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너머 마을 3] 마을은, 서로 믿고 함께 나누는 곳

마을의 현주소 : 법, 정책, 제도보다 ‘사회적 자본’부터

2024-12-16     정기석 시민기자
율티마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려는 ‘탄소중립갯벌체험장의 징검다리’

지금, 경상도 남녘 창포만의 작은 어촌마을인 율티마을 바닷가에는 새 바람이 불고 있다. ‘신활력이라는 신바람이다. 2년 전부터 해수부의 어촌신활력증진사업이라는 어촌마을공동체사업 판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어촌 생활플랫폼을 조성하려는 정책목적으로 4년 간 100억 원이 투입, 2026년까지 마을협동조합을 중심으로 마을공유게스트하우스, 마을공유주방, 마을공유세탁소, 마을경로당(요양원) 같은 생활사업을 벌인다.

아울러 마을카페, 마을구판장, 마을휴게실, 마을공방 등의 복합적 문화공간으로 활용될 마을공유가게, 갯벌-우해이어보-남파랑길을 주제로 한 생태어촌체험·휴양마을사업 등 경제사업칠 계획이다.

앞으로는, 물고기나 조개를 잡아서 먹고 사는 게 아니라, ‘문화로 더불어 먹고 살 수 있는 어촌마을공동체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마을주민, 앵커조직, 링커그룹 3자간 사회적 자본이 열쇠

다만, 남은 숙제는 어촌신활력증진사업이라는 정부의 정책적, 제도적 지원이 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100억원 이라는 사업비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 정책, 제도보다는 율티마을의 열쇠도 당연히 신뢰, 규범, 네트워크 같은 사회적자본에 달려있다. ‘어촌신활력증진사업은 사업의 책임자인 마을주민’, 사업의 지원자인 앵커(Anker)조직’, 그리고 사업의 협력자인 링커(linker)그룹사이의 ‘3위 일체에 사업의 성패가 달려있는 것이다.

우선, 38인의 율티 어촌계원을 중심으로 뭉친 율티권역 마을주민 275이 가장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사업이 완료된 후, 2027년부터 온전히 율티마을 주민이 사업 운영을 책임져야 한다.

당연히 협동조합 설립을 준비하고 있고, 협동조합 실무&경영 공부부터 시작했다. 마을의 공동자산을 팔아 출자금과 사업비 자부담도 이미 마련해 놓은 상태다.

이 사업의 계획과 운영을 수탁받은 현장지원센터로서 율티권역 앵커조직, 지난해부터 마을에 상주하며 주민들과 어촌마을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있다. 마치 주민인 것처럼, 주민들과 함께 공부하고 훈련하고 실행하고 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마을주민이 믿을만한 지원자로서 자세와 역량을 더욱 갖추려 애쓰고 있다.

사업의 성공을 위한 3위 일체의 필요충분조건, ‘네트워크 사회적자본를 완성할 링커그룹을 씨줄 날줄로 묶고 엮는 네트워킹 작업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율티권역 사업플랫폼 위에서 서로 협업하고 상생할 경제, 문화, 생태, 교육, 복지, 공동체 같은 각 분야, 각 지역의 전문가그룹을 찾아내 제휴 또는 협업을 해가고 있다.

게다가, 염전을 갈아엎고 들어선 율티공단의 28개 입주기업에 동남아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수백 명의 율티리 생활인구(리퀴드 폴리탄)’가 원주민과 일도 삶도 함께하고 있다.

이 사업으로 링커그룹이 사회를 혁신하는 마을공동체사업의 모범을 함께 실험, 실습, 개발해 인구와 지역 소멸의 위기라는 어려운 문제를 푸는 대안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는 사회학적인 가치와 기대도 크다.

 

유휴농기계창고를 마을사람들의 새로운 일터이자 삶터인 마을미술관으로 재생한 ‘하동 입석리’

, 정책, 제도, 보조금만으로 결코 바뀌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 정부는 각종 정책공모사업을 통해 마을끼리 경쟁을 붙여, 자연발생적 집촌을 계획설정형 마을로 재편성하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농정당국인 농식품부는 물론, 국토부, 행안부, 문화부 등 정부부처끼리 유사한 사업으로 농촌마을과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중복적, 반복적으로 갖가지 지역개발사업을 설계하고 시행하고 있다.

이러한 계획설정형 마을 재편성 작업 또는 농촌지역개발사업은 농촌이라는 공간을 대상으로 지역의 발전을 위해 시행하는 각종 사업들을 일컫는다. 협의로는 주로 정주 측면에서 필요한 적정 수준의 시설과 서비스 공급에 한정되고, 광의로는 농어촌지역의 산업, 환경, 공동체 문제 등 농촌지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개발행위까지 다룬다.

1990년대를 전후해서 농촌지역개발사업의 개념이 다소 변한다. 1990년대 이전에는 농업과 농촌서비스를 근대화해서 낙후된 농촌지역이 도시지역의 수준을 따라잡는 사업개념이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생활환경개선과 같은 사회간접자본(SOC)을 확충하고 문화·복지 서비스를 제공, 지역의 특성을 살려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능케하는 게 사업목적이었다.

가령, 영국의 '농촌백서(rural white paper)' 등에서 규정한 농촌지역개발사업의 목표(Vision)는 농촌지역사회가 활기차고 질 높은 공공서비스를 수행하는 살기 좋은 농촌(living countryside)’, 경제다각화로 높고 안정된 수준의 고용혜택을 향유하는 일하는 농촌(working countryside)', 환경이 유지되고 고양되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보호된 농촌(protected countryside)',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활력있는 농촌(vibrant countryside)' 을로 정해진다.

이른바 한국농촌지역개발사는 2000년대 이전과 이후로 경계를 나눌 수 있다. 2000년대 이전인 1962년 이후 제7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계획, 1972년 이후 제4차 국토개발계획 과정에서 농촌정책 보다는 농산업정책에 편향되었다. 농촌정책은 농업정책의 보조적 역할로 기능, ·면단위 및 마을단위의 생활환경 정비를 물리적 개선 목적의 하향식, 하드웨어(토건) 사업에 집중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참여정부에서 의욕적으로 농업·농촌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모색했다. 정책대상이 농업에서 농업·식품·농촌으로 확대되었다. 무엇보다 다양한 내생적발전전략이 추진되면서 사업의 통합과 예산의 통합이 시도되었다는 사실은 의미가 크다.

시대별로 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1960년대까지는 지역사회개발(CD)프로그램을 중심으로 마을 범위에서 하향식으로 농업지도나 생활환경 개선 등의 사업이 시행되었다. 지역사회개발요강(대통령령), 농촌진흥법, 농업기본법, 농촌근대화촉진법, 지역사회개발법이 마련되었다.

1970년대는 새마을운동으로 대변된다. 마을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 마을범위의 시업이었어나 근본적으로 정부의 일반 하향식 방식을 벗어날 수 없었다. 농업생산 확대, 생산기반 개선, 생활환경 개선, 자원개발 및 소득증대 등을 정책목적으로 내걸었다.

1980년대 들어 종합적 농촌지역개발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마을범위를 벗어나 시·군으로 사업범위를 확대한 하향식, 외생적 성격의 사업추진 방식이었다. 생활환경 개선, 생산기반 개선, 농촌산업화, 농외소득 기반 다양화 등을 목적으로 농어촌소득원개발촉진법, 도서개발촉진법, 오지개발촉진법,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 도서종합개발 농어촌종합대책, 오지종합개발, 소도읍개발, 정주권개발 등 계획설정형 마을을 위한 법률과 정책이 양산되었다.

1990년대에는 읍·면 범위 중심으로 생활환경 개선, 문화·복지시설 확충 등의 단위사업에 중점을 둔 하향식, 단위사업 위주 정주생활권 개발이 활발했다. 농어촌정비법, 농어촌주택개량촉진법, 농업농촌기본법, 어촌종합개발, 산촌종합개발, 산촌생태마을 등의 법률과 정책이 추가되고, 특히 지방정부 차원에서 강원도형 새농어촌건설운동이 시작되었다.

 

지역출판사와 동네책방이 들어서면서 공동체의 온기와 생기가 되살아나고 있는 ‘통영 봉수골’

2000년대 이후 상향식, 내생적 정책패러다임 전환을

2000년대의 정책목표는 복합생활공간 개발 및 삶의 질 향상이었다. 기존의 하향식 일변도 사업추진 방식에서 상향식, 내생적 방식의 정책패러다임 전환이 시도되었다.

마을, 권역, 읍면 단위에 걸쳐 생활환경 정비, 지역특화 농촌자원 개발 및 산업화, 도농교류, 통합적 농촌개발 등 다각적 사업목적을 설정, 지방소도읍육성지원법, 농림어업인의 삶의 질 향상 및 농산어촌지역 개발 촉진에 관한 특별법, 도시와 농어촌간의 교류촉진에 관한 법률, 농어업, 농어촌 및 식품산업기업법, 농어업경영체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 등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어촌체험마을, 접경지역개발, 지역특화품목육성, 아름마을가꾸기, 정보화마을시범마을, 녹색농촌체험마을, 농촌전통테마마을, 소도읍육성, 농촌마을종합개발, 어촌마을종합개발, 문화역사마을, 전원마을조성, 신활력, 지역농업광역클러스터, 농어촌테마공원조성, 거점면소재지마을종합개발, 농어촌뉴타운조성 등 각부처의 다양한 사업이 벌어졌다.

2010년대 이후에는 통합적 농촌개발과 지역간 연계를 목표로 자율적, 네트워크형 마을, 권역, ·, 연계 지역 등에 걸쳐 농촌융복합산업, 지역간 연계 협력사업 등은 물론 심지어 도시재생뉴딜사업, 어촌뉴딜사업 등이 농어촌지역의 주요 거점 읍·면마다 시행되고 있다.

2020년대 이후에는 농촌공간의 체계적·효율적 토지이용이 가능하도록 농촌의 일정 지역을 용도에 따라 구획화(zoning)하는 농촌특화지구 도입, 농촌공간 재구조화 및 재생지원에 관한 법 제정, 일부사업의 지방위양에 따른 농촌공간 전략계획 및 농촌생활권 활성화계획 농촌협약 등이 본격 추진되고 있다.

하향식, 관주도, 토건형 설계모델, ‘한국형 마을의 현주소

그러나, 한국 계획설정형 마을의 현주소, 또는 농촌지역개발사업의 현주소는 선뜻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우선 이른바 한국형 농촌지역개발사업정책이 하향식, 관주도, 토건형 모델로 설계된 오류가 있었다. 한국의 농촌지역개발사업은 1970년대 물리적 환경개선 위주의 개발지향적 새마을운동으로 본격화된 태생적 한계를 안고 시작된 것이다.

1980년대 들어 농촌정주생활권 개발, 농공단지 등 농촌공업화, 소도읍 활성화 등 공업화 패러다임으로 전환되고, 1990년대는 농지제도 폐지, 개발제한구역 해제 등으로 농촌지역 난개발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비로소 2000년대 들어 국토균형발전, 상향 공모식 농촌지역개발사업 등의 전향적 정책이 도입되었으나 때늦은 감이 없지 않고 정책의 개선정도도 충분치 않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중앙정부에 예속된 유사·중복 사업의 주체 간 갈등과 시행착오가 끊이지 않은 게 사실이다. 2000년대 이후 농식품부를 비롯해 농진청, 행안부, 문화부, 국토부 등의 각종 농촌지역개발 유사·관련사업이 중복적으로 양산되면서, 부처 간 헤게모니 다툼, 중앙과 지방의 불협화음, 행정과 주민의 갈등만 야기하며 파행과 시행착오의 사례가 난무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개발이라는 토건적, 전지행정용 관성과 관행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또한 지자체가 중앙정부 예산에만 의존하다보니 타율적인 단기사업에 치중했다. 지역에서는 중장기적인 비전과 전략이 부재한 상태로 단위사업 형태의 단기사업을 반복, 대부분의 사업비를 중앙정부에 의존해 지역별로 독자적, 자율적, 창의적 사업의 계획이나 추진도 사실상 어려웠다.

출렁다리, 커뮤니티센터, 둘레길, 마을벽화, 마을카페, 청년몰 등 기존사업이나 타 지역의 유사사례를 모방하고 답습하면서 단순하고 단기적인 생활기반 및 환경 개선사업 위주의 개별단위 물리적 토건사업에 치중하는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사례가 지역마다 만연하는 이유다.

한국형 농촌지역개발사업사업모델의 한계도 뚜렷하다. 책과 연구보고서와 논문으로만 마을사업을 배운 선무당 연구원들이 만든 사업모델은 마을만들기등 농촌지역개발사업의 취지와 목적을 산업적인 농촌관광지화또는 상업적인 생태공원화등 물리적인 성과물 조성사업과 동일시, 하드웨어 조성 위주의 토건사업에 집중했다.

한국형 농촌지역개발사업시스템의 문제도 심각하다. 상부의 평가용, 외부의 소비용 마을만들기가 아닌 내부인(원주민, 귀농인, 출향인 등)의 생활과 생존을 보장하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사회적이고 생태인 마을살이 또는 마을살리기로 사업의 계획, 추진 시스템 재정립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형 농촌지역개발사업책임운영주체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근본적으로는 지역주민 전문가(마을사업가)를 체계적으로 양성, 일종의 주민직영 자조·자치 중간지원조직이라는 공적 조직에서 사설 전문용역시장의 전문업무를 감당하도록 하는 게 상책일 것이다. 선무당 연구원들과 무지한 공무원들은 이 판에서 빠져야 마땅하다.

 

마을공동체의 신뢰와 규범, 사회적 자본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율티마을 마을 총회

사회적 자본이 없는 마을사업은 백전백패

전통적으로 한국 농촌지역사회에 사회적 자본이 부족하거나 부재한 것은 숙명적 문제다. 한국의 전통적 농촌지역 마을공동체에서는 연대적(결합, Bonding) 사회적 자본과 교량적(연결, Bridging) 사회적 자본이 높게 나타나는데, 이는 마을 사회집단의 연대 의식이 높고 사회집단 간 협동적 관계가 원만하게 지켜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남 : 결합(Bonding) 사회적 자본은 또래, 같은 인종, 같은 종교와 같은 사회화 과정에 동일한 특성들 사이에 생겨나는 사회적 자본으로서, 다인종 사회에서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적 자본, 즉 연결(Bridging) 사회적 자본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농촌지역개발사업을 위한 정부의 각종 지원정책이 시행되면서 마을의 한정된 자원 이용, 개발사업 참여 여부 및 정도, 이익 분배, 개발의 주도권 등을 둘러싸고 마을공동체 및 지역사회 내부에서 반목과 갈등이 표출되곤 한다.

따라서 농촌지역개발사업의 성공적 추진 및 성과를 위해서는 농촌지역사회 및 농촌마을공동체 안에 내재·축적된 사회적 자본의 여부 및 정도부터 스스로, 냉철하게 확인하고 시작해야 한다.

농촌지역사회 및 농촌마을공동체 내부에서 공동체 구성원끼리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고 연대하며.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나누는 한편, 공동체의 규범과 관계망을 형성, 강화함으로써 농촌지역 공동체의 문제 해결과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하는 유무형의 자산으로서 사회적 자본이 법, 정책, 제도보다 선행, 전제되어야 한다.

그 마을 내부에, 그 지역사회에 사회적 자본이 충분히 생산, 축적, 공유되지 않는다면, 계획설정형 마을로 재편성하는 농어촌지역개발사업은 아예 벌이지 말아야 한다. 마을공동체사업에 함부로 나서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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