이른바 힘 있는 부처에서 왔다는 사실이 이런 현실을 방증한다. 사외이사가 경영진의 거수기로 전락한 것도 전문성 부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회장실 사외이사실 [연합뉴스TV 제공] 연합뉴스

교수와 전직 관료 일색인 재벌기업 사외이사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는 30대 그룹 계열사 중 분기 보고서를 제출한 237개 기업 사외이사 856명의 출신 이력과 역량을 조사한 자료를 9일 공개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관료 출신 사외이사 비중이 1년 만에 14% 증가했다는 점이다. 이들의 역량은 법률·정책 분야에 편중돼 이사회의 다양성 측면에서 더 후퇴했다.

30대 그룹 계열사의 관료 출신 사외이사는 2023년 201명(24.3%)에서 지난해에는 28명 늘어나 229명(27.3%)인 것으로 집계됐다. 사외이사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경력은 작년에도 학계(대학교수)가 차지했다. 비중은 2023년 35.2%에서 35.7%로 증가했다. 반면 세무사와 회계사 출신 비중은 8.7%(72명)에서 6.1%(51명)로, 판검사를 지내지 않고 변호사 이력만 있는 법조 출신은 7.7%(64명)에서 6.0%(50명)로 각각 감소했다. 리더스인덱스는 “바뀐 면면을 대조해본 결과 이들 자리는 국세청 출신과 검찰, 사법부 출신 전직 관료들로 대체됐다”고 설명했다.

 

자료 : 리더스인덱스. 30대 그룹 사외이사 경력 현황

관료 출신 중에선 검찰이 사외이사 비중 가장 높아

관료 출신 사외이사 중 검찰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2023년 36명(17.9%)에서 지난해 48명(21.0%)으로 12명 증가했다. 국세청 출신도 28명(13.9%)에서 41명(17.9%)으로 늘었다. 전직 판사인 사법부 출신 역시 25명(12.4%)에서 4명 늘어나 비중이 12.7%(29명)로 소폭 증가했다. 기획재정부 출신이 16명(7.0%), 공정거래위원회와 산업통상자원부 출신이 각각 9명(3.9%)인 것으로 파악됐다.

사외이사가 대학교수와 관료 출신 위주로 구성되며 이사회 역량이 특정 분야로 쏠리는 현상도 심해졌다. 리더스인덱스가 분류한 8개 분야 중 법률·정책 관련 전문성이 있는 사외이사는 255명(29.8%)으로 2023년 25.5%에서 4.3%포인트 증가했다. 이에 비해 재무·회계는 150명(17.5%)으로 전년 23.8% 대비 6.3%포인트 감소했다. 선진국일수록 중요하게 여기는 ESG(환경, 사회적 책임, 기업지배구조) 관련 분야는 37명(4.4%)에 그쳤다. 여성 사외이사는 전체 856명 중 173명(20.2%)으로 처음으로 20%를 초과했다. 다양성 측면에서 긍정적 흐름이지만 아직까지 전체 이사회의 역량을 높일 정도는 아니다.

 

자료 : 리더스인덱스. 30대 그룹 관료 출신 사외이사 경력 현황.

삼성·신세계·CJ그룹에 유독 많은 관료 출신 사외이사

그룹별로는 신세계가 관료 출신 비중이 73.9%로 가장 높았다. 사외이사 23명 중 17명(국세청과 관세청 7명, 검찰 3명, 감사원 2명, 공정거래위원회 2명, 기타 3명)이 관료 출신이며 법률과 정책 분야 쏠림이 심했다. CJ그룹은 26명의 사외이사 중 15명(57.7%)이 관료 출신으로 그 뒤를 이었다. 관료 출신 사외이사가 가장 많이 증가한 그룹은 삼성이다. 지난해 신규 사외이사 19명 중 13명을 관료 출신으로 선임하면서 삼성 내 관료 출신 비중은 30.5%에서 46.0%로 늘어났다. 삼성의 16개 계열사 사외이사 63명 중 28명(44.4%)이 법률·정책 분야에 집중됐다.

최근 경영권 분쟁 중인 고려아연은 1월 23일 임시 주주총회에서 사외이사를 선임할 예정인데 MBK연합과 고려아연에서 각각 12명과 7명을 추천했다. 양쪽 추천 사외이사의 경력과 전문성을 분류한 결과 MBK연합 측은 법률·정책 분야 전문가가 절반에 가까운 5명에 달했다. 리더스인덱스는 “최근 주요 선진국 상장기업들이 이사회 역량지표(BSM)를 도입해 이사진의 다양성을 강화하는 추세”라며 “사외이사의 전문역량이 다양할수록 지배구조 투명성이 높아지고 기업가치 제고에도 유리하다는 것이 시장의 중론임에도 국내 대기업들은 이러한 국제적 흐름에 역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자료 : CEO스코어. 2023년 주요 기업 이사회 사외이사 안건 찬성률.

“사외이사 전문역량 다양할수록 기업가치 높아져”

BSM은 이사회의 능력과 자질, 다양성을 한 번에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수단이다. 리더스인덱스에 따르면 BSM은 뉴욕시 연기금 등의 권고에 따라 S&P500에 속한 상장사들이 공시를 시작했다. 호주를 비롯한 일부 국가는 이를 의무화했다. 한국 재벌기업 이사회는 학계와 관료 출신이 점령했으나 미국 대기업들은 현직 경영인이나 엔지니어 등 현장 전문가를 중용한다.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시가총액 기준 미국의 100대 기업의 사외이사 900명 가운데 791명(87.9%)이 기업 경영인이거나 금융·회계업계 출신인 것으로 조사됐다. 유명 기업의 경영진이 다른 회사 사외이사를 겸직하는 비중도 30%가 넘는다. 이는 사외이사를 선임할 때 독립성은 물론 전문역량의 다양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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