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액주주 등치는 두산 합병…국민연금, 반대로 기우나
SK 이노·E&S 합병안 반대…두산은 더 악질적
국민연금 두산에너·밥캣 지분 각각 7% 보유
두산로보틱스와 합병 땐 일반 주주 손실 뻔해
국민연금 ‘스튜어드십코드’ 이럴 때 행사해야
국민연금이 27일 열린 SK이노베이션 임시 주주총회에서 SK E&S와의 합병안에 반대했다. 두 회사의 합병 비율이 SK이노베이션 일반 주주 가치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국민연금은 SK이노베이션 지분을 6% 이상 보유한 2대 주주다. 그러나 글로벌 의결권 자문기관인 ISS와 글래스루이스 등이 합병안 찬성을 권고했던 터라 이날 열린 SK이노베이션 임시 주주총회에서 두 회사의 합병안은 85%가 넘는 찬성률로 통과됐다.
국민연금, SK 이노베이션·E&S 합병안에 반대
이번 건의 찬반 의견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쟁점은 SK이노베이션 합병가액을 산정할 때 시가(주가)를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시민단체와 국민연금 등 합병을 반대하는 측은 시가보다 자산가치로 산정해야 일반 주주가 불리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시가로 산정했더라도 자산가치가 높은 기업의 합병가액에 할증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시가로 하느냐, 자산가치로 하느냐, 할증할 것이냐 하지 않을 것이냐에 따라 SK(주)와 최태원 SK 회장 일가 등 지배주주와 일반 주주의 유불리가 달라지는 이해 상충 문제가 생긴다. 국민연금은 합병안에 대해 반대하며 일반 주주 손을 들어줬다.
두산그룹이 사업 재편 방식으로 제시한 계열사 간 분할합병과 주식교환은 SK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두산 측이 밝힌 사업 재편의 종착점은 초우량 계열사인 두산밥캣을 적자 기업인 두산로보틱스의 100% 자회사로 편입하는 것이다. 절차를 이렇다. 두산밥캣 모기업인 두산에너빌리티를 인적 분할해 신설법인을 설립하고, 이 회사를 두산로보틱스와 합병한다. 새로 출범한 두산로보틱스는 주식교환을 통해 두산밥캣을 100% 자회사로 편입한다. 이를 통해 두산로보틱스은 두산밥캣의 전 세계 유통망을 활용할 수 있고 두산밥캣은 두산로보틱스의 로봇 기술을 도입하는 식으로 시너지를 이루겠다는 게 두산그룹의 설명이다.
총수 일가에 유리한 두산 분할합병 주식교환 비율
그럴듯한 시나리오지만 진짜 속셈을 따로 있다. 합병과 주식교환 비율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업 재편의 최대 수혜자는 두산 총수 일가 지분이 절대적인 ㈜두산이다. 총수 일가는 실적이 좋지 않은 두산로보틱스 지분을 줄이는 대신 알짜 기업인 두산밥캣의 간접지분을 14%에서 42%로 3배 높일 수 있다. 두산 지배주주는 엄청난 실익을 얻는 데 반해 소액주주들은 손해를 보는 재편인 셈이다.
금융감독원은 두산의 사업 재편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자 합병과 관련한 중요 사항이 기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 차례에 걸쳐 증권신고서 정정을 요청했다. 이에 두산은 지난 16일 합병과 주식의 포괄적 교환·이전과 관련한 2차 정정신고서를 금융감독원에 냈다. 하지만 증권신고서 정정 요구만으로 합병과 주식교환 비율이 바뀌지는 않는다.
두산에너빌리티·두산밥캣 소액주주 단체 행동 나서
두산에너빌리티와 두산밥캣 일반 주주들은 단체 행동에 나서고 있다. 다음 달 25일로 예정된 임시 주주총회를 앞두고 의결권을 모으기로 한 것이다. 주주명부 확인 작업과 함께 법원에 제출할 탄원서도 취합 중이라고 한다. 이런 활동을 통해 이번 합병과 주식교환에서 소액주주가 불합리한 점을 여러 주주에게 알리고 의결권을 최대한 모으는 게 목표다. 두산에너빌리티의 소액주주 지분율은 약 63%에 달하고 두산밥캣도 외국인과 소액주주, 기금이 절반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두산의 사업 재편은 금융당국이 추진하는 기업 가치 제고에도 역행하는 것이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두산 사업 재편 관련 질문에 답변하며 “시장 우려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제도적으로 고칠 부분이 있는지 살펴볼 것”이라고 했다. 두산의 합병과 주식교환 방식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정치권에서도 지배주주에만 유리하게 계열사 간 합병을 방지하는 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이른바 ‘두산밥캣 방지법’이다. 더불어민주당의 김현정 의원의 개정안은 자산가치와 수익성 등을 무시하고 시가로 합병가액을 결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골자다. 기업 가치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합병가액을 산정함으로써 지배주주와 일반 주주의 이해 상충 문제를 차단하겠다는 취지다. 합병가액이 불공정하게 결정돼 일반 주주가 손해를 보면 이사회에 책임을 묻는 내용도 포함됐다.
“두산 사업 재편은 불합리” 시민단체들도 반대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거버넌스포럼)과 경제개혁연대 등 시민단체도 두산의 사업 재편에 반대하고 있다. 거버넌스포럼은 두산이 해당 계열사의 합병가액을 시가로 결정하도록 한 자본시장법을 악용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제개혁연대는 두산에너빌리티의 분할합병 비율과 두산밥캣의 포괄적 주식교환 비율이 불합리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두산에너빌리티와 두산밥캣 일반 주주에게 가장 유리한 방식은 두산밥캣 지분을 두산로보틱스에 직접 매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금융당국과 시민단체들이 두산의 사업 재편 방식에 이의를 제기한 만큼 국민연금도 적극적인 스튜어드십코드(의결권 행사지침)를 시행할 필요가 있다.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에 반대한 잣대를 두산에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두산은 SK보다 더 교묘할 뿐만 아니라 소액주주 피해 정도가 더 클 수 있다.
국민연금은 두산에너빌리티 지분을 약 6.8% 보유한 2대 주주다. 일반 주주가 결집하고 국민연금이 반대하면 두산의 이상한 사업 재편을 막을 수 있다. 임시 주주총회에서 저지하지 못한다고 해도 방법은 있다. 적극적인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두산에너빌리티 주식매수청구권 행사액이 6000억 원 이상이면 합병 계획은 무산된다. 국민연금이 보유 지분에 대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면 이 금액을 훌쩍 뛰어넘는다.
국민연금 두산도 스튜어드십코드 적극 행사 필요
국민연금을 비롯한 기관투자자에 대한 스튜어드십코드가 도입된 배경엔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 있다. 당시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 반대했다면 삼성의 합병 시도는 무산됐을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불법 경영권 승계 의혹 등 불미스러운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스튜어드십은 이런 사태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2018년 도입됐다.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에 150조 원 가까이 투자하고 있다.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상장사도 300개에 육박한다. 정부가 기업 가치 제고에 스튜어드십코드를 활용하려는 것도 국민연금의 이런 위상을 고려한 것이다.
현재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가 100% 작동하는 건 아니다. 주주총회에서 지배주주에만 유리한 안건에 반대했으나 좌절된 경우도 많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불합리한 이사회 의결을 차단하는 역할과 권한을 가지고 있다. 두산 총수 일가가 이익을 독점하는 방식의 사업 재편도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가 필요하다. 이는 국민연금 스튜어드십코드의 취지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