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빈틈에…재벌 꼼수승계 신종수단 된 ‘RSU’
주식 기반 성과 보상 약정의 35% 이상 차지
공시의무 외 조건, 절차, 대상 등 규제 없어
한해 147건…한화·에코프로는 2세에게 줘
사주 일가에 장기 성과 보상하는 건 ‘난센스’
스톡옵션처럼 총수 일가에 부여 금지 필요
재벌기업들이 주식 기반 성과 보상 방식 중 하나인 양도제한조건부주식(RSU)을 경영권 편법 승계 수단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자산 5조 원 이상 대기업집단의 주식지급 거래 약정체결 현황을 보니 5곳 중 1곳은 총수나 친족 임원에게 성과 보상 등을 목적으로 주식을 지급하는 약정을 맺었고 이 가운데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주식을 받는 RSU가 가장 많았던 것이다.
재벌 총수 편법 승계·지배력 강화에 악용되는 RSU
RSU는 특정 가격으로 주식을 살 수 있는 권리인 ‘스톡옵션’(주식 우선매수권)과 달리 일정 기간 매도를 막은 뒤에 약정된 조건, 즉 성과를 달성하면 주식을 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제도다. 단기성과에만 매달리는 스톡옵션의 부작용을 보완하기 위해 2000년대 초 미국에서 도입됐다. 지금은 스톡옵션을 대체할 만큼 널리 활용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한화그룹이 2020년 처음으로 도입했고 두산과 네이버, 쿠팡 등 여러 기업이 이 보상제도를 활용 중이다. 최근에는 에코프로가 성장의 과실을 나누겠다며 임직원에게 연봉 15~20% 수준 RSU를 지급하겠다고 했다.
RSU는 중장기 성과를 달성했을 때만 지급하는 것이라 스톡옵션보다 합리적일 수 있다. 문제는 부여 조건과 절차, 대상 등을 꼼꼼하게 규제하는 스톡옵션과 달리 공시 의무 외에는 별다른 규정이 없다는 점이다. 예컨대 스톡옵션은 '의결권 없는 주식을 제외한 발생주식 총수의 10% 이상을 보유한 주주, 회사 주요 경영사항에 대한 사실상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 및 그 배우자와 직계존속'에게는 부여할 수 없다. 사실상 총수 일가를 제외한 것이다. 이에 반해 RSU는 대상에 제한이 없다. 대주주와 총수 일가 등 특수관계인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부여 절차도 간단하다. 일정 수량에 대한 포괄적 이사회 결의만 있으면 되고, 개별 부여 건은 대표이사가 결정한다. 부여 한도 역시 제한이 없다.
대기업 88곳 중 17곳이 총수 일가에 주식으로 성과 보상
현행법상 촘촘한 규정이 없다 보니 총수 일가의 경영권 승계가 발등의 불인 재벌기업들은 RSU를 활용할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1일 공개한 ‘2024년 공시대상기업집단 주식 소유현황’을 보면 이런 징후가 엿보인다. 총수(동일인)·친족·임원에게 성과 보상 등 목적으로 주식을 지급하기로 약정한 방식 중에 RSU가 가장 많았던 게 단적인 예다.
공정위가 올해 5월 기준 자산 5조 원 이상인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지정된 88개 기업집단과 그 소속 회사 3318개 사를 분석한 결과 총수(동일인)·친족·임원에게 성과 보상 등 목적으로 주식을 지급하기로 약정한 공시대상기업집단은 17곳에 달했다. 전체 공시대상기업집단의 19.3%으로 대기업 5곳 중 1곳이 주식 보상을 통해 지배력을 높이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정위가 명시한 17개 기업은 SK와 현대자동차, 포스코, 한화, 신세계, KT, 카카오, LS, 두산, 네이버, 세아, 에코프로, 두나무, 아모레퍼시픽, 크래프톤, 대신증권, 한솔 등이다.
한화·에코프로는 총수 2세에 RSU 주는 약정 체결
대기업의 주식 지급거래 약정 체결 현황은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이번 조사에서는 스톡옵션과 주식 대신 현금 지급한 약정은 공시되지 않아 분석 대상에서 제외됐다. 공정위는 지난 4월 대규모기업집단 공시 매뉴얼을 개정해 주식 지급거래 약정에 대한 구체적인 사안을 연 1회 공시하도록 했다. RSU를 비롯한 다양한 유형의 양도제한조건부주식 제도가 총수 일가의 꼼수 승계를 통한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으니 투명한 정보 공개가 필요하다는 비판이 제기된 데 따른 것이다.
공정위 조사 결과 대기업집단의 주식 기반 성과 보상의 전체 약정 건수는 417건이었으며 RSU이 147건(35.25%)에 달했다. 단기 성과급을 주식으로 지급하는 약정인 스톡그랜트는 140건, 연봉의 일정 비율을 주식으로 지급한 뒤 성과 목표에 연동해 최종 지급액을 정하는 성과조건부주식(PSU)은 116건이었다.
계약 체결 건수는 SK가 231건으로 가장 많았고 두산(36건), 에코프로(27건) 등의 순이었다. 총수 일가에 주식 지급약정을 체결한 대기업집단은 한화·LS·두산·에코프로·아모레퍼시픽·대신증권·한솔 등 7곳이었다. 이중 한화·에코프로는 총수 2세에 RSU를 부여하는 약정을 체결했다. 공정위는 “RSU 자체가 위법은 아니지만 경영권 승계의 간접적 수단으로 활용되지 않는지 등을 지속 감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총수 포함 이사 보수제도 객관성·투명성 높여야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 3월 RSU가 규제의 사각지대에 있어 재벌기업을 중심으로 편법 승계에 악용하거나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지배주주를 포함해 이사의 보수제도에 대한 규제가 명확한 미국과 달리 한국은 이사 보수제도의 객관성과 투명성이 미흡해 RSU가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다는 게 보고서의 요지다.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미국은 RSU를 직접 규제하지 않으나 독립적인 보수위원회 운영과 임원 보상에 대한 주주 승인 제도(Say On Pay), 임원 보상과 재무성과 사이의 관련성에 대한 객관적 지표 공시, 과도한 보상 회수장치 등으로 이사 보수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상법에 관련 규정이 있으나 주주총회에서 보수 한도만 정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이사회에서 정한다. 지배주주의 뜻에 따라 성과 보상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RSU가 국내에서도 주식 기반 성과 보상제가 정착하려면 악용 소지를 줄일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국회입법조사처는 강조했다. 무엇보다 부여 조건과 절차, 대상 등을 법제화해 명확한 기준을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 미국처럼 이사 보수제도를 촘촘하게 규제하거나 스톡옵션과 같이 총수 일가에게는 부여하지 못하도록 막는 방안이 있을 것이다. 국회입법조사처는 “RSU 같이 새로운 제도가 인재 확보 수단과 효과적인 성과 보상 방식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주식 기준 보상제도 전반과 이사 보수제도의 정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