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 해부④ ] 자존(自尊)의 길, 자비(自婢)의 길
'매국우파'의 허망한 전쟁 시나리오 분석
뉴라이트란 무엇일까? 한국사회 한 귀퉁이에서 유령처럼 떠돌던 뉴라이트가 어느 순간 우리 옆에 와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 들어 정부와 주요 공공기관장의 자리를 꿰차고, 역사를 생뚱맞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시민언론 민들레>는 뉴라이트 연구에 천착해 온 인문연구가 이병권 씨의 글을 연재합니다. 1980년대 역사학도로 운동권에 몸담았던 그는 지금도 역사와 인문학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네 차례에 나눠 게재할 글은 1. 뉴라이트의 탄생과 변질 2. 모든 지원금에는 꼬리표가 있다 3. 무엇을 위한 선택이었을까 4. 자존의 길, 자비의 길입니다.
자존심(自尊心)이 타인과의 경쟁 관계에서 원했던 것을 얻는 긍정적 마음이라면, 자존감(自尊感)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감정의 의미로 쓰입니다. ‘자존감’이란, 주제는 1890년대부터 유럽 심리학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고 합니다. 영어로 자존감은 ‘self-esteem’, 자존심은 ‘self-respect' 또는 'pride'로 표기합니다. 자존감과 자존심 모두 인간의 심리적 영역이지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자존심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즉각적인 감정 반응이지만, 자존감은 자신(자아)에 대해 작게는 체계적인 자기 인식, 좀 더 크게는 나름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이나 집단이 자존심을 세우기는 쉽지만, 자존감을 가지려면, 상당히 축적된 노력과 경험, 그리고 역사적 맥락이 있어야 합니다.
자존감은 무엇보다 주체적 자기 인식을 전제로 합니다. 독립적인 사고가 있어야 하죠. 주체적 인식이란 독립적 사고를, 주체적인 자기 인식입니다. 필자는 우리 민족에게 자존(自尊)의 실체는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 단군(檀君)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같은 역사서에 기록된 기원전 2333년, 천손인 단군이 신단수에 내려와 독자적인 조선(朝鮮)이라는 국가를 건립했으며,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정신으로 세상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그 나라의 역사적 실체가 분명하게 전하지는 않지만, 우리 민족의 정신 안에 단군과 단군의 자손이라는 의미는 그 깊은 통치 원리와 함께 우리 문화, 생활 곳곳에 깃든 자존감의 중심에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한 이유로 일제 강점기에 박은식 선생은 물론, 김교헌. 이회영, 이상룡, 신채호 등 독립지사들은 하나같이 고대사를 연구한 역사가이자 독립투사였습니다. 민족정기와 민족정체성을 회복할 실마리로 단군조선(檀君朝鮮)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일제는 지속적인 식민지 수탈 체제를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 한국인 자존감의 원천을 없애야 했습니다. 자존(自尊)을 대신할, 자신을 비하하는 자비(自婢)의 역사관을 깊숙이 심고자 했습니다. 1925년 설립된 ‘조선사편수회’는 한국인 이병도, 신석호를 앞세워 조선 역사를 왜곡, 비하합니다. 문제는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식민역사학이 이병도와 신석호의 제자들이 장악한 한국 역사학계에서 청산되지 못한 상황에서, ‘뉴라이트(매국우파)’ 세력이 마력을 키우며 급기야 정치권력까지 장악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세력은 독립기념관은 물론,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등 대표적 역사기관장을 뉴라이트 인사들로 채웠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자존(自尊)’의 한국사를 지우고 ‘자비(自婢)’의 노예 역사관을 총독부 시절처럼 부활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존의 길에 서 있는 사람들은 사대주의를 경계하고,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모색했으며, 실용적 외교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자비의 길에 섰던 자들은 한결같이 사대주의의 길에서 개인이나 당파의 이익에 앞장섰고, 실용보다 이념을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강요했다는 점입니다. 조선 숙종 시절 개혁사상가 윤휴(尹鑴)와 송시열(宋時烈)에게서 우리는 그 대척점을 발견합니다. 윤휴는 개혁과 국가의 이익을 고민했고, 성리학을 유연하고 실용적으로 해석하려 했습니다. 또한 경제개혁을 통해 백성들의 복리 증대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송시열과 노론의 대척점에 서 있었다는 이유로 비운에 갔습니다. 그의 정신과 그가 선택한 자존의 길을 뒤 돌아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뉴라이트(매국우파)가 선택한 자비(自婢)의 길이 얼마나 허망한 이념의 틀에 갇혀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윤휴의 길, 송시열의 길
윤휴(1617~16980)와 송시열(1607~1689)은 작은 공통점과 큰 차이점을 드러낸 인물이자 서로 절친했던 절친한 서인(西人)이었습니다. 나이는 송시열이 10살 위였습니다. 병자호란(1637) 직후 송시열은 윤휴의 명성을 찾아 윤휴가 머물렀던 속리산 복천사(福泉寺)로 향합니다. 이 사찰에서나 3일간 열띤 토론을 한 뒤 “30년간의 내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구나!”라며 한탄했다고 합니다. 윤휴는 약관의 나이에 이미 뛰어난 학자로 성장해 있었던 겁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청나라 태종의 무도한 조선 침략과 인조가 당한 굴욕에 비분강개하며 함께 나라를 바로 세우고 북벌(北伐)에 나설 것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후 행보는 정반대였습니다. 윤휴는 자존과 개혁의 길을, 송시열은 오로지 주자를 이념화하고 권력의 획득에 골몰한 노론 수장의 길을 걷게 됩니다.
첫째, 북벌에 진심인 자, 정치적 거래 대상으로 본 자
윤휴는 북벌을 필생의 과업으로 여겨 현종과 숙종 조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주장했습니다. 특히 중국 내에서 지방 호족들의 반란(삼번의 난 등)이 자주 일어나자 이를 기회로 삼아 주변 소수민족의 적극적인 호응을 끌어낸다면, 효종 시절부터 절치부심 키워온 강군 10만으로 중국 선양(瀋陽)까지 너끈히 도모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승리할 수 있는 전쟁을 위해 ‘호포제(양반을 포함해 가진 땅에 비례해 가구별로 조세를 거두자는 제도)’를 도입한 조세개혁으로 민생을 키우고, 총포류를 정비, 개량하며 일종의 전차라고 할 수 있는 병거(兵車)를 제작하는 등의 실질적인 전력 강화에 주력했습니다. 반면, 송시열은 효종 시절 앞에서는 북벌에 호응하면서도, 뒤로는 양반들의 호포제 반대 여론을 등에 업고 전쟁 준비에 필요한 사회경제적 개혁과 제도 정비에 반대합니다. 실질적으로 북벌의 발목을 잡고, 정치적 거래를 통해 서인 세력의 확대에 골몰한 것입니다. 조정 회의에서 밀리면, 유생들을 동원해 반대 집회나 집단 상소를 통해 개혁과 북벌에 반대하는 노회한 정객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숙종 6년에 이르러, 중국 내 반란이 잦아들자, 송시열은 북벌을 시대착오적 허세로 몰아세우고, 서인의 집권을 위해 윤휴를 비롯한 남인들을 거세할 음모를 수립합니다. 그 음모의 결과가 숙종 6년(1680)에 발생한 경신환국(庚申換局)입니다. 숙종 시기 자주 발생한 ‘환국(換局)’은 정권교체를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경신환국은 특히 정치적 참극이었습니다. 당시 남인 영의정이었던 허적을 비롯해 수많은 남인과 왕족이 연루되어 처단됐고 윤휴까지 휘감아 목숨을 빼앗았죠. 오죽하면 남인을 견제한 음모의 주모자인 김석주의 처리를 둘러싸고 서인 세력은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으로 갈라서게 됩니다. 국가의 치욕을 씻고 양난(兩難) 이후 사회개혁을 꿈꾸던 윤휴는 기득권 강화에 골몰한 송시열을 비롯한 기득권세력의 모략에 굴복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북벌은 그렇게 결론이 납니다. 『주역·계사전』에 보면 ‘덕박위존(德薄位尊)’이라 했습니다. 도덕심은 없으면서 지위만 높다는 뜻으로, 인격과 능력을 먼저 갖추지도 않은 채 오직 자신의 출세를 위해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일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아마도 송시열 같은 자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합니다.
둘째, 예송논쟁에서 드러난 송시열의 자비관(自婢觀)
예송논쟁(禮訟論爭)은 조선 역사에서 흔히 조선 조정의 한심한 당파싸움의 일화로 소개되곤 합니다. 식민사학자들이 앞장서 구중궁궐 권력다툼의 소재로 활용하면서 과대포장 합니다. 논쟁의 본질을 보지 않고, 시시콜콜한 궁중 암투만을 과장합니다. 2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에서 누가 죽었을 때, 얼마 동안(3년 혹은 1년)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세세한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본질은 조선 국왕의 왕권을 자주국의 위상에 걸맞게 볼 것인지, 아니면 중국에 예속된 제후국 수준에서 볼 것인지의 문제였습니다. 서인 세력은 인조반정 이후 조선 왕의 지위를 중국 명(明)나라의 제후국으로 천명했습니다. 조선의 왕이 ‘제후 수준’이라면, 명 황제 앞에서 조선의 왕과 신하는 품계의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신하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찾아볼 수 없는, 자주국의 위상 대신 서인이 주무르는 사대(事大)의 신하국(臣下國)을 추구한 것입니다. 왕은 꼭두각시를 세워놓고 서인(노론) 세력이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음모였죠. 사대주의에 기대어 자신들의 뱃속만을 채우겠다는 작태입니다. 반면에 남인과 윤휴가 조선 국왕의 위상을 높이려는 태도는 자주국의 위상을 유지하고 조선 전기처럼 중국과의 적절한 사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견해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논쟁이 처음 벌어진 헌종 시기(1659)에는 서인이 승리했지만, 2차 예송논쟁(1674)에서는 남인이 승리했습니다. 송시열은 국왕의 권위를 낮추는 방향으로 상복 착용 시기의 단축을 주장했고, 남인과 윤휴는 왕의 권위를 높이는 자세를 취하며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쟁 과정에서 윤휴와 송시열은 상대방의 사상적 참모습을 확인하고, 공존하기 힘든 적대세력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셋째, <중용>의 해석을 둘러싼 대립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조선의 집권 세력은 류성룡 등이 주창해 백성들의 큰 호응을 얻었던 개혁 대신 자신들의 기득권 강화를 택했습니다. 전쟁 중에 내걸었던 모든 약속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가중된 조세와 노역이 요구되었습니다. 특히 사대부에게는 인조반정 이후 정치학의 교과서라 할 <중용(中庸)>에 대한 사견(私見)이나 재해석이 일절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기득권세력은 사상적 통제를 통해 기득권 수호를 도모했습니다. 송시열이 이끈 서인(노론) 세력에게 주자(朱子)의 <중용> 해석에 대한 이견은 바로 체제에 도전하는 이단이자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성리학은 이제 학문이 아닌, 이념이자 종교가 된 것입니다. 조선 전기, 이율곡과 이황 시대의 자유로운 성리학 논쟁 시기는 종말을 고하고 사상통제와 유일 이념으로 주자의 해석만이 강요되었습니다.
윤휴는 주자를 대하는 태도가 서인(노론)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주자가 살았던 시기 이전인 진(秦), 한(漢), 당(唐)나라 시대의 경서(經書)와 주석을 널리 읽고 참고해 자신의 학문과 사상적 굴레를 넘어서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혹자는 독자적인 성경해석으로 종교혁명을 이끈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ion Luther, 1485~1546)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주자의 <중용> 해석에도 과감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주자가 기술한 중용 해석의 최고 권위로 꼽히던 <중용장구집주(中庸章句集註)>를 새롭게 해석한 것이죠. 윤휴는 <중용>에 대한 지나친 형이상학적 해석을 비판하며, 일상으로 끌어내리려고 했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다루고 있는 경전의 내용조차 굳이 복잡한 형이상학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의 격렬한 비난과 상소가 빗발쳤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아는 ‘빨갱이’와 같은 의미의 사문난적으로 윤휴를 몰아세웠습니다.
사문난적은 유교를 뜻하는 사문(斯文)이념에 반대하는 사람이나 사상을 공격할 때 동원된 용어입니다. 고려 말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생긴 용어입니다. 조선 시대 성리학이 국시가 되면서 반역자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조선 명종 중반인 1560년경부터 사림파가 조정을 장악해 나가면서 정적을 매장하는 데 악용되었습니다. 성리학이 교조화된 조선 후기 사문난적으로 몰리는 것은 사회적 매장 또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윤휴는 때마침 불어닥친 경신환국(1680)의 피바람 앞에 마녀사냥에 내몰렸고 결국, 사약을 받고 스러지게 됩니다. 송시열에게 윤휴는 단순한 정적이 아니었습니다. 노론의 핵심 회원인 남기제(南紀濟)가 쓴 노론(老論)의 당론서 <아아록(娥我錄, 1849)> 권 2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윤휴의 발언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인 가장 큰 이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천하의 허다한 이치를 어찌 주자 홀로 알고 나는 모르겠는가.” 또 윤휴가 말하기를 “주자가 다시 온다면 나의 학설이 억눌리겠지만, 모름지기 공자와 맹자가 다시 돌아온 연후에는 나의 학설이 이길 것이다.” 송시열은 윤휴를 반드시 죽여야 할 명분에 대해 자신의 <우암연보(尤庵年譜)>에서 다음과 같이 일갈하고 있습니다. “주자가 모든 이치를 밝혀놓았는데, 윤휴가 감히 자기 소견을 내세워 억지를 부리니 진실로 사문난적이다.” 윤휴는 북벌을 추진했고, 경제개혁을 주창했으며, 주자의 해석에 도전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서인 집권 세력에는 눈엣가시였습니다. 송시열은 여러 번 윤휴를 종용하며 전향(?)을 회유했지만, 윤휴의 개혁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정적을 제거한 서인 세력은 일시적으로 남인에게 자리를 내주지만, 노론의 위세는 세도정치를 거치며 조선을 멸망으로 이끈 주역이 됩니다. 일제에 조선을 팔아넘겨 작위를 받은 자의 87%가 노론이었고, 노론의 마지막 당수가 이완용이었습니다. 혹자는 윤휴를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모험주의자이자, 독선가로 매도합니다. 처세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윤휴는 자존(自尊)의 길에서 타협이나 권력의 단맛보다는 어쩌면 <중용>이 남긴 군자의 길에 가장 가까이 가고자 분투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송시열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려 고초를 겪은 당대 지식인은 윤휴만이 아니었습니다. 허욱(許頊)(1595-1682)은 주자학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아 사문난적으로 몰린 남인(南人)의 대표적인 학자로, 후일 이익과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학풍을 만든 인물입니다. 또한 윤증(尹拯)은 소론의 영수로 송시열에 반기를 들었다가 사문난적으로 몰려 고초를 겪었습니다. 박세당(162-1703)은 주자학과 특히 송시열을 비판하다가 유배를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습니다. 박세당은 실용적인 경제와 외교를 추진해야 함을 강조했고, 무위도식하는 양반을 매섭게 질타했다고 합니다. 이들 모두는 송시열과 대척점에 있었고, 역사는 억울하게 사문난적의 낙인을 받은 이들을 통해 송시열과 노론의 죄업을 분명히 새기고 있습니다.
흔히 논하는 ‘조선 노론 300년’은 인조반정(1623년)부터 국권피탈 시기를 말합니다. 국권피탈에 공을 세워 일본 귀족 지위를 얻은 노론의 후예들까지 이어지죠. 송시열은 노론의 우두머리로 당대 최고의 권세를 누렸으나, 윤휴 사망 9년 뒤인 1689년(숙종 15년) 노론 세력이 일시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은 ‘기사환국’ 때 사약을 받았습니다. 윤휴와 송시열, 둘 다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누가 역사의 승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윤휴와 송시열의 ‘자존’과 ‘자비’의 전쟁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식민사학과 뉴라이트의 얼굴을 하는 이들은 또 다른 자비의 역사관으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진부한 ‘생존 협박’
2024년 현재, 한국 사회는 뉴라이트라는 ‘신종 사대주의’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약자는 강자의 힘에 기대어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고구려와 같이 중국의 대국들과 맞서 싸울 역량이 있다면 과감히 쟁투할 일이지만, 국가의 위세가 그만 못하다면, 적당히 조공도 바치고, 허리도 굽혀 예를 표합니다. 고려의 8대 국왕 현종(992~1031)은 가장 현명한 사대(事大)를 한 황제로 꼽힙니다. 당시 동북아 최강국이었던 거란(요나라)과 25년간 3차에 걸친 고려-거란전쟁(993~1018)의 최종 승자가 되었음에도 거란은 물론, 송나라에도 사대의 예를 표하며 원만한 외교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건실한 국방력을 바탕으로 철저히 중립 외교를 취하며 친선교류를 확대해 나갔습니다. 이후 고려는 몽골의 침략 이전까지 약 110여 년간 최전성기를 구가합니다.
‘사대’ 문제의 핵심은 사대하는 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면서 수단이나 도구로 사대를 활용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스스로 노예의 길을 선택하는가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노예는 정체성도, 선택권도, 스스로 성장할 길도 허용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당연히 생살여탈권이 노예의 주인에게 있죠. 우리는 이런 국가를 식민지라 부릅니다. 식민지를 통치하는 제국의 정체성은 오로지 식민지를 수탈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유지됩니다. 제국주의입니다. 다행히도 우리의 선조들은 수천 년 동안 한반도를 기반으로 ‘주체적 생존’의 삶을 위해 끊임없이 분투해 왔습니다. 필자는 앞서 예시한 경신환국(1680) 이후 노론의 성리학이 체제를 지키는 종교가 되고, 그들의 사대주의가 신앙이 되면서부터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근본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판단합니다. 노론 집단이 조선의 패망을 이끌었고, 조선의 정체성을 무너뜨린 ‘식민사관’의 앞잡이가 됩니다. ‘조선사편수회’의 이병도, 신석호가 그들입니다. 이제 그들은 없지만, 그 후예들이 뉴라이트(New Right)의 탈을 쓰고 ‘노예의 찬가’를 부릅니다. 그 찬가의 노랫말이 바로 안병직, 이영훈 등이 쓴 ‘식민지근대화론’입니다. 이들의 목적은 다시 ‘노예의 길’입니다. 이들이 그 길을 어떤 논리로 포장하여 시민을 협박하고 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예정된 전쟁’이라는 시나리오
1980년대 후반, 동유럽과 소련의 몰락은 냉전의 양극 체제를 미국 중심 일극 체제로 변모시킵니다. 체제 경쟁의 브레이크를 잃은 자본 만능주의,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전 세계를 강타합니다. 세계를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로 묶고, ‘시카고 보이즈(Chicago Boys)’의 주도로 자본의 자유 이동과 증식을 옹호하면서 남미를 비롯한 개발도상국의 경제를 초토화하고 그 과실을 빨아들이게 됩니다.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른 중국이 2010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합니다. 중국의 비약적인 성장은 미국과 유럽 국가들을 긴장하게 합니다. 제국은 협력자는 용납하지만, 경쟁자의 도전을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군산 복합경제 체제는 바로 그 경쟁국을 상대로 더 많은 군사적, 경제적 이익을 추구합니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그레이엄 엘리슨(Grahme Alison, 1940~ )의 대표 저작으로 꼽히는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 2017)>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출간되어 미국 매파 정치학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미국과 중국의 피할 수 없는 전쟁을 예고했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중국을 강력히 봉쇄해야 하는 명분을 제공했고, 한국 뉴라이트(매국우파)는 이를 한‧미‧일 동맹의 이론적 출발점으로 간주합니다. 엘리슨은 지난 500년간 지구상에서 발생한 주요 전쟁 15개를 분석하면서, 대부분의 전쟁이 최강국과 그 지배권에 도전하는 강력한 도전자 간에 필연적으로 갈등이 발생하여 전쟁으로 귀결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또 미국과 중국은 정치, 경제, 문화,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대치하며 긴장도를 높이고 있어서 언제일지 몰라도 전쟁이 필연적이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합니다. 엘리슨은 한국에도 여러 번 방문한 바 있는데, “한국은 미국의 편에 바짝 붙어 서서 다가올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라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자, 미국 패권주의자)들은 이런 점에 착안하여 다양한 전쟁 시나리오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필연적인가?
엘리슨의 책에 나오는 ‘투기디데스의 함정’은 새로 부상하는 세력과 기존 지배 세력의 갈등이 전쟁으로 귀결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투키디데스는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로, 페르시아 전쟁 이후 새로운 해양 강국으로 부상한 아테네와 기존의 최강국 스파르타와의 전쟁 과정과 결과를 상세히 기술했죠. 전쟁은 ‘결국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발생한다고 엘리슨은 분석합니다. 두 경쟁국은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상황을 관리하고 도덕적 책무를 갖지만, 미국과 중국은 서로 원치 않더라도 전쟁에 내몰릴 것으로 전망합니다.
그러나 엘리슨의 분석과 예상 시나리오는 현실의 세계질서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세계질서 자체가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에서 다자체제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제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둘째, 세계 각국은 이념이나 진영 중심의 정치적 이유 보다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합니다. 미국의 동맹국인 프랑스나 독일, 이탈리아 지도자는 수시로 중국을 방문해 이해관계 증진에 골몰합니다. 미국조차 세계의 공장이나 가장 큰 시장인 중국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엄포를 놓고, 관세를 높이거나, 봉쇄를 말하지만, 뒤로는 경제협상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셋째,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인도 브라질 사우디아라비아 멕시코 등 개발도상국 연합체)’ 진영은 과거 비동맹권의 전통을 이어가며 균형자 역할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글로벌 사우스와의 관계를 증진하면서 미국과 유럽을 견제합니다. 무엇보다 중국이 미국과 1위 쟁탈전을 벌일 의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1, 2위 간의 서열 정리와 공존을 통한 상호발전의 길을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긴장과 갈등 속에서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국제관계이고 보면, 긴장 관계가 곧바로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과장할 이유는 매우 적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국제 갈등과 전쟁으로 먹고사는 미국 군산복합체들의 도발적 역할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미국과 중국은 생산과 소비, 수출과 내수 모두에서 상호 깊이 의존관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 필요악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그 함정이 현실화하길 염원하는 자들의 희망이자 환상이 아닌지, 그러한 위기론 속에서 취할 이익에 진정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지 주목해야 합니다.
한‧미‧일 동맹을 원하는 속내
주변의 보수적인 인사들과 대화하면서 한‧미‧일 3국 동맹을 주장하는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첫째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입각한 미‧중 간의 필연적인 전쟁론입니다. 둘째는 중국의 몰락론입니다. 중국은 체제의 내적 모순과 미국과의 경쟁, 소수민족 문제 등에 의해 필연적으로 몰락, 분열한다는 주장입니다. 셋째, 북한 정권의 몰락론입니다. 북한 역시 낙후된 경제 현실과 정체 체제와 세습 체제의 피로감 및 비효율적 경제 운영으로 결국 주민 반발로 몰락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곧 다가올 미래의 모습인 양 이러한 시나리오에 대한 확신을 드러냅니다. 1999년, 지구의 종말을 주장했던 자들의 종말론적 공포심이나 종교적 신념도 얼핏 느껴집니다.
이들의 주장이 그럴듯하게 포장됐더라도 진앙을 찾아보면, 객관적인 국제관계 분석이나 사회과학적 준거의 틀, 현실적 데이터, 각 주장의 구체적인 인과관계를 결여한 그들만의 주장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유포하는 다수가 뉴라이트(매국우파) 진영이거나, 극우 유튜브 동영상 제공자거나, 심지어 유명 대형교회 목회자들로부터 연유했다는 점입니다. 앞서 소개해 드린 엘리슨과 같은 학자들의 주장을 필요에 따라 편집하거나 트럼프 등과 같이 분열과 혐오를 조장하는 정치인들의 주장도 퍼 나릅니다. 객관성과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시나리오는 신념이나 신앙의 범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중국이나 북한이 쉽게 몰락할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현실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실을 오도합니다. 민중 봉기로 체제나 국가가 전복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죠. 더욱이 민중 봉기로 체제가 바뀌어도 수많은 반동과 또 다른 정치변혁을 거칠 수밖에 없음을 우리의 현대사에서도 봅니다. 더욱이 현 윤석열 정부는 미‧일 추종 외교전략으로 중국, 러시아, 북한을 적으로 돌려 스스로 고립됨으로써 실리를 잃는 최악의 외교전략으로 국제적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균형과 실리를 상실한 외교정책은 필연적으로 고립과 퇴락을 수반합니다.
미‧일 편중외교는 대한민국의 퇴락과 미‧일에의 종속을 가속할 뿐입니다. 어쩌면 퇴락과 종속의 길이 바로, 뉴라이트(매국우파)의 진정한 소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봅니다. 미‧중이 전쟁을 하면, 한국의 살길은 오로지 미국 편에 꼭 붙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동북아의 나토를 만들어 중국-러시아-북한에 대항할 한‧미‧일 동맹을 맺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일본과 강력한 군사동맹을 맺어야 하고, 유사시에 일본 자위대가 한반도에 잠시 주둔하거나, 독도를 일본과 공유한들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일본과 손잡고 ‘신 대동아공영권’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 우리가 살길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저는 뉴라이트(매국우파)의 내심이 이럴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들은 오로지 자본주의 가치를 극대화하여 국가의 시장 개입은 최소화하고, 국유재산도 매각하여 민영화하고, 복지는 대폭 축소하고, 있는 자가 더 많이 갖고, 능력 없고 경쟁력 약한 시장 낙오자들은 최소한의 생계만 유지하면 된다는, 그것이 능력에 맞게 사는 공정한 세상이라고 믿는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자들입니다. 일본의 이익을 곧 자신들의 이익이라고 믿는 사람들, 일본과 손잡고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새로운 대동아공영권을 꿈꾸는 자들이죠. 그렇게 하려면 국민의 역사의식을 마비시키고, 일본의 국권 침탈을 찬양하며, 독립운동을 비방해야 합니다. 독립지사들을 테러리스트라고 폄하시키고 민주주의의 반역자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해야 합니다.
자존(自尊)의 길은 어려운가?
자존감을 높인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났든 못났든, 능력이 출중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자존적 역사관 또한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시련을 겪고 굴욕을 당했어도 이에 굴하지 않고 5000년 동안 한반도를 근거지로 민족성을 지켜온 자랑스러운 순간과 비운의 순간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늘의 시점에서 자신의 판단과 능력으로 당당히 살아가고자 분투하는 가장 현실적인 역사관입니다. 자비(自婢)의 길은 그야말로 노예의 관점에서 자신을 비하하고 강자에 굴종하며, 강자가 던져주는 먹잇감에 일희일비하는 굴종의 삶입니다. 역사를 ‘자비’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영원히 강대국에 사대하는 길만이 옳을 것입니다. 저는 뉴라이트(매국우파)의 자세와 역사관이 바로 이 ‘자비’에서 출발했다고 판단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선조, 자신의 역사를 항시 강자에 빌붙어 연명한 자로만 보는 자의 사고에서 자신만의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동력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뉴라이트의 개막을 알렸던 주사파 전향자들은 한국의 현실을 냉철히 분석하여 그 속에서 변혁의 동력을 찾지 못하고 북한의 주체사상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보고자 했습니다. 일본 ‘중진 자본주의’를 통해 ‘식민지근대화론’을 만들어 낸 안병직과 이영훈 등도 일본의 ‘도움’에서 조국 근대화의 뿌리와 동력을 찾았습니다. 자신을 자비(自婢)한 것입니다. 그리고 미‧중 전쟁론과 중국 붕괴론에서 살길을 찾고자 하는 뉴라이트 수뇌부 역시 미국과 일본에 빌붙어 자신들의 영화를 꿈꿉니다. 자신을 철저히 노예로 만들어 자신들만의 영달을 추구합니다. 이들의 꿈이 이루어진다면, 이들은 일제로부터 귀족작위를 받았던 매국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다시 선택해야 합니다. 자존(自尊)의 길을 갈 것인가, 자비(自婢)의 길을 갈 것인가. ‘자존’의 길을 선택한다면 어떻게 ‘자비’의 길을 끊어낼 것인가. 법과 제도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