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 주변의 뱀(편견)을 ‘훠이훠이’ 쫓아내려는 영화
[오동진 칼럼] '딸에 대하여' 톺아보기
자신이 겪는 차별과 딸이 겪는 차별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의 문제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소설가이자 문필가인 부희령은 『가장 사소한 평범』이란 책을 냈지만 사실 이 제목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평범의 전제는 오히려 꾸준히 비범해야만 한다는 점을 역설하는 것이다. 사소한 평범을 누리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참고, 기다리며, 용서하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근데 그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영화 ‘딸에 대하여’의 엄마 오주희 여사(오민애)와 오랜만에(7년 만에) 집에 들어와 하룻밤을 자고 일어난 딸 그린(임세미) 간의 아침 대화가 그렇다. 둘은 전세 대출 얘기로 신경줄을 세운다. 딸은 엄마가 살고 있는 집의 2층을 전세에서 월세로 돌려 그 돈을 자신한테 꿔 달라고 하는 중이다. 이런 대화가 만약 사소한 평범이라면,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매우 난공불락의 어려운 일임을 보여 준다.
영화 ‘딸에 대하여’는 기본 컨셉이 '차이(差異, difference)'이다. 엄마와 딸은 성정체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엄마는 딸이 7년간 동거하는 레인(하윤경)이란 여성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동성애는 그녀의 인생수첩엔 없는 말이다. 엄마는 딸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남자를 만나서 살고, 아이를 낳고 살기를 원한다. 또 한번 ‘평범’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엄마 오 여사는 자신의 성적 차별 의식과 편견을 자기가 일하는 공간에서만큼은 이상하리만큼 완전히 잊어 버린다. 그녀는 요양 간호사이고 자신이 돌보는 사람은 이제희라는 할머니(허진)이다. 한때 사회복지재단의 이사장이었고 좋은 일을 엄청나게 많이 했지만 지금은 연고자가 없는 치매 노인일 뿐이다.
오 여사가 일하는 요양원(요양사들은 서로를 여사라고 호칭한다)에서는 이제희 할머니의 문제를 놓고 난감해한다. 오 여사가 이제희 할머니를 지나치게 과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인 엄마 오 여사는 요양원에서 할머니를 돌보는 문제를 놓고 큰 차이를 나타낸다. 그녀는 요양원 권 과장(이창훈)에게 “그 어르신한테 이렇게 하시면 안되잖아요?”라고 항의한다. 권 과장은 “그렇게 하면 되는 어르신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며 현실을 직시하라고 맞받아친다. 그러나 오 여사, 곧 엄마는 딸이 동성 연인과 동거하는데다 강사로 일하는 학교에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임용에서 탈락한 동료 강사를 위해 시위를 벌이는 것을 인정하거나 용납하지 않는다. 그때의 엄마 논리는 이것이다. “너는 내 딸이니까!” 자신이 겪는 차이와 차별과 딸 아이가 겪는 차이와 차별이 사실은 같은 것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직장에서 겪는 사회 모순, 딸 주변 문제에서는 인정 못 하는 엄마
이것은 마치 막심 고리키의 위대한 소설 『어머니』와도 같은 이야기 구조일 수 있다. 어머니 닐로브나는 수공업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는데, 사회주의 혁명을 한다며 쫓기는 아들 빠벨을 이해하지 못한다. 노동자이면서도 노동 현실의 개혁 이데올로기가 지닌 진정성과 방향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이상한 차이는 아들의 고난을 보면서 점차 자신의 노동 혁명성을 깨달으면서 좁혀진다. 차이는 공감과 동화, 연대로 매듭지워지는 것이다.
차이를 컨셉으로 하는 영화는 극이 흘러가면서 그 차이를 점점 좁혀가는 이야기 구조를 지향한다. 엄마 오주희 여사는 자신이 직장에서 겪는 모순된 사회문제를 딸의 사회적 이슈로 여간해서는 연결시키지 못한다. 영화를 만든 이미랑 감독은, 상업영화라면 금새 둘 간의 화해나 동화의 계기를 마련하기 십상이겠지만 자신의 생각엔 그것도 판타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오주희 여사의 캐릭터는 그래서 비교적 끝까지 답답하게 이어진다. 특히 표정이 여간해선 풀리지가 않는다. 엄마는 딸 아이의 데모가 지닌 사회적 중요성이 크든 작든, 그건 자신의 딸이 나서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런 일’은 다른 사람이 하면 되는 일이다. 엄마는 딸에게 말한다. “내가 너에게 뭘 그렇게 잘못했니? 뭘 잘못했길래 이렇게 엄마 속을 썩이니?”
그러나 여자는 자신이 일하는 요양보호소 책임자들이 이제희 할머니와 자신에게 행하는 부당한 처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노한다. 공적인 분노는 그렇게 사적인 분노와 만나지 못한다. ‘가장 사적인 평범’이 존재한다고 믿고 그걸 지키려 한다. 그러나 공적인 분노를 풀지 않으면 사적인 분노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그 역(逆)도 마찬가지이다. 오 여사는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요양 간호사로 일하지만 동사무소에서는 그녀가 대학 졸업자라며 취업이 오히려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용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대학 교육을 받았음에도) 그 변증 이론의 실현이 매우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 그걸 체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계급배반의 문제는 차이가 공감과 연대로 변화될 때 없어져
가장 어려운 계층의 사람들이 가장 보수적인 정치인을 지지하는 계급 배반 현상은 그 같은 인식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미국 ‘러스트 벨트’의 사람들, 공장 노동자들이 트럼프가 당선되면 자신들이 더 부자가 된다고 생각한다. 한때 우리들 중 상당수가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면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란 은행 광고가 현실화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영화 속 엄마는 딸이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실로 비범한 행동의 실천들을 해 나가야 함을 깨닫지 못한다. 평범은 비범하려는 노력, 현실을 고쳐 나가려는 비상의 노력이 축적돼야 한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영화 ‘딸에 대하여’는 딸이 지닌 성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숱한, 못난 엄마들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마구 공격하거나 비난하는 내용이 아니다. 딸은 그런 엄마를 밉상 취급하더라도, 딸의 파트너이자 딸의 남편이고, 딸의 아들과 같은 동성 파트너 여성은 끊임없고, 꾸준하며, 무엇보다 차분한 말투로 늙은 엄마를 설득하려 한다. 세상의 변화는 한 번의 뒤집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설득과, 또 설득과, 또 설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치매가 점점 심해지는 이제희 할머니는 어느 날 병실 침대 위에서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바닥에 뱀이 기어 다닌다고 소리를 지른다. 오 여사는 그런 할머니를 진정시키려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러다 여사는 창문을 열고 할머니와 호흡을 맞춰 (없는) 뱀을 훠이훠이 몰아낸다. 딸의 동성 파트너 레인은 레즈비언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 엄마에게 ‘창문을 열고 훠이훠이’ 그 편견을 몰아내려 애쓴다. 그 상관과 인과의 관계를 시나리오로 잘 엮어낸 작품이다.
영화의 뒷부분이 좋다. 무연고 할머니의 영안실에서 엄마는 살포시 잠이 든다. 귓가에는 딸 ‘부부’와 친구들이 나누는 담소가 두런두런 들린다. 엄마가 잠든 영안실 방은 반쯤이 열려 있고 그 건너로 조문객 친구들과 딸, 딸의 동거 파트너의 모습이 잡힌다. 이제 엄마와 딸은 한 공간에서 비로소 평화롭게 같이 지내게 됐음을 보여준다. 그 긴 싸움과 갈등 끝의 평화로운 두런거림과 모습이 좋다. 감독이 오랜동안 구상해 왔거나 어쩌면 이 이미지 한 컷으로 영화의 모든 장면을 구축해 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사회 이슈의 해결은 신(新) 여성가족주의에서 비롯될 수도
영화는 종종 한 컷의 발상으로 만들어진다. 영화의 진정한 반짝임은 그 같은 한 번의 영감에서 나온다. 엄마와 딸, 할머니, 딸의 동성 파트너 넷이 빵을 먹는 장면 역시 아마도 이미랑 감독 같은 세대의 여성이 꿈꾸는 ‘여성 가족의 탄생’의 모습일 것이다. 남성의 부재.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기초는 일시적이나마 남성과 남성성을 제거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딸에 대하여’는 이 땅의 모든 사회적 편견과 그로 인한 갈등에 대해 성찰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1980년대 겪었던 정치와 노동의 이슈는 21세기인 이제 사회 내 모든 소수자들에게 쏟아지는 오해와 편견의 이슈로 전환됐음을 보여준다. 정치적 민주화는 성소수자나 노동의 소외를 겪고 있는 모든 생활 노동자들이 가진 문제의 해결에서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늘 얘기하는 것이지만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변증은 구체적이다. 세상을 구하려면 당신의 딸부터, 단 한 사람의 인권부터 구해내야 한다. 딸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처럼. 이 땅의 모든 어머니와 그 딸들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